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장. 우리가 한 건 사랑이 아니에요
“방이……?”
이도는 현관 중문을 열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잔, 잔소리하지 마요.”
서둘러 옷가지들을 집어 든 효은이 베란다 밖으로 대충 던져 놓았다. 집은 이사 온 모습 그대로 박스조차 풀지 않은 난장판이었다. 마치 지금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남편 같은 소리 하기만 해 봐요.”
무시무시한 경고가 한 번 더 날아왔다.
“아직 남편이야. 도장 안 찍었어.”
이도는 뻔뻔하게 말하고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엉덩이에 무언가 걸려 들어 올려 보니 효은의 속옷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가 날아오듯 소파로 달려와 이도의 손에 들린 그것을 낚아채곤 등 뒤에 숨겼다.
“도우미 아줌마 붙여 줄까?”
“내가 알아서 해요. ……아직도 남편인 것처럼 굴지 말라고요. 진짜 마지막 경고예요.”
효은이 최대한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도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웃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해 방 안을 돌아봤다.
이런 작은 공간에서 복작이며 사는 것이 그녀의 꿈인 것일까. 또래들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어서 2년 만에 돌아와 이리도 정신없이 일상을 살아 내는 걸까. 그 이유 안에는 이도를 지우기 위한 노력도 포함되어 있는 걸까. 겁이 나 묻지 못할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마실 거 뭐 줄까요? 물밖에 없지만.”
효은은 주방에 서서 머그컵을 받칠 쟁반을 찾고 있었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날, 그녀는 바닥에 누워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리웠던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이제 그녀를 반겨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쓸쓸함이 동시에 몰아치며 진짜 혼자라는 것이 실감 나 버렸다.
“물은 냉장고에 있는 거 아니야?”
어느새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이도가 물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그의 향수 냄새가 가까이에서 느껴지자 효은은 또다시 눈가가 시큰거렸다. 울지 않기 위해 수없이 연습했는데 이리도 쉽게 무너지다니.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허무했다.
“쟁반이 없어요.”
입술을 질끈 깨문 효은은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찬장 이곳저곳을 열어 보았다.
“여기 있네.”
먼저 쟁반을 찾아 낸 이도가 효은의 앞에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효은은 얼른 머그컵에 생수를 따랐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그녀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모든 걸 다 들켜 버릴 테니까. 호기롭게 혼자가 되겠다고 떠나 버려 놓고선 여전히 하나도 바뀌지 않은 울보처럼 보일 순 없었다.
“장효은.”
그가 알아챘다는 경고였다. 효은은 얼른 쟁반을 들고 소파 쪽으로 걸어가 그를 기다렸다. 이도가 그곳에 앉자, 그의 앞에 물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쟁반을 내려놓은 효은이 그제야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부탁드릴게요. 상담 중에는 존댓말을 써 주세요. 철저하게 상담사와 내담자로 대하기로 했잖아요. 그 정도는 당연하게 지켜 줄 거라 믿습니다.”
이도가 효은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네. 상담사님. 목이 아프니 좀 앉으시면 안 됩니까?”
“아. 죄송합니다.”
효은은 이도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상담은 마주 보고 앉아 내담자의 표정과 감정을 읽으며 진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효은은 다시 일어나 이삿짐 박스 두 개를 끌어왔다. 하나는 찻잔을 놔둘 수 있게 그의 앞에 두고, 다른 하나에는 자신이 앉았다. 그제야 얼추 분위기가 갖춰진 느낌이었다.
“이제 상담 시작하겠습니다. 원래는 여러 검사들을 먼저 진행하고 상담하는 게 원칙인데, 내담자님께서 빨리 자기 병을 고치라고 난리를 치셔서 우선 급하신 문제부터 상담해 보겠습니다.”
효은은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적어 두고 상담 일지를 적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닙니다. 내담자님이 스스로 병을 이길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들어 주고 도와주는 조언자입니다. 마음의 병은 결국 스스로가 이겨 내야 한다는 걸 본인이 인식하고 계셔야 해요.”
효은은 막힘없이 이도를 내담자로 대하며 그녀가 원칙으로 삼는 상담 철학을 일러 주었다. 똑 부러지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상대가 신뢰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는 모습이 아마추어 같지 않았다. 그가 첫 내담자라는 말에 어느 정도는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라 추측했는데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정말 누가 누굴 걱정할까 싶었다. 효은이 이만큼 견뎌 준 것만으로도 이도는 만족스러웠다.
“권이도 씨, 아니, 편하게 이도 씨라고 부를게요.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요? 몸의 변화든 감정의 상태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효은이 곧장 그의 상태를 빠짐없이 적어 두겠다는 것처럼 상담사의 눈빛으로 물었다.
“꿈에 한 여자가 자꾸 나타나서 목을 졸라요.”
이도는 덤덤히 현실을 말했다. 효은은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 뜨끔한 표정으로 이도를 바라봤다. 상담사를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내담자인 건 확실했다.
“그, 그 여자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같이 살았습니다.”
그게 너라는 것처럼 이도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여자가 떠났군요.”
그녀가 먼저 정답을 말해 주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이별은 상처를 남기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 여자를 잊어 보려고 노력해 보셨나요?”
“……잊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도의 대답은 당당했다. 효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득 현실감이 찾아들었다. 또 이런 의미 없는 연극 놀이로 누구의 잘못을 따지겠다는 것인가.
그는 결국 변명을 하고 싶은 걸까. 과거를 되돌려 끝내 용서받아 그의 잘못을 털어 내고 싶은 건가. 완벽해지고 싶은 사람이니까.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감정만을 내세운 이기심이었다.
“그 여자는 이미 당신을 잊었다면요? 마음은 일방통행일 때 의미를 잃는 법입니다. 그 여자는 이도 씨를 잊고 아주 잘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도 씨만 지나간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요. 바보같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효은은 차분히 설득했다.
“……그 여자한테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이도가 몸을 좀 더 효은의 앞으로 숙이며 본론을 꺼냈다. 효은은 이도의 끈질긴 시선을 마주하다 작은 한숨이 섞인 웃음을 내놓았다.
“결국은, 그 여자한테 이도 씨의 잘못을 변명하고 싶은 거군요.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거예요? 왜요? 그 여자가 이도 씨 때문에 상처받길 원해요? 지금 이도 씨가 아프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받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 이도는 입 밖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의 내렸다. 효은은 입을 닫고 그를 무연히 바라봤다. 그 말뿐인 단어가 그녀에겐 더 상처였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그 밤, ‘사랑해.’라는 고백을 남기고 떠난 그가 향한 곳은 그녀를 사랑한다면 절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적어도 그 이유 정도는 설명해 주었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의 문제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효은은 이제 그의 그 어떤 말도 믿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우리가 한 건 사랑이 아니에요.”
눈빛을 바꾼 효은이 단호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권이도 씨.”
“장효은.”
“이젠 진짜로 날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효은은 누구보다 잔인하게 이도의 가슴을 갈라 낼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한승재인 건가?”
결국 이도는 자신의 치졸한 밑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남자. 어쩌면 그 남자는 이제 기다리기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효은에게 고백했을 수도 있었다. 불안감이 그를 사탕 뺏긴 여섯 살 아이로 만들었다.
“내가 누굴 만나든 상관하지 말아요.”
효은이 수첩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할게요. 저도 사생활이 있으니까, 그만 돌아가 주세요.”
이럴 줄 몰랐던가. 이도는 효은의 거절이 더 큰 상처로 다가오진 않았다. 여기서 억지를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의 잘못을 알았기에, 이 한 번으로 풀릴 이야기가 아니란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눈앞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다음 상담은 제가 정해서 연락드릴게요.”
효은은 사무적으로 이도를 바라봤다.
“…….”
“그리고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거, 기분 좋지 않아요.”
이도를 문 앞에 세워 두고 효은이 한 번 더 일렀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도가 한 발 다가가면 그녀는 몸서리치듯 뒤로 물러섰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달라는 눈빛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이도는 흐리게 웃어 버리곤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도가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신발을 신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밖에서 누군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도가 효은을 돌아봤다. 누군가 올 사람이 있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도리어 효은이 더 당황한 얼굴이었다.
효은은 섬뜩함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중개사에게 이전 번호를 넘겨받고 바로 그녀만 알 수 있는 것으로 바꿨다. 요즘 들어 한국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신종 도둑인 걸까. 점찍어 두는 것처럼 혼자 사는 여자들의 뒤를 �i아 닳은 지문 자국을 확인해 놓고 다음 날 문을 연다는 무시무시한 범죄. 효은의 심장이 튀어 나갈 듯이 두근거렸다.
“비밀번호 아는 사람 있어?”
이도가 급하게 물었다.
“아, 아니요.”
긴장한 효은의 말끝이 떨렸다.
“들어가 있어.”
범죄라 추측한 것은 이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효은을 뒤로 보낸 뒤 중문을 닫고서 단단해 보이는 장우산 하나를 집어 들었다.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렌즈로 밖을 내다보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는 이어졌다.
띠리릭. 마침내 정확하게 번호가 맞아 들어가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효은은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참았다. 그러다 혹시나 이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무서운 걱정이 엄습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중문을 여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