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장. 최대 강적
정면으로 날아온 건 효은의 가방이었다. 정확히 우측 가슴을 강타한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자 효은이 그것을 날렵하게 다시 집어 들고서 승재를 노려봤다.
“드라마 적당히 보라고 했지?”
“나 환잔데?”
“그래서?”
우리는 진지할 수 없다는 걸 효은이 몸소 보여 주었다. 승재는 어이없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파서 누워 있는 자신에게 망설임 없이 가방을 집어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효은뿐일 것이다. 그녀의 행동이 어쩌면 대답을 대신해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내 친구 한승재 잃기 싫어.”
“이기적인 계집애.”
승재는 억울함이 솟구쳐 곧바로 받아쳤다.
“그래. 네 감정 무시하는 건 미안한데, 내 감정은? 네가 그러는 것도 내 감정 무시하는 거야. 우리 타협해. 너도 마음 정리하고, 나도 그 사람…… 아니,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 만날 테니까. 어때? 괜찮은 조건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앞으로 내 앞에서 울기만 해 봐. 다시 없던 걸로 한다?”
승재는 그의 감정을 해프닝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걸 시작 전부터 알고 있었다. 형에게는 직진할 거라며 멋진 척하고 뽐냈지만 효은과 친구 사이조차 될 수 없다면 그도 선택을 후회할 게 뻔했다. 그런 승재를 너무나 잘 아는 친구 효은은 그에게 직진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깔끔하고 망설임 없는 성격의 그녀다웠다.
“안 울어. 이젠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난다.”
“좀 전까지 눈가가 빨갰으면서.”
“야! 그건 너 사고 났다니까……. 자꾸 이렇게 시비조로 걸고넘어질래?”
“알았으니까 빨리 가. 혼자서 실연의 아픔 좀 느끼고 싶으니까.”
하. 효은은 뻔뻔하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승재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그는 모르게 고마운 미소를 내놓았다. 승재를 잃는다는 건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아주 신통한 해우소를 더 이상 방문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그녀에게 남은 게 뭐라고. 이 정도는 신에게 부탁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그녀 나름의 뻔뻔함을 보이다 병실을 빠져나왔다.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부재중 통화 표시를 내려다보다가 효은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나, 부탁이 있어요.
효은은 다짜고짜 자신의 말을 건넸다.
* * *
“원래 한국 재벌들은 이렇게 잘생겼어요?”
이도는 뚫어져라 자신을 관찰하다 불쑥 물어 오는 외국 여자의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잠시 고민했다. 효은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자신의 집에 있는 외국 친구를 데리고 알려 준 병원으로 와 달라고 했다. 네가 아프냐는 물음에는 나중에 설명한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이도는 효은이 시키는 대로 그녀의 집을 방문해 제인이라는 여자를 차에 태웠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긴 했지만, 여자는 금세 관찰 모드를 끝낸 후 그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당신이 너무 너무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빛을 보이면서 말이다.
저녁은 먹지도 못했는데 이도는 시간 단위로 체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제가 부전공이 한국어거든요. 책을 한 권 쓰려고, 스토리를 모으고 있어요. 근데 이렇게 절묘하게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목소리만 들으면 제인은 한국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도는 이런 그녀가 곁에 있어 효은이 조금 덜 외로웠을 듯해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해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효니 못 잊는 거 같은데, 왜 헤어졌어요?”
첫 질문부터 난이도가 상이었다. 이도는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 앞에서 차를 멈추며,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엄마 아빠의 손을 붙잡고 걷는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녀를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난……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이도의 대답에 제인은 원인을 알았다는 것처럼 흐린 웃음을 보였다.
“효니는 아니었을걸요. 자기한테는 가족이 없다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했거든요. 그건 그쪽…… 허즈번드 씨를 잊겠다는 뜻이었겠죠.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효니가 힘들 때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허즈번드 씨가 아니었어요.”
이도는 2년 동안 단 한 번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잠잘 때마저 들고 자던 핸드폰이 사라지는 꿈까지 꾸고 났을 땐 이미 그는 효은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를 수는 없었다. 그는 벌을 받아야 하니까. 그렇게 끝없는 고통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권이도를 이야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가장 필요할 때 옆에 없는 건 의미가 없더라고요.”
제인이라는 여자는 모든 걸 꿰뚫어 본 것처럼 이도에게 직언했다.
“…….”
“여자들한테 그건 아주 중요한 거예요. 사랑이 가장 앞에 있어야 해요. 어떤 것에도 밀리길 원하지 않아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의심하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남자. 날 가장 늦게 찾는 남자. 나한테 모든 걸 말하지 않는 남자. 그것만큼 여자를 아프게 하는 건 없어요.”
그 모든 죄를 다 가진 남자가 이도 자신이었다. 어쩌면 그가 기회라고 생각하는 걸 효은은 이미 미련이라고 결론 내려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녀를 보내고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도, 그 후회는 효은을 만난 이후부터 더욱 커져 가기만 했다.
“포기할 생각이었으면…… 보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모두 내 잘못이었으니까. 멍청하게도 우리한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역시 내 착각일 수도 있겠죠. 난 사랑 같은 거, 어떻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바보 같은 놈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는 중이고요.”
“…….”
제인은 이도의 고해성사에 잠깐 놀라 입을 벌렸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모든 걸 가진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사랑앓이를 하고 있음을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남자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현실 속에서 봐 온 재벌 유학생들은 사랑을 놀이처럼 생각하며 여자를 도구로 다루는 뻔뻔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상처받은 친구들을 카운슬링 해 주며 한국 남자에 대해 편견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읽는 로맨스 소설 속의 남자들은 현실엔 없을 것이라고. 책을 읽으며 대리만족이라도 하는 게 여자들의 로망인 것이라 생각하며 씁쓸한 웃음을 삼킨 채 책장을 덮은 적이 많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좀 달랐다. 역시, 효니가 사랑한 남자라서 그런 걸까. 제인은 둘 사이의 러브 스토리에 더욱 흥미가 생겼다. 더불어 현재 이 둘의 방해꾼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서브남 보이 프렌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졌다.
“사랑은 타이밍이란 말, 들어 보셨죠?”
제인이 흥미로운 미소를 보이며 이도에게 난해한 물음을 던졌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가는 병원에 효니 보이 프렌이 다쳐서 입원해 있대요.”
진실을 알게 된 이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마워요.”
병실 앞에 도착하자 효은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저씨는 잠깐 차에게 기다려 줘요. 금방 내려갈게요.”
이도는 더 이상 뒷말을 붙이지 않고 돌아서 걸어갔다. 제인은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얼른 효은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뭐야, 이 시추에이션은? 허즈번드 질투심 유발 작전이야?”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게 아닌데, 아, 몰라. 나도 모르겠다.”
효은은 일단 발뺌을 했지만 그녀의 행동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도에게 이곳에 제인을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질지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것이 그의 마음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그에게 질투심을 가지게 만들고 싶었던 그녀의 감춰진 감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왜 날 여기로 부른 거야?”
“아. 미안한데, 내 친구 간호 좀 해 달라고. 혼자 둘 수가 없어서.”
“왜, 네가 안 하고?”
제인은 그게 정상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없어. 그냥 그렇게만 알고 해 주라. 공짜로 재워 주는데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아이고 무서워라. 근데 나야 상관없지만 네 보이 프렌이 괜찮겠어?”
“그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야, 저 자식.”
효은은 얼른 병실 문을 열고 제인과 함께 들어섰다.
“간 줄 알았더…….”
“안녕하세요. 제인이에요.”
효은이 소개하기도 전에 제인이 불쑥 승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누워 있던 그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머리가 노란 외국인이라 주눅 들 듯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늘 회화가 부족했던 자신의 단점이 이런 데서 발현될 줄 몰랐다.
“그럼, 난 간다. 부탁해.”
“어어. 얼른 가.”
승재는 두 여자의 대화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노란 머리는 왜 이렇게 한국인처럼 말하는 걸까. 사람 더 긴장되도록 말이다.
“효은이만…… 간 건가요?”
그가 뒤늦게 어색한 침묵을 깨고 물었다. 노란 머리는 이미 이곳에 익숙한 사람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여러 가지 물건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못 들으셨어요? 내가 이제부터 보이 프렌 씨 케어해 줄 거예요.”
“……네?”
승재는 효은이 빠져나간 문을 노려봤다. 이렇게 자신을 골탕 먹이기 있는가. 자꾸만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는 외국 여자와 한 공간에 가둬지자 숨이 턱턱 막혔다. 다시 돌려보내려 해도 여자는 무슨 핑계든 다 받아쳐 이곳에 눌러앉을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승재는 병실 안의 공기가 부담스러워 어떻게든 한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는 낑낑대며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왜요? 화장실? 큰 거? 작은 거?”
“…….”
얼굴이 붉어진 승재가 어이없다는 듯 여자를 내려다봤다.
“다 싸러 갑니다!”
그가 소리를 내지르자 제인은 잠시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그럼 시원하게 싸고 오세요.”
제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에게 웃어 보였다. 최대 강적을 만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