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55화 (55/74)

55장. 어떤 여자 때문에

“고백을 했다고?”

“응.”

승재는 덤덤하게 말하고 넥타이를 고쳐 맸다. 정장을 입고 출근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넥타이를 매는 일에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오늘은 특별히 더 멋지게 꾸며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그는 다시 손을 놀렸다.

“효은이는 뭐라는데?”

모처럼 쉬는 날이라 기수는 익숙하게 민서를 아기 띠로 안고 동생의 아침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랑이나 연애엔 좀 모자라다 싶었던 녀석이 뜬금없이 폭탄 발언을 했다. 그것도 아주 덤덤한 얼굴로 말이다. 기수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주방 입구까지 걸어 나와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

“뭐라긴. 당장 받아 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승재는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덤덤하게 뒷이야기를 전했다. 오래된 마음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기수는 승재가 효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유학을 떠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직진하라는 충고를 건넬 수도 없었다.

효은은 이미 결혼한 여자였다. 그 남자와 별거 중이긴 해도 아직 서류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라 했었다. 사람 마음이 언제나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라지만 엄연히 지켜야 할 선은 있었다. 승재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효은의 결혼식 날. 그녀를 이끌고 식장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너, 잘못하면 불륜남 된다. 그건 알고 저지른 거지?”

승재는 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그를 욕할 게 뻔했다. 하지만 내막은 달랐다. 이젠 그 진실을 내세워서라도 효은에 대한 감정을 용기 내어 표현하고 싶었다.

“두 사람 결혼, 가짜였어.”

“……뭐?”

기수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효은이 할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결혼이었다고. 그 남자도 효은이 이용해서 자기가 가질 것 챙겼고. 처음부터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어. 이제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졌어. 이혼 서류는 이미 보낸 상태고.”

승재는 완벽하게 넥타이를 매고 돌아서 형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국자를 든 채 놀란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결혼에 그런 진실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동생은 더욱 미련한 사랑을 놓을 수 없었던 걸까. 기수도 무엇이 정답이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옛날에도 그랬어. 항상 한발 늦어서 놓쳤어. 이제는 안 그럴 거야. 효은이가 그 남자 때문에 아파하는 거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아. 내가 지켜 주고 싶어.”

“너…… 내 동생 한승재 맞냐?”

기수는 동생이 언제 이렇게 단단해졌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곧이어 걱정이 따라붙었다. 방향이 다른 외로운 사랑에는 분명히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효은의 감정이 승재에게 닿지 않는다면 고백은 슬픈 결말을 맞이할 게 뻔했다. 그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가 효은이 안 놓아주면? 그땐 어떡할 건데?”

가짜 결혼이라고 해도 진심은 다를 수 있었다. 승재가 모르는 두 사람만의 감정이 남았다면 녀석은 눈치 없는 방해꾼밖에 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상처받는 사람은 자신의 동생일 게 뻔했다.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동생을 붙잡지 못했다는 후회는 남기지 말아야 했다.

“형, 나는 그 남자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그래, 효은이가 흔들릴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내 마음 숨기긴 싫어. 나는 이제 효은이를 여자로 봐. 숨기려고 해도 그게 안 된다고. 그냥…… 뒤에서 조용히 응원해 줘.”

승재는 제 할 말을 끝내고 돌아서 가방을 챙겼다. 현관으로 다가서는 동생을 본 기수가 얼른 국자를 식탁 위에 던져 놓고 뒤따랐다.

“야, 아침은? 지금 밥하고 있잖아.”

승재는 신발을 꿰어 신으며 현관 앞에 놓인 거울로 다시 한번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효은이 데려다주고 출근하려고.”

그는 당당하게 말하며 기수의 차 키를 들어 올렸다. 당분간 끌고 다닌다기에 헛바람이 든 줄 알았는데 그게 여자 때문이었다니. 기수는 동생 승재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빠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 가도 늦었어. 간다.”

승재는 기수와 민서에게 차례로 인사하고 허겁지겁 현관을 나섰다. 기수는 저절로 한숨과 함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녀석이 이렇게나 직진 본능이 강한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기수는 동생의 의욕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렇게 부딪치며 사랑을 앓아 보는 것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짝사랑을 숨겨 둔 채 그저 흘러가는 옛사랑으로 남기기엔 녀석의 순정이 아까웠다. 모든 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니까. 그는 자신의 품에서 잠든 민서를 내려다보며 다시 주방으로 복귀했다.

* * *

빵, 하고 클랙슨이 울렸다. 효은이 돌아보자 고급 승용차 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성큼성큼 효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태워 줄게.”

효은은 그의 뻔뻔함에 웃음이 나왔다. 마치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그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박 비서님은요?”

늘 세트처럼 붙어 다니는 사람까지 떼어 놓고 나타났다는 게 놀랍기까지 했다.

“당분간 혼자 출근할 거야.”

효은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나 때문이에요?”

“겸사겸사. 너 박 비서 부려 먹는 거 싫어했잖아.”

핑계가 없어 그것을 가져와 갖다 대는 걸까. 효은은 이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를 부리라고요?”

이도는 눈치가 빠르다며 간단히 웃었다.

“그래. 마음껏. 나를 부릴 수 있는 사람, 너밖에 없어.”

“그래서, 감사해야 해요?”

“내가 감사하지. 아침부터 실컷 볼 수 있으니까.”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않았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 남자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내내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얄미울 정도였다.

이도는 효은이 탈 수 있도록 조수석으로 돌아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출근길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그런 두 사람을 요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효은에게 박히는 여자들의 시선은 당연히 날카롭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무슨 드라마를 찍고 앉았냐고.

“빨리 타.”

이도가 재촉했다. 효은은 일단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면 지각은 확실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하며 행동을 합리화했다. 효은은 이도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가 차에 올랐다.

“벨트.”

운전석에 오른 이도가 몸을 효은 쪽으로 기대 왔다.

“내, 내가 할 수 있어요.”

효은은 뒤쪽으로 몸을 빼며 얼른 안전벨트를 맸다. 그의 눈빛에 이끌려 이제껏 수없이 되뇐 다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게 싫어 증명하라며 내지르긴 했지만 이것이나 그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사랑을 증명하라니. 나를 사랑한 게 맞느냐고, 나는 아직도 당신과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을 게 뻔했다. 미련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꺼낼 말은 아니었다.

“비 오기 시작하네. 나 아니었으면 분명 지각했을 거야.”

창가엔 빗물이 부딪쳐 내렸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둘 우산이 들려졌다. 그 속에 함께 있어야 할 효은은 한 남자와 한 공간 안에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속도가 빨라지자 유리창에 이슬이 맺히듯 물방울이 맺히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마치 그와 그녀를 한 공간에 가두는 것처럼.

“하루 종일 내린다던데. 우산 챙겼어?”

효은은 아차, 싶었다. 어젯밤, 내일 날씨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만든 인물이 옆에서 그걸 물으니 조금은 억울한 화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누구 때문에 어젯밤부터 정신이 없어서요.”

이도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그 말을 되돌렸다.

“그럼 내가 책임져야겠네. 저녁에 센터 앞으로 갈게.”

사랑을 증명하라는 게 연애라도 하자는 걸로 들렸을까. 효은은 운전하는 이도를 건너다봤다. 그는 정말 우리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효은은 끝난 감정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할아버지가 떠올랐고, 그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 같았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전부였고, 그런 할아버지를 그렇게 보낸 건 영원한 죄책감으로 남는 게 맞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 바보라고, 그 녀석을 다시 사랑해도 나쁜 게 아니라고, 네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말해 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호는 이제 그녀의 곁에 없었다. 그게 효은이 이도의 마음을 진심으로 느낄 수 없는 이유의 전부였다.

“이런 날,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신호가 멈춘 후, 이도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효은과 눈이 마주친 그가 숨겨 둔 상처를 애써 잠재우듯 자그마하게 웃었다.

“그래서 비가 오면 힘들어. 이유도 없이 화가 나고, 날카로워지고, 사람들을 괴롭히지. 제일 많이 당한 사람이 박 비서였겠지.”

효은은 이도가 정말로 그녀에게 상담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그녀가 필요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아직은 그녀가 그에게 필요한 존재라 상담이라는 핑계를 가져와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박 비서님 꼭 월급 더 많이 올려 줘요.”

효은은 상담사로서의 위로 대신 진지한 농담을 건넸다. 그게 지금 이도에게 더 필요할 것이다. 그녀 역시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그에게 충고를 건넬 자격이 있을까 싶었다.

“근데 이젠 안 그래. 비가 와도 괜찮아졌어.”

차가 다시 출발했다. 효은은 그가 어떻게 극복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게 가능한지. 아무리 해도 낫지 않는 이 죄책감이라는 병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된 것인지 그녀도 따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떤 여자가 비 오는 날, 놀이공원에 데려가줬거든.”

어느새 차는 센터 앞에 멈춰 섰다. 출근 시간보다 10분 앞선 시각이었다. 지각을 면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효은은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근무 잘하고, 저녁에 봐.”

이도가 그녀 대신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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