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장.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건
“……조심하셔야 합니다.”
혈압을 체크한 주치의가 나름 경고하듯 권 회장을 바라봤다.
“어차피 가야 할 나이에 무슨.”
무상은 의사의 말을 개의치 않으며 창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수속을 밟아 들어온 입원실 안의 보호자는 강 여사뿐이었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그럼.”
의사를 마중한 강 여사는 다시 무상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폐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말만 되뇌었다.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병을 끌어안은 채 노인은 홀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술도 필요 없다. 더 살아서 누릴 것도 없다. 강 여사의 눈물 앞에서 무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날씨가 차요.”
강 여사는 열어 놓은 창문을 닫으려 했다.
“……괜찮다.”
무상은 짧게 말하고 침상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더 익숙한 나이였다. 이제껏 살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고,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도 고마워해야 했다.
태호를 떠나보내고 마음이 많이 약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가져다 붙인 손주들의 결혼이 끝내 그의 잘못된 결정으로 어긋나 누구 하나 행복하지 않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아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모두 다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도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 끝을 온전히 주지 않던 녀석이었다. 자신에게 내쳐질 준비를 하며 마음을 닫은 채 살아온 손자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눈에 보이는 재물뿐이었다.
결국 원하는 것이 주식이라면 그것을 주고 떠나겠다는 녀석이 괘씸해서, 진짜 권이도로 살고 싶다는 말이 그가 이제껏 쏟아부은 마음을 거절당한 것만 같아, 마음이 떠난 손자를 제 옆에 붙여 두기 위해서 그는 모른 척했다.
핏줄이 중요했다면 처음부터 선영에게 모든 걸 넘기고 물러났을 것이다. 그녀가 모든 걸 가지고 휘두른다고 해도 그는 더 이상 맞설 힘도 이유도 없었다. 다만, 이도가 그들에게서 내쳐지는 건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녀석이 자신을 온전한 권씨로 인정할 때까지, 권 회장은 이도를 곁에 두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외롭고 고단한 인생에 위로가 되어 준 손자를 잃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 너무 많이 하시지 마시라니까요.”
그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강 여사가 조용히 잔소리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도……, 효은 양 만났다고 하네요.”
강 여사가 전해 준 소식은 그나마 무상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는 어느새 약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요즘은 꿈속에서 먼저 떠나보낸 아들을 만날 때가 많았다.
* * *
“왜, 별로야?”
스페셜 메뉴로 나온 고기의 질이 이전보다 떨어졌다는 가차 없는 지적으로,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를 홀까지 뛰어나오게 만든 선영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앞자리에 앉은 민아에게 물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지만 그녀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아니, 정확히 2년 전, 효은이 이도를 떠난 직후부터 민아는 선영의 앞에 앉아 있는 모든 시간들이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이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그 내막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그 단서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 깊이 파고들어 알아낼수록 민아는 이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이제 와 착한 여자가 되지 않겠다고 비웃었지만 그녀는 아주 악한 년도 될 수가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좋은 사람 같아요.”
“근데?”
왜 결혼은 싫다고 하는지. 선영은 도통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아니, 네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는 것처럼 눈빛이 얼음같이 사늘하고 날카로워졌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 너를 데려와 키운 은혜를 갚기엔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는 한심하고 단호한 표정이었다.
“저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지길 바라지 않아요.”
민아 역시 이도와 같은 마음이었다. 온전하지 못하고 당당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서 사랑이란 사치였다. 그것으로 누군가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걸 네가 왜 걱정해?”
선영이 우습다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피가 다른 건 표시가 나는 건가 봐. 난 살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걱정해 본 적 없어. 그것만큼 어리석은 감정 낭비가 없다는 걸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거든.”
그녀는 여유롭게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천천히 내려놓았다.
“박 팀장이 너를 사랑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니?”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것처럼 선영의 물음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민아는 약이라도 집어 먹은 듯 흘러나오는 진심을 막지 못했다.
“……뭐?”
점점 굳어져 가는 선영의 눈이 민아에게 날카롭게 닿았다.
“키워 주신 거, 감사하게 생각해요. 거기에 보답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지금 쫓겨난다고 해도 불만은 없어요. 항상 버려질 준비를 하고 살았으니까 겁나지 않아요. 태생은 바뀌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키우는 내내 알려 주셨잖아요. 원망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이 집을 떠났을 거예요. 근데…… 더 이상은 어머니 뜻에 맞추는 일 못 하겠어요.”
민아는 진심을 담아 선영을 바라봤다. 늘 그녀에게 벽을 느끼며 다가가지 못하면서도 정에 굶주린 아이처럼 사랑을 원했다. 얻지 못하고 실패할 때마다 상처받아 눈물 흘리며 마음을 접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라고. 선영도 시간이 지나면 살아온 정이라도 생겨 그녀를 딸로 받아 줄 것이라고. 어쩌면 그녀는 강 여사가 말한 그 마지막 희망의 끈을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선영의 심복이 되어 살았다. 하지만 이도를 통해 이제 그녀는 모든 걸 내려놓게 되었다. 희망은 그저 희망일 뿐이었으며, 헛된 욕심은 아무나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마음처럼 이도가 홀로 효은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무너지고 말았다.
“권이도가 사람, 여럿 병신을 만드는구나.”
선영이 코웃음을 치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넌, 아직도 나한테 이용할 가치가 있는 애야. 그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삶 아니었니? 박 팀장은 네가 아니라 내 사위 자리가 탐나는 인간이야. 무슨 뜻인지 알았으면 조용히 결혼 준비 해. 누가 또 알아? 그렇게 살다 보면 정말 너를 사랑해 줄지. 이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 끝이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결말이 되어 버렸다. 선영은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조금은 줄어든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회장 자리에 앉는 그날. 그녀는 비로소 제대로 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허즈번드도 있고, 보이 프렌도 있다, 이거지?”
제인은 효은도 먹기 힘든 아주 매운 닭볶음면을 두 개나 끓여서 그녀 나름의 해장 중이었다. 효은은 잔소리를 좀 더 빨리 피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술이 깬 이도가 대리기사를 불러 돌아간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며 머릿속을 괴롭혔다.
‘증명해 봐요. 우리가 한 게 사랑이었다는 거.’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게 탈이었다. 이도는 효은의 뺨을 감싼 채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봤다. 그가 키스하는 순간, 증명은 아주 쉬웠을 것이다. 떨리는 그녀의 심장을 감출 수는 없을 테니까.
‘설마 지금 키스 각?’
하지만 다행히 볼일을 보기 위해 거실로 나온 제인 덕분에 효은은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도를 밀쳐 내고 그녀는 자신이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제인이 급하다고 문을 두드려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이도가 그녀의 집에서 떠난 후에야 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 때문에 키스 못 해서 아쉬워?”
효은이 립스틱을 바르다 말고 제인을 노려봤다.
“넌 왜, 한국에 들어왔는지부터 나한테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유가 어디 있어?”
제인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효니가 보고 싶으니까.”
그녀는 정말 간단한 진실처럼 말했다. 지금은 학기 중이었고, 그녀가 책임져야 할 일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은 즉흥적인 감정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효은은 고맙다고 해야 할지, 철없다고 해야 할지,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니 외로움이 덜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뒷감당 역시 그녀의 몫으로 돌아올 게 뻔했다.
효은은 이제 감정을 내세워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고 내지르지 못했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게 이런 걸까. 사랑하고, 표현하고, 아낌없이 주는 것보다 감추고, 참고, 견디는 게 더 쉬웠다.
“뭐가 문제인 거야?”
제인은 모처럼 만에 진지한 얼굴이었다.
“가짜 결혼이었어. 그 사람이랑 나.”
효은은 담담히 말하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이렇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쇼킹한 얘기를 꺼내 놓고 도망치겠다는 거냐며 제인은 현관까지 따라 나와 효은의 말을 붙잡았다.
“계약 결혼 같은 거야? 근데 아주 큰 위기가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거고. 그땐 서로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뒤늦게 깨달은 거야! 이거, 후회남 그 스토리 맞지?”
제인은 신이 나 혼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너…….”
효은이 한심하게 제인을 바라봤다.
“한국 로맨스 소설 좀 적당히 봐.”
“야, 그게 한국어 공부에 얼마나 도움 되는 줄 알아? 그나저나 그 소설 주인공을 내 눈앞에서 만나다니. 혹시 그 남자, 내 여자한테만 다정한 재벌 3세야?”
효은은 뜨끔했다. 정말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그들의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박. 그럼 걱정할 거 없어. 로맨스 소설은 무조건 해피 엔딩이거든.”
해피 엔딩. 효은은 그게 자신에게도 해당될지는 미지수라 웃으며 신발을 꿰어 신었다.
“출근한다.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고.”
효은은 얼른 빌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제인과 대화를 나누느라 또 아슬아슬하게 출근 시간을 맞추게 될 것 같았다. 제대로 뛸 준비를 하고 가방을 크로스로 메는데, ‘빵’ 하고 클랙슨이 울렸다. 뒤돌아보자 익숙한 남자가 고급 세단의 문을 열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