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53화 (53/74)

53장. 증명해 봐요

“후 아 유? 두 유 노 효니? 아, 효으니?”

젊은 외국 여자는 오히려 이도에게 되물었다. 그러다 그의 뒤쪽에 있는 효은을 발견한 그녀가 끌고 들어온 트렁크를 내팽개치고는 달려갔다.

“효니! 달링!”

얼떨결에 제인을 안아 든 효은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의문을 풀었다. 효은이 지금 쓰는 비밀번호가 제인과 함께 살 때의 비밀번호와 같았기에 그녀는 아무 의심 없이 그것을 눌렀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집주인에게 연락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효은은 이 집에 들어선 이후, 가방 속에 든 핸드폰을 꺼내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전화를 안 받아? 내가 몇 번이나 걸었는데. 무슨 일이 난 건가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전에 쓰던 비밀번호 눌러 본 건데……. 근데 여기, 이분은 누구?”

장우산을 들고 우직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로 제인의 시선이 저절로 향했다.

“와우! 그 보이 프렌이야? 나이스 투 미 츄. 제인이에요. 당신이 우리 효니 밤마다 울게 만든 남자군요. 뭐, 인정할 만한 비주얼이에요. 합격!”

뭐가 뭔지. 제인은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효은은 얼른 그녀를 끌어와 집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이도가 빨리 제인과 멀어지길 빌었다.

“제 친구예요. 걱정할 거 없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효은이 중문을 닫으려 하자 제인이 황급히 그 행동을 막았다.

“왜 가요? 같이 비어 한잔해요!”

제인은 자신의 에코 가방에서 익숙한 한국의 편의점 봉지를 꺼냈다.

“한국은 맥주가 너무 싸서 좋아. 네 개 사면 더 싸. 개이득!”

이도는 제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태를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외국인의 모습을 하고 한국 사람보다 더 많은 은어를 사용하면서 그를 외국인 취급 하듯 대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할까. 우선은 효은과 친분이 깊은 것 같으니 인사를 나눌 필요는 있는 것 같았다.

“권이도입니다.”

이도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제인이에요.”

그녀가 불쑥 이도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한국에선 인사를 할 때 손을 잡고 흔드는 ‘악수’라는 걸 한다고 했던 걸 기억하는 것 같았다.

“우리 효니, 보이 프렌이시죠?”

“제인, 아니라니까!”

효은은 얼른 나서서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라고? 그럼 이 사람은 누군데? 효니 우울할 때마다 달콤하게 위로해 주던 목소리가 분명한…… 아닌가. 좀 다른가. 이분 목소리가 좀 더 낮긴 한데, 그럼 이분은 누구……?”

제인이 궁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을 반짝였다. 이도는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었다.

“……남편입니다.”

이도가 융통성 없이 직언하자 효은은 그를 노려보듯 바라봤다. 꼭 사람을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가. 그녀는 이제 끝이라는 것처럼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제인에게 들어야 할 잔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 남, 허즈번드? ……네에?”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는 눈빛으로 제인이 효은을 바라봤다. 제인에겐 이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굳이 상처를 끄집어내 쑤실 필요가 있을까. 그녀가 영국으로 떠난 이유는 모든 걸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과거의 남자일 뿐이었다.

“곧 서류 정리 할 거야.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

효은은 제인과 이도에게 동시에 전하듯 단단하게 일렀다.

“와우. 내가 난처한 상황에 나타난 거네요. 아무튼 난 상관없으니까 맥주 마시고 싶으시면 있다 가세요. 효니도 괜찮지? 어차피 서류 정리 할 사이라며? 편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제인은 자유연애주의자였다. 헤어진 남자 친구와도 스스럼없이 만나 술을 마시고, 진지한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과 다시 사귀는 일은 없었다. 그게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남아 있잖아. 감정이 사라졌다고 해서 굳이 그걸 모른 척하고 싶진 않아. 친구로 남는다고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야. 효니.’

다른 외국인 친구들도 그랬다. 부모가 이혼과 재혼을 반복해도 그들의 인생과 자신은 별개인 것처럼 구분 지었다. 사람들마다 가치관이 달랐기에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효은은 외국에서 심리학을 배우며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인간의 관계와 감정을 바라봐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이도를 만나자마자 그 다짐은 우스운 허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까지 모두 이겨 내야 벗어날 수 있는 걸까. 효은은 그러기 위해서 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괜찮아요. 아저씨 시간만 괜찮으면 있다 가요.”

효은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도는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효은의 집 거실에 있는 작은 식탁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엔 효은이, 효은의 옆엔 제인이 앉아 이도는 원 없이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 게임할까요?”

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뛰어넘어 쇼킹하기까지 했다. 계약 결혼을 한 남녀가 헤어짐을 앞두고 서류 정리를 하기 위해 만났다가 술자리 게임을 하게 되는 상황은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나온 적 없는 내용일 것이다. 어느 대목에서 사람들이 이해란 걸 할 수 있을까.

효은은 제인이 왜 한국으로 그녀를 찾아왔는지 묻지도 못한 채 제인이 건넨 진실 게임 질문을 받아야 했다.

“한국으로 빨리 돌아간 이유, 그 전화하던 보이 때문이야?”

제인의 질문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했다. 이도의 입장에선 말이다. 그걸 즐기는 것처럼 제인의 표정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전화한 사람이 그가 아니란 걸 이 여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직도 효은에게 감정이 남아 이 술자리에 있다는 것 또한 단번에 알아채고도 남았을 테다. 당신의 노력이 의미 없다는 걸 확인 사살 해 줄 테니, 바보 같은 짓은 그만하라는 경고인 걸까. 이도는 제인을 바라보다 효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효은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것부터가 이도의 심장을 짓이기는 것 같았다. 결국 효은은 대답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술잔을 들었다.

“이리 줘.”

제인이 면세점에서 사 온 양주까지 섞은 폭탄주였다. 이도는 얼른 효은의 잔을 뺏어 들었다.

“괜찮아요.”

효은은 도움받지 않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술은 이도의 목 안으로 넘어간 이후였다.

“우리 효니, 술 잘 못 먹는 것도 아시고. 이렇게 멋진 흑기사도 해 줄 거면서 왜 효니 마음은 못 잡았어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예요?”

단순한 궁금증으로 파고드는 제인의 물음에 이도와 효은은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그러다 이번엔 효은이 그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흑기녀를 자처하며 그의 술잔을 가져갔다. 하지만 또다시 뺏긴 술잔은 이도에게로 되돌아갔다. 연속적으로 폭탄주 두 잔을 먹고도 이도는 끄떡없는 눈빛이었다.

“내가 너무 잔인했나?”

제인은 소파 아래에 뻗어 있는 이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까 다행이다.”

효은은 낑낑대며 이도의 겉옷을 벗겨 몸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모른 척하면 그뿐이지만 그게 쉽진 않았다. 제인이 의도적으로 쏟아 낸 질문들을 감당하지 못한 채 그는 혼자서 양주 한 병을 비워 냈다. 술이 센 사람이라도 그 속도로 마셨다면 뻗어 버리는 게 당연했다.

효은은 이도가 거실 소파 아래에서 잠들도록 그냥 두었다. 그의 핸드폰으로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데려가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사정을 설명하는 것도 골치가 아팠다. 어차피 제인과 효은은 안방에서 같이 잠들면 되는 것이니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왜 헤어지려고 해? 널 못 잊어서 이렇게 절절한 사람이랑?”

이불까지 찾아와 그의 몸 위로 다정하게 덮어 주는 효은을 바라보며 제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효니는 이상해. 자꾸 참으려고 해. 솔직해지는 걸 겁내 하는 것 같아. 그럼 좋은 상담사가 될 수가 없어. 효니부터 솔직해져야 상대방도 마음을 열지 않을까?’

심리 상담사가 되려고 마음먹었던 이유는 그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녀가 가진 문제들을 들여다보기 위해 상담사가 되려고 했던 것도 같았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서 답을 찾고자 했다. 이미 찾았다고 생각했다. 혼자인 것이 두려웠다. 기대고 싶었고, 할아버지를 대신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게 권이도란 남자였다. 첫사랑이었고, 시기는 적절했다. 그래서 우리가 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제 와 그의 변명이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시간은 이미 흘렀으니까. 되돌릴 수 없다는 것만큼 큰 죄는 그녀를 괴롭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도를 거실에 두고 효은은 제인과 함께 안방 침대에 누웠다. 여독 때문인지, 영국보다 더 맛있는 한국 술 때문인지 제인은 금방 잠들었다. 효은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눈을 감아 보았지만 잠에 빠질 수가 없었다.

여전히 2년 전, 그때에 머물러 있다는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더 잔인하다는 걸, 돌아온 후에 알아차렸다. 할아버지의 산소에 오를 때마다 그는 죄책감과 마주했을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녀를 기다리면서, 벌을 받는다는 이유로 손발이 묶인 채, 그 시간에 머물러 정리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그녀였다.

효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인이 깨지 않게 움직임을 제한하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 쪽을 바라보는데 이도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으로 좀 더 다가서자 이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가 버린 걸까. 서운함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밀어낼 땐 언제고, 더 다가오지 않는다고 토라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우스운 감정 놀이가 싫어 모든 걸 정리하려고 했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실패를 맛본 기분이었다.

“내 걱정 돼서 나온 거야?”

이도의 목소리였다. 효은이 놀라 뒤돌아섰다. 그가 열린 욕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효은은 멋쩍은 표정으로 그가 덮었던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술 다 깬 거 같으니까 대리 불러서 가요.”

“……장효은.”

그녀의 이름을 부른 이도가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효은이 마음을 먹고 돌아섰지만 그를 가까이서 바라보자 심장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효은은 마음을 먹듯 당돌하게 물었다.

“날 흔들고 싶어요?”

이도가 작게 웃었다.

“……뭐라도. 난 지금 가릴 처지가 아니야.”

그는 오히려 덤덤하고 뻔뻔했다. 불쌍한 얼굴로 애원이라도 해 주길 원했나. 하지만 그는 권이도였다. 효은은 깊어지는 그의 눈빛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대로 도망치는 건 그녀 자신의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래요. 증명해 봐요.”

효은이 먼저 그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우리가 한 게 정말 사랑이었다는 거.”

올라서던 이도의 입꼬리가 진지하게 멈춰 섰다. 그의 손은 이미 효은의 두 뺨을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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