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장. 눈물의 도발
효은은 식사를 마치고 승재와 레스토랑을 빠져나가던 길이었다.
“아…… 안녕하셨어요.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네. 그랬는데, 보시다시피 혼밥 해야 할 상황이네요.”
“아, 저런…….”
효은은 위로 차원에서 흐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름도 기억을 못 하네요.”
“아, 장효은입니다.”
효은은 얼른 지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뜨끈하게 만들어 처음으로 내밀어 보는 그녀의 이름이 정직하게 박힌 자랑스러운 명함이었다.
“잘됐네요. 만난 김에 다음 회의 일정 좀 잡을까요? 저희 상무님이 이번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으신 편이라. 마무리 보고서는 다음 주 중에 보내 드릴 것 같습니다. 지금 주신 명함에 적힌 메일로 보내 드리면 되겠죠?”
“아, 네. 그렇게 해 주시면 제가 박사님과 일정 잡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일 얘기만 한 것 같아 태수는 얼른 효은의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고 덕담을 덧붙였다.
“그럼, 효은 씨라도 즐겁게 데이트하세요.”
데이트란 말에 효은도, 그 옆의 남자도 잠깐 어색하게 얼굴을 붉혔다. 시작하는 연인인가. 태수는 좋을 때라 생각하며 레스토랑을 벗어나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혹시나 미안함을 느낀 민아에게서 연락이 온 건가 싶어 얼른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네. 상무님.”
원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태수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심리 센터 설립 보고서 언제쯤 완성된다고 했죠?
지독한 워커홀릭이 한동안 좀 잠잠하다 했는데, 다시 그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권 상무는 최근 들어 노인 심리 센터 일에 열을 올랐다. 그가 중요하게 준비해 온 프로젝트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관여할 줄은 몰랐다. 특히나 센터의 최 박사를 만나고 온 날부터는 그 관심이 더 심해졌다.
“월요일 오전에 마무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주말을 반납하겠다는 선전 포고였다.
― 박 팀장, 싱글입니까?
“네?”
― 데이트 없습니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이 금요일 저녁에 전화를 걸어 와 업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더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태수는 이도를 존경하긴 했지만 좋아할 순 없었다.
“일은 일이죠. 그리고 방금 최 박사님 비서분 만나서 다음 주 중에 만남 일정 조율하기로 약속해 둔 상태입니다.”
태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자 상대편에선 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졌나 확인을 하려는데 뒤늦게 이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를…… 만났다고요?
“장효은 씨라고, 최 박사님 비서분이요. 실무 담당해 주실 분이라서. 이야기는 잘 끝냈습니다.”
― 따로 약속 잡고 만난 겁니까?
다짜고짜 물음이 날아왔다.
“네?”
― 최 박사 비서 말입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만났습니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태수는 자신의 보스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의심할 부분은 없었다.
“상무님……?”
― 알겠습니다. 쉬어요.
전화는 곧장 끊어졌다. 눈치 빠른 태수는 잠깐 머리를 굴렸다. 마지막 통화 내용을 유추했을 때 지금 권 상무가 꽂힌 포인트는 최 박사의 비서였다. 얼마 전 상무가 직접 실무진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했으니 분명 그녀도 만났을 것이다. 그때 혹시 다른 쪽으로 관심이 생긴 걸까. 그가 느끼기에도 효은은 어리지만 당차고 매력적인 포인트가 많은 여자였다.
그렇다고 한들 권 상무는 현재 기혼인 상태였다. 전해 듣기로 어린 와이프와 별거 중이며 최근엔 이혼 서류를 정리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경력직으로 선흥에 입사한 태수는 그 여인이 어떤 인물인지 가십으로만 전해 들었다. 젊은 상무의 어린 신부는 보호 차원인지 대외적으로 얼굴을 오픈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불리한 것은 상무가 아니라 여자일 테니까.
그의 사생활이야 자신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지만 아직 서류 정류도 완전히 끝내지 않고 다른 여인에게 이렇듯 사심을 드러내는 건 평소 권 상무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아 보였다. 뭐, 남자라는 동물이 다 똑같다는 건 그도 동의하는 바이다. 특히나 이도의 위치에서 여자 문제가 깨끗하다면 그것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태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는 게 우습다고 여기며 지금 자신의 문제에 집중했다.
“고객님,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총지배인의 물음에 태수는 간단히 대답했다.
“다음에 하죠.”
오늘은 비싼 혼밥 대신 주말 야근이 예약되어 버렸다.
* * *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어?”
승재의 물음이 뒤늦게 효은의 귀에 들려와 대답이 늦어졌다.
무슨 정신으로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녀석의 차에 올랐는지 모르겠다. 그의 부하 직원을 우연히 만날 수도 있었다. 그게 뭐라고. 흔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승재도 그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효은은 시간을 더 유예할 수 없었다.
“나, 그 사람이랑 일적으로 만나기로 했어.”
앞뒤 설명 없이 다짜고짜 내뱉는 통보 같은 말이었다. 승재는 잠시 효은을 보더니 싱겁게 웃어 버렸다.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너, 나 좋아한다며?”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랑 부딪치는 거 싫을 거 아니야?”
“네가 그 사람이랑 부딪치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네 마음이 아직 그 사람한테 흔들리는 게 싫은 거야. 넌 아니라고 하지만, 내 눈엔 그게 다 보이니까.”
“그렇게 다 알면서 나한테 고백은 왜 한 건데?”
“그런 너라도…… 좋아하니까.”
한승재 역시 그녀를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 녀석의 짝사랑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 옛날 그를 생각하면서 지울 수 없는 마음을 원망했듯이. 사랑은 같은 방향일 땐 가장 아름답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걸 효은도, 승재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다.
“그 사람, 만나. 피하지만 말고. 그래야 극복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상담사니?”
“원래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 거야.”
“넌……. 네 마음은 어떻게 할 건데?”
내가 그 사람한테 흔들리는 거, 지켜보고 있을 수 있냐고 물었다. 흔들리다가, 그러다가, 그 사람한테 가 버리면, 네 사랑이 너무 슬프지 않겠냐고. 효은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 승재가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인 승재가 더 걱정스러웠다.
“인생에 정해진 답이 어디 있겠어? 난 그냥…… 열심히 이 자리를 지킬 거야. 네가 그 사람 다 잊었다고 나한테 달려와서 안아 달라고 하면 축배를 마실 거고. 네가 그 사람한테 가야 할 것 같다고 보내 달라고 하면, 조인성처럼 주먹 물고 눈물 참으면서 보내 주면 되는 거고.”
“왜 공무원이 됐어? 상담사가 딱인데.”
효은이 한결 가벼운 미소를 띠며 승재를 바라봤다. 이런 말을 건네주는 것도 녀석의 배려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여서 쉽지 않을 것이고, 결국에 이뤄진다면 그것은 우정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가져다 붙일 수 있을 테다.
“선택은 네 몫이지만 최단 기간 공무원 합격자를 무시하지 마라.”
“뭐?”
“성실함과 끈기가 없으면 그거 아무나 못 해.”
효은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랑도 공부처럼 파이팅 해 보겠다는 녀석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어느새 효은의 새집 앞에 도착했다. 작은 원룸이었지만, 그 지분이 이도에게 받은 위자료가 절반 이상이었지만, 효은에게는 최선의 보금자리였다.
“갈게. 조심해서 가.”
효은이 문을 열자 승재가 따라 내리려 했다.
“너 지금 내리면, 삼자대면해야 한다?”
집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 효은이 승재를 붙잡았다. 룸미러로 뒤쪽의 인물을 확인한 승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효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가 내리고 승재는 차를 출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시선이 자꾸만 두 사람에게로 향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가 어려웠다.
“내 문자 못 봤어요?”
천천히 집 앞으로 걸어간 효은이 이도의 앞에 멈춰 섰다. 차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킨 그의 시선이 효은이 내린 차에서 그녀에게로 천천히 옮겨 왔다.
“봤어.”
“그럼, 돌아가요.”
이도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진 한 장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그를 데리고 갔던 놀이공원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효은은 웃고 있었고, 이도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왜 안 챙겨 갔어?”
상처를 헤집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이런 걸 볼모로 그녀에게 동정심이라도 얻어 보겠다는 심산인 걸까. 천하의 권이도가 이렇게 구질구질한 남자였나.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쑤시는 법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거 주려고, 이 밤에 여기까지 왔어요?”
“아니.”
이도가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의 행동이 유치해 보였다.
“진짜 이유는 박 팀장 전화.”
효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레스토랑에서 널 만났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누구랑 같이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데, 아무것도 묻지 못했거든. 그래서 비겁하게 다른 머리를 써서 여기 올 이유를 만들었어. 이 사진이 아주 적절했고.”
이렇게 뻔뻔하고 솔직하면 어쩌자는 건가 싶었다. 효은은 더 이상 도망갈 구멍이 없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누굴 만나든 아저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은 나한테 처음부터 모든 걸 숨기고 단 한 번도 진심인 적이 없었는데, 왜 나는 내 맘대로 못 해요? 그 의미 없는 결혼 서류 한 장 때문에 남편 자격이라도 운운할 생각이에요? 진짜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거 알아요?”
“알아.”
이도는 간단하게 인정했다. 효은은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냐고요!”
효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이 눈물이란 게 왜 이 남자에게만 반응하는 것인지 그녀도 알 길이 없어 억울했다.
“난 아직도…… 2년 전처럼, 네가 내 옆에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
이도는 2년 전의 그곳에서 어제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
“그거 병이에요.”
효은은 야멸차게 현실을 일러 주었다.
“그러니까 빨리 고쳐야지.”
효은은 피하던 이도를 마주 바라봤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막무가내인 그를 상대하려면 그녀 역시 평범하게 자세를 낮추어선 안 되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고쳐서 잊게 해 줄 테니까. 돈이나 넉넉하게 준비하세요.”
효은은 이제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아낄 겸 잘됐네요. 오늘 할까요? 이왕이면 상담 장소는 내 집 어때요? 내가 당신이 아는 그 옛날, 장효은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기엔 제격인 것 같은데.”
눈물을 머금은 오기 가득한 도발이었다.
“자신 있어?”
이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뭐가요?”
“내가 울 수도 있어.”
당황한 효은이 숨을 멈췄다. 이러면서 뭘 한다고. 이도가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훔쳐 냈다. 어딜 만지냐며 효은이 날카롭게 손을 쳐 내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뭐든, 효은과 있으면 그는 바보가 되어 갔다. 아주 큰 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