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장. 첫 번째 내담자
“민서 많이 울어? 여기 우유 가져왔…….”
승재는 효은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남자. 다시는 마주치지 말았으면, 숨긴 마음속에서 끝도 없이 빌게 만들었던 사람. 그가 또다시 거짓말처럼 효은의 앞에 서 있었다.
“가자.”
“어?”
효은은 서둘러 민서를 유모차에 태우고 승재를 재촉했다. 그녀는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투명 인간 취급 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차라리 편하게 인사를 나눴다면 이리도 마음이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효은은 2년이란 시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꼭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립고 그리워 홀로 밤을 지새우며 아파했던 사람처럼, 그래서 그런 효은을 바라보는 승재의 마음까지 뒤흔들리게 만들고 말았다.
“효은아.”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칼도 쓰고 하는 거. 그런 거.”
효은이 승재의 말을 막았다.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과거들이 툭, 하고 하나를 건드리면 우르르,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처럼, 악착같이 버텨 내려는 것만 같았다. 승재는 더 이상 그녀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여기, 좋다. 아기들 자리까지 챙겨 주고.”
아웃렛 근처 고급 레스토랑은 마치 정해진 코스인 것처럼 아이를 데려온 젊은 부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단란한 가족 속에 승재와 효은도 민서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착한 민서는 칭얼거림 없이 잘 놀아 주었고, 두 사람의 식사는 평화롭게 이어졌다.
효은은 평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유학 시절의 에피소드를 꺼내 놓았다. 절반이 제인과 함께한 일들이었지만 그녀가 마냥 아팠던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승재는 마음이 놓였다.
내가 갈게. 내가 네 옆으로 갈게. 그 말을 수십 번이고 연습했었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더 아파. 너 왜 그렇게 미련해. 우린 왜 이렇게 미련하게 사는 거야. 너 말고 나, 나 말이야.
어쩌다 효은과 전화가 연결될 때면 승재는 연습한 말은 한 마디도 내놓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들로 아까운 시간을 멍청하게 흘려보냈다. 한국에 있을 땐 절대 금지하던 그의 군대 얘기를 들으면서도 효은은 ‘한국말이 좋다, 참 좋다, 아무 말이라도 좋다’ 그렇게 말해 주어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 버렸다.
“나, 이혼할 거야.”
효은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처럼 불쑥 다른 소리를 했다. 하지만 앞의 에피소드를 이어서 말하는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 말이 전혀 심각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처럼 단순해 보였다. 그것을 노렸다는 것처럼 그녀가 웃었다.
“서류도 보냈어.”
“이혼한 줄 알았어.”
승재도 심각하지 않게 말을 받았다. 정말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뭐,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지. 그래도…… 제대로 하려고. 깔끔하게. 정말, 바이 바이.”
“근데 왜 도망쳤어?”
그의 질문이 비수처럼 효은의 가슴에 와 박혔다.
“……그러게. 도장 찍어서 가져왔을 수도 있는데. 그 사람, 바쁜 사람이니까 우연히 만났을 때 주려고 가방에 가지고 다녔을 수도 있는데.”
“바보냐?”
“그런 거 같아.”
효은이 곧장 수긍했다.
“다음에 우연히 만나면 꼭 서류 달라고 해.”
승재가 더 바보같이 말했다.
“그래. 그럴게.”
“그리고 다른 멋진 남자도 좀 만나고.”
“그래. 그…… 뭐?”
“나는 어때?”
“…….”
효은은 황당해 웃어 버렸다. 하지만 승재는 웃지 않았다.
이어지는 녀석의 진지한 눈빛에 효은도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
* * *
아침부터 바빴다. 최 박사의 스케줄은 일정한 루틴으로 이뤄지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몰아칠 때가 많았다. 그나마 그녀가 방송 촬영이라도 들어가야 숨을 돌릴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며칠째 윤선은 상담 센터 밖을 나서지 않고 효은에게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요청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니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했다. 화장실에 갈 신호조차 미뤄 두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아주 바쁘게 흘러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도록. 차라리 잘된 것만 같았다. 우연히 만난 한 남자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믿었던 한승재마저 그녀에게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
‘나 너 좋아해. 여자로. 오래됐어. 그렇게 돼 버렸어.’
효은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한 적은 없었다. 그 옛날, 서민아라는 여자가 그녀에게 경고하듯 두 남자를 다 가질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혼란스러운 거 알아. 그래도 고민은 해 줘. 그건 가능하잖아.’
고민하면. 그러고 나면. 효은은 승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정말 이건 그녀의 욕심인 걸까. 그녀도 모르는 사이, 녀석이 마음을 품도록 만들어 놓고 고통스럽게 모른 척한 것일까. 책임을 따지기 전에 그녀의 감정부터 되돌아봐야 했다.
“효은 씨?”
“네?”
윤선이 어느새 그녀의 책상 앞에 다가와 있었다.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어요? 혹시, 일이 많아서 그만둘 생각 하는 건 아니죠? 나 효은 씨 못 놔줘요. 이미 마음에 쏙 들어 버려서.”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잠깐, 점심 뭐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효은은 얼른 변명을 가져와 붙였다.
“그럼, 나랑 먹을 생각도 있어요? 불편한 자리가 생겼는데 지원군이 필요해서요.”
최 박사는 다른 직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곤거렸다.
“네. 얼마든지요.”
효은이 흔쾌히 웃으며 답했다.
“그럼, 10분 뒤에 지하 주차장에서 봐요.”
고개를 끄덕인 후 효은은 얼른 나머지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먼저 와 계셨네요.”
안내받은 한정식 음식점 안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효은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또 그런 우연이 있을까. 아니,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적극적인 요구에 의한 만남인 걸까.
“처음 뵙겠습니다. 권이도라고 합니다.”
방 안에는 당연한 것처럼 이도가 앉아 있었다.
윤선은 걸어가 이도가 내민 악수를 받았다.
“듣던 대로 멋진 분이시네요.”
“누가…… 제 이야기를 하던가요?”
이도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효은을 바라봤다. 너무 자연스러워 오히려 화가 날 정도였다. 도망쳤던 그녀가 억울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래.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박 팀장님이 상무님을 아주 많이 존경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이번 달 보너스가 만족스러웠나 봅니다.”
이도는 윤선이 건네는 말들을 부드럽고 유머 있게 받아넘겼다. 회사 일을 할 땐 이런 모습이구나. 효은은 그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면 2년 동안 그가 변했을 수도 있었다.
아웃렛에선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그의 얼굴은 좀 더 성숙하게 변해 있었다. 효은이 늘 안타깝게 쓸어 내던 미간이 더 날렵하게 미끄러져 내려와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깊은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아, 여기는 센터에서 같이 일하는 장효은 씨예요. 같이 자리해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노인 심리 센터 사업 쪽 실무 일을 맡을 예정이라서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도는 윤선에게 했던 것처럼 효은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효은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았다. 공은 공으로 받아들이면 그뿐이었다. 멋진 커리어 우먼처럼 산뜻한 표정까지 지었다. 가진 모든 힘을 쏟아 내 힘껏 입꼬리를 올리는데 이도가 그녀만 아는 얼굴로 웃었다. 기 싸움에서 진 것처럼 가슴이 시큰거리고 말았다.
식사가 차려지고, 사업 이야기는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효은은 귀에 들리는 대로 수첩에 받아 적었지만 제 정신일 리가 없으니 의미도 없었다. 이도는 노인 심리 센터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확실하게 설명했고, 그 가치점이 최 박사와도 맞닿아 자리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이도는 최 박사가 선흥에서 원하는 목표를 해내 주기만 한다면 보상은 예상한 것보다 클 것이란 당근을 내밀다가도, 그 과정에서 신뢰를 잃는 행동을 하나라도 저지른다면 계약은 가차 없이 파기되고 그 책임은 최 박사 쪽에서 모두 지게 될 것이란 오싹한 채찍을 휘두르기도 했다.
윤선은 오히려 이도의 마인드를 반겼다. 어쭙잖고 썩어 빠진 기업의 방식을 당연한 것처럼 밀어붙이지만 않는다면 그녀도 무서울 건 없었다. 도전은 늘 실패라는 위험 부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큼 열매는 달았다.
“그럼, 프로젝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요?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윤선이 자리를 정리하듯 서류를 정리하자 이도는 다른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혹시, 센터에서 부부 상담도 가능합니까?”
이도의 갑작스런 질문에 윤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센터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확인 절차일 것이란 추측도 들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 젊은 상무는 그저 허수아비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분이 받으시는 건가요?”
“저니까 여쭙겠죠?”
이도는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
윤선은 수많은 기업인들의 심리 상담을 비밀리에 진행한 적이 많았다. 그들은 늘 꼭대기 자리를 지켜야 했기에 그만큼 심리적으로 힘든 상태였다. 그것을 감추고 숨기기 위해서 더 병을 키웠고 도피처를 찾다가 도박이나 마약에 빠져 결국엔 가진 것을 송두리째 잃기도 했다.
그런데 이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분명 ‘부부 상담’이었다. 이 젊은 상무님이 결혼했다는 전언은 없었다. 일전에 만난 박 팀장은 그가 많은 여자들의 이상형으로 꼽히는 싱글이란 뉘앙스를 풍겼었다.
“결혼하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제 상담 스케줄이 당장은 힘들 것 같아요. 요즘은 방송이나 사업 쪽으로 관심을 쏟다 보니까. 혹시나 괜찮으시면 다른 상담사를 소개해 드려도 될까요?”
윤선은 이도가 당연히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최고들은 꼭 그 세계의 최고를 찾았고, 최고가 아니면 믿지 않았다.
솔직히 속내로는 그녀 쪽에서 거절 의사를 보이고 싶었다. 기업가들의 부부 상담은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슈화가 되면 센터의 이미지에 좋을 리 없었고, 지금은 그런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아니었다.
“꼭 박사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도의 시선이 효은에게 향했다. 윤선도 그 눈길을 좇아 효은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수련의에게 상담을 받겠다는 것인가.
그러자 다른 생각이 불쑥 찾아들었다. 눈빛은 속일 수가 없었다.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이도의 눈동자는 한 번씩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효은에게로 향했다. 아는 사이인 걸까. 아니면, 뜻하지 않게 이상형이라도 만난 걸까.
“이쪽, 효은 씨는 아직 수련 중이라……. 얼마 전에 유학을 다녀왔거든요. 상무님께 맞는 상담사를 찾아볼게요.”
윤선은 나서서 이도의 관심을 끊어 냈다. 사생활이야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호적 정리도 하지 않은 직원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를 붙일 수는 없었다. 한 재벌가의 젊은 상무가 상담사와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부부 상담을 실패했다는 이력보다 더 큰 흠집이 센터에 남을 것이다.
“제가 첫 번째 내담자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상담사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도는 윤선이 아닌 효은에게 답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