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장. 그 사람은 만나지 마
어떤 정신으로 출근해 책상에 앉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도 덕분에 지각은 면했지만 그가 건넨 말들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효은은 아침 전체 회의에서도 멍하니 수첩만 바라보았다.
“그럼, 각자 내담자들 더욱 신경 써 주시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최 박사의 말이 끝나자 다른 상담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효은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최 박사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효은 씨, 무슨 고민 있어요?”
“네?”
“회의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아, 죄송합니다.”
효은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나라도 더 주워들어야 할 신입이 아침부터 정신을 빼놓고 있었으니. 아무리 이해심 많은 최 박사라도 거슬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최 박사는 효은이 지금 고민에 빠져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경력이 얼마인 사람인데.
최 박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녀가 효은을 더 챙기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효은은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이도에게 흔들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자신의 이름으로 이룬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할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장효은이 될 때까지 더 노력하고 실력을 쌓아야 했다.
“신경 쓰시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원래 신입 시절이 그래요. 정신도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그럴 땐……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무슨 뜻인지 효은 씨가 더 잘 이해하죠?”
최 박사는 단련되고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기술까지 갖춘 능력자. 상담가로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된 연유에는 다 그런 부분들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이 결국은 자신의 이득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잘 아는 어른이었다.
“네. 힘든 일 있으면 꼭 박사님께 상의드릴게요.”
“아, 그러고 보니 혹시 권이도 상무는 만났나요?”
인사를 건네고 돌아 나서려던 효은을 최 박사가 붙잡았다.
“어, 어제 만났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만났지만 그것까지 상담으로 칠 수는 없었다.
“진행이 빠르네요. 상담 일지는 오늘 중으로 받을 수 있겠죠?”
“아, 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효은이 얼른 대답했다.
“아무래도 노인 심리 센터 문제도 걸려 있고 하니, 권 상무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네요. 괜히 나 때문에 효은 씨가 힘든 상담을 맡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그 와이프는 알려진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상담이 제대로 될지가 문제네요. 아무튼 내가 최대한 보조하도록 할게요. 힘들어도 좀 참고 해 줘요.”
“아, 아닙니다. 어차피…… 해 봐야 할 일인데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더 고맙고요. 암튼, 이제 일 봐요.”
최 박사는 효은에게 믿음 섞인 눈빛을 보냈다.
효은은 그녀가 그 권이도 상무의 와이프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만약 말하게 된다면 그와 최 박사가 벌이는 일들이 효은과 연관된 것이란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건 효은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그와의 상담을 끝내고, 이혼 서류도 마무리하고, 제대로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마무리를 위한 정리가 필요했다. 지금 하는 일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담자는 지난 과거의 죄책감으로 수면 장애, 식욕 부진, 무기력…….]
효은은 상담 일지를 써 내려가면서 좀 더 명확하게 이도의 현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효은이 지나온 과정이었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건 아직도 그녀에게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었다. 그럴 때 효은은 내담자들에게 벗어나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다. 시간이 고통을 이겨 내진 못하겠지만 거기에 익숙해지게 만들 것. 익숙하게 받아들이라는 것.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 그녀의 부재를 이해하는 것부터 이도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효은 씨, 전화 오는데?”
열심히 업무에 빠져 있던 효은은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리는지도 몰랐다. 얼른 핸드폰을 내려다보자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녀를 찾았다.
“네, 오빠.”
― 그래. 효은아.
바빠서 아직 제대로 얼굴조차 못 본 기수였다.
“이렇게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요즘 너무 잘나가신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효은은 농담 섞인 말투로 그에 대한 친근한 마음을 드러냈다.
― 그 소식도 중요한데, 일단 다른 소식을 더 급하게 전하게 됐다.
“……네?”
― 운도 지지리 없는 내 동생 놈 좀 보러 와라.
“왜요? 승재 출근 안 했어요?”
― 너 태워 주고 출근한다고 빨리 나가더니 사고가 났어.
효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 많이 다쳤어요?”
― 일단 와서 봐. 병원 주소는 문자로 보내 줄 테니까.
* * *
급한 일들만 대충 끝내 놓은 뒤 효은은 반차를 쓰고 승재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전화로 대충 전해 들은 상황은 기수가 가볍게 전한 것보다 심각했다. 효은의 집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다가 꼬리 물기를 하던 직진 외제 차에 부딪히는 사고가 났고, 운전석이 움푹 들어가 망가질 정도로 차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고 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기수의 차 역시 단단한 외제 차라 상황에 비해 승재는 많이 다치지 않은 편이었다. 119에 실려 가 각종 검사를 받고 얻게 된 병명은 오른팔의 단순 골절상이었다. 몇 주 정도 깁스를 하면 된다는 기수의 덤덤한 말투에도 효은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녀석이 아픈 모습을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언제나 건강한 편이었고, 운동도 꾸준히 해서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었다. 병원은 늘 효은의 할아버지 때문에 들른 게 다였다. 그런 녀석이 큰 사고를 당했다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승재뿐이라고 여겼던 걸까. 그 녀석의 부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도착한 병실 앞에는 기수가 민서를 안고 서 있었다. 칭얼대는 민서를 달래는 중인 것 같았다. 남자 둘이서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승재가 사고까지 나니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두 형제의 애달픈 현장이었다.
“오빠.”
“어, 효은아.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반차 쓰고 왔어요.”
“고맙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수가 환하게 웃었다. 덤덤한 척하지만 그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민서까지 돌보며 승재의 간호를 맡고 있었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는가. 효은은 자신이 왔으니 이제 조금 쉬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래. 난 괜찮은데, 민서가. 암튼, 오늘만 좀 부탁한다.”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좀 쉬어요.”
고맙다며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붙잡아 준 기수가 병실을 벗어났다.
승재가 배정받은 곳은 1인실이었다. 뻔뻔하게 과실을 발뺌하는 상대방이 괘씸해 기수는 1인실을 잡아 버렸고, 보험사에 모든 것을 청구할 것이라며 이를 갈았다. 어찌 됐든 승재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쉴 수 있는 게 중요한 것이니까 효은이 생각하기에도 잘한 선택 같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녀석은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만우절 날, 맹장이 터진 그녀를 업고 양호실로 뛰어 내려가던 녀석의 단단한 등이 떠올라 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서 옆을 지켰는데. 효은은 승재가 지금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이 그녀가 그에게 느낀 것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보. 운전도 못하면서 누구를 출근시켜 준다는 거야.”
효은은 눈가를 훔치며 넋두리를 했다.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누가 아픈 건, 이젠…… 너무 싫어. 너는 아프지 마. 이번에는 봐주지만 다음은 없다. 아프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둬.”
“……네 말이 더 아프다.”
다치지 않은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있던 승재는 고개를 돌려 효은을 바라봤다. 약 기운 때문에 비몽사몽 정신이 없었지만 효은의 말은 뚜렷하게 들렸다. 조금 전 차와 부딪혀 사고가 났고, 팔이 조금 아프다고 느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병실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입은 살아 있는 걸 보니, 제대로 다친 건 아니네.”
효은이 입술을 삐쭉였다. 승재는 가만히 효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렇게 자신 때문에 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는 지금의 그가 효은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갈는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지만 감정은 끝도 없이 제 몫을 해내는 것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회사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효은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우선 병실에 필요한 것부터 사 둘 생각에 이곳저곳을 뒤져 파악했다. 할아버지 때문에 병원이라면 징글징글했지만 또 그만큼 거기에 도가 트기도 했다. 딱 필요한 것만 핸드폰 메모장에 적은 효은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일단 지내면서 필요한 것들만 먼저 사 올게.”
“됐어. 형한테 부탁하면 돼.”
“시골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한테 전화할까?”
효은은 협박에 능숙했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배운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있어도 도움 될 거 없어. 필요한 건 형한테 사 오라고 할게. 안 되면 간병인 쓰면 되고. 넌 얼굴 봤으니까 얼른 가.”
“야.”
“병원 지긋지긋하잖아. 나까지 보태긴 싫어.”
차라리 칭얼대면서 아이처럼 모든 걸 맡기고 기대었다면 그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했을 것이다. 나를 여자로 본다던 녀석을, 다른 남자들처럼 멀리하고 거리감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재는 오히려 효은에게 선을 지키려 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너한테 세수도 도와 달라고 하고 싶고, 머리카락도 감겨 달라고 하고 싶고, 내 옆에 꼭 붙여 놓고 싶어. 근데 그런 건 다 동정이잖아.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싶진 않아.”
“그래. 너 잘났어.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효은은 메모지에 필요한 것들을 적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선 언제부턴가 진동이 울렸다.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데리러 온다던 사람. 우산이 없다는 핑계를 가져와서라도 그녀를 더 보고 싶어 하던 남자. 효은은 핸드폰을 꺼냈다.
“근데…… 그 사람 보러 가는 거면 가지 마.”
승재의 말에 효은은 뒤돌아서 녀석을 바라봤다.
“…….”
“이제 그 사람은 만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