소설리스트

가짜 남편-58화 (58/74)

8장.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우리

그의 차가 보이고 벤치에 앉아 있는 넓은 등이 보였다. 효은은 다가서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이렇게 그의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초라하고 움츠러드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당당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기에, 그를 위협하는 칼날이 목 끝에 다가와도 웃어넘길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떠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은 것이라고.

그런데 그는 변명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자를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죄책감을 견디며 살아가면 모든 게 예전으로 되돌아갈 줄 알고. 누가 더 대단할까. 효은은 이렇게 그를 마주할수록 그때의 그녀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효은은 방금 온 사람처럼 인기척을 내며 이도의 옆에 털썩 앉았다.

“……한승재 씨는 괜찮고?”

질투심 따윈 느낄 수 없는 눈빛으로 이도가 물었다. 이미 제인이 자초지종을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 녀석 때문에 그와의 약속도 잊고 이곳에 와 있었다는 것도 다 눈치챘을 테지만, 그는 어른 남자처럼 이성적으로 상황을 넘겼다.

“팔을 다치긴 했는데, 괜찮을 거예요. 승재 형이 지금 간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제인보고 대신 좀 있어 달라고 했어요. 나도 일해야 하고.”

“그래. 가자. 데려다줄게.”

이도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눌려 효은은 이상한 서운함이 솟구치기도 했다. 차라리 왜 나와의 약속을 잊고 여기에 있냐고 따지고 물었다면 속이 시원했을지도 몰랐다. 정말 그녀는 그걸 바란 것일까. 의심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아직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선 안 되고, 그게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짓, 그만해요. 우리, 이런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멈춰 선 효은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도에게 통보했다.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하던 이도가 그녀를 돌아봤다. 효은의 잔인한 말에 이도의 눈빛에 균열이 일었다.

“뭘 했나, 내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우리.”

화가 난 감정을 다스리듯 내놓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살얼음 같았다.

“……아저씨를 보면 자꾸 할아버지가 생각나요.”

효은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세웠다. 그의 입에서 허무한 웃음이 흘렀다.

“알아. 나도 그래. 그래서?”

이도가 한 발짝 더 그녀에게 다가왔다. 효은은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2년이나 기다린 변명 좀 들어 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나는 네가 나타나고 나서야 겨우 숨 좀 쉬어.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눈 맞춰 주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야?”

그의 눈빛에 담긴 고통이 고스란히 내뿜어졌다. 효은은 그의 말에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말들이 그녀의 가슴을 잔인하게 찔러 대고 있다는 것만 아주 선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바보 같은 눈물이 다시 솟구쳐 오르자 효은은 다시 차로 돌아가는 그를 붙잡아 억울한 듯 말을 내뱉었다.

“흔들린단 말이에요. 아저씨가 날 흔든단 말이에요.”

결국 솔직해지고 말았다. 그제야 이도의 입가에 웃음이 올라섰다.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네.”

그가 익숙하게 효은의 손을 붙잡아 차에 태웠다. 벨트를 매어 주고 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효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한승재에게는 잘되던 거절이 이 남자에게는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그것에 닿기가 싫어 효은은 그저 모른 척하고만 싶었다. 오기일까. 이렇게 해서라도 그를 괴롭히고 싶었던 걸까. 끝까지 그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 결국엔 그녀의 마음을 배신한 것에 복수하고 싶은 건가. 그녀는 점점 더 꼬여 가는 자신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 창가만 바라봤다. 차는 어느새 그녀의 집 근처를 달리고 있었다.

이도의 차가 골목길로 접어들자마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다는 표지판과 마주해야 했다. 사고라도 난 건지 경찰관들이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들어선 차들을 돌려보내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삼엄했다. 단순한 교통사고는 아닌 것 같아 이도와 효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근처의 마땅한 곳에 주차를 했다.

“빌라 쪽에 무슨 일 생긴 것 같으니까 보고 올게. 잠깐 있어.”

이도가 당연한 것처럼 먼저 벨트를 풀었다.

“괜찮아요. 혼자 가면…….”

효은은 잠깐 허둥대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는 이미 차에서 내린 상태였다. 집 앞까지 혼자 못 걸어갈 정도로 심신이 약한 게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살짝 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얼른 이도를 따라 차에서 내린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같이 가요.”

효은이 따라가자 이도는 그녀를 자신의 옆쪽으로 이끌며 보호하듯 데리고 갔다.

걸어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효은의 빌라 앞에 세워져 있는 여러 대의 경찰차와 과학수사대라고 적혀 있는 봉고 차량이 보였다. TV 뉴스에서나 보던 모습이었다.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골목길엔 근처 빌라의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일이 생긴 게 분명해 보였다.

빌라에 도둑이라도 든 걸까. 여러 가지 상상이 머릿속에 꽉 차올랐다. 효은은 저절로 심장이 두근대며,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도에게 좀 더 붙어 걸었다. 그걸 눈치챈 이도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효은은 놀랐지만 이러지 말라며 뿌리칠 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도가 가까이 서 있던 한 젊은 남자에게 상황을 물었다.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부부 싸움 하다가 여자가 칼에 찔렸나 봐요.”

자다 나왔는지 짧은 트렁크 바지를 입은 남자가 입이 새파래진 채 몸을 살짝 떨며 말했다.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라고 해도 자신의 근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곧장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으로 남기 마련이었다.

효은은 여자가 칼에 찔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얘졌다. 단순히 도둑이 든 것과는 또 다른 섬뜩함이 찾아들었다. 빌라에 사는 사람 중 누굴까. 부부 싸움이라면 혹시 그녀의 옆집이 아닐까 하는 직감이 곧장 온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기에 처음엔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하소연하듯 전화를 걸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도장을 찍었고, 그런 부분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집을 고르는 건 불가능했으니 그냥 그녀의 운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어느 날은 옆집의 여자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들고 나타나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여자는 효은보다 나이가 한두 살 더 많아 보였고, 그녀가 예상한 것처럼 강하거나 날카롭지 않고 그저 평범했다.

남들처럼 사는데 좀 별날 뿐이겠지. 그리 생각한 효은은 그 순간마다 웬만하면 헤드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넘기려 노력했다. 한 번씩은 남자의 욕설까지 선명하게 들려와 문을 잘 잠갔는지 한 번 더 확인할 때도 있었지만 이런 작은 일조차 이겨 낼 수 없다면 진정한 홀로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자신의 나약한 심신을 탓했다.

“어머나. 아가씨, 이제 왔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정말.”

사람들 틈에서 나타난 집주인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먼저 알은척을 했다. 근처 빌라 꼭대기 층에 거주하며, 빌라의 호수 몇 개를 임대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아주머니는 효은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넘치다 싶을 정도로 살갑게 대해 주었다. 그게 알고 봤더니 옆집 신혼부부의 잦은 싸움으로 효은의 집에 입주한 사람들이 자주 바뀌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터 주변에 소문이 돌아 오랫동안 빈집으로 둘 수밖에 없었는데 효은이 그곳으로 덥석 들어오겠다고 하니 집주인 입장에선 얼마나 귀한 임대인이었을까. 그랬는데 결국엔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런 사달이 날 줄 알고 경찰서에도 몇 번이나 민원을 냈는데. 그 여자 아마 죽었을 거야. 에휴, 집값 떨어지게 이게 무슨 일인지, 원. 아무튼 아가씨 오늘은 웬만하면 친구 집에서 자. 조사한다고 경찰관들이 왔다 갔다 할 테니까 혼자 있기 무섭지 않겠어?”

여자의 죽음과 집값을 동시에 입에 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효은에게 당부를 한 집주인은 앞으로도 여자가 죽은 그 옆집에서 살아야 할 그녀의 앞날에 대해서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계약 기간이 한참이나 남은 데다, 당장 집을 뺀다고 해도 복비는 그녀가 해결해야 할 것일 게 뻔했고, 또한 살인 사건 장소의 옆집으로 이사 올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효은의 몫이었다.

“옆엔 남자 친구……?”

아주머니의 시선이 효은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이도에게로 향했다.

“아니…….”

효은이 손을 빼고 변명하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마음대로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 남자 친구가 같이 지내 주면 되겠네. 요새 여자 혼자 사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지? 내 딸 같아서 하는 소리야.”

자신의 딸이었으면 그 집에 혼자 살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어쨌든 집의 계약 기간만 유지하면 된다는 듯 멋대로 두 사람을 동거를 거론하고 사라져 버렸다.

효은은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자신의 집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저곳에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이 다시 단단하고 따뜻한 큰 손에 붙잡혔다.

“일단 가자.”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이도가 그녀를 이끌었다.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긴 싫어 효은은 그를 따라 다시 이도의 차가 세워진 곳으로 내려왔다. 그는 당연한 것처럼 그녀를 차에 태웠다. 효은은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도 이도에게는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차를 출발시키자 얼른 입을 열었다.

“병원에 가 있을게…….”

“당분간 내 오피스텔에 있어.”

이도가 당연한 일인 것처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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