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어쩔 수 없는 마음
“박태수 팀장입니다.”
두 사람에게 깍듯이 인사한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아…… 팀장님이 오셨군요. 전, 상무님이 오실 거라고 연락을 받았거든요.”
윤선은 자신의 의견이 묵살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방식대로 차분하게 설명을 요구했다. 박태수 팀장이 미안한 얼굴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윤선에게 사과를 전했다.
“상무님이 오시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셨습니다. 일부러 절 보낸 건 아니시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약속을 어기게 되어서 죄송하단 말씀,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런 사정이라면……. 죄송해요. 혹시, 많이 다치신 건 아니시죠?”
“전달받기로는,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도 이제 좀 앉을까요?”
박 팀장은 꼭 벌을 서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윤선은 얼른 미안함을 표시하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박 팀장이 착석하자 곧 종업원이 들어왔고, 주문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박 팀장의 시선이 윤선의 옆자리로 향했다.
“이분은……?”
그때까지도 효은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져 인사조차 잊고 있었다. 윤선은 그녀가 낯을 가리는 건가 생각하며 얼른 박 팀장에게 소개했다.
“제 일 봐주는 비서예요. 미래에 아주 큰 역할을 할 상담사이기도 하고요.”
“아, 그러시군요. 미리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태수가 밝게 웃으며 효은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받아 주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효은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박 팀장을 보고 있지 않았다. 윤선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효은을 바라봤다.
꼭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멍했다. 그럴 만한 이유를 추측하려 해도 상황은 별다를 게 없었다. 만약 앞에 앉은 박태수라는 남자가 원인이라면 그와 그녀가 아는 사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자신이 봤을 때 박태수 팀장은 효은을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효은 씨?”
“……네?”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효은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윤선을 바라봤다.
“아,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좀 한다고……. 죄송해요.”
“다행이네요. 혹시 상무님이 아니라 제가 와서 서운하신 건가 했습니다.”
분위기를 풀려는 태수의 농담에 효은은 얼른 그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우리 비서님은 더 젊고 센스 있으신 박 팀장님 쪽을 좋아할 것 같은데요?”
윤선은 그가 기분 나쁘지 않게 얼른 농담을 받아 주었다.
“아,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최 박사님, 아직 저희 상무님 얼굴을 보신 적이 없으시군요.”
“왜요? 설마, 박 팀장님보다 더 멋진 분이세요?”
특별히 상무의 얼굴까지 검색해 볼 필요는 없었다. 윤선은 당연히 나이 많고,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는, 흔해 빠진 기업인들 중 한 사람일 것이라 추측했다. 한국 사회는 그런 사람이 기업을 이끌어 나가야 성공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저는 비교 대상이 안 됩니다. 나이, 외모, 능력 모두 갖추신 분이죠. 차세대 리더 후보로 기업 잡지에도 많이 소개되셨었는데, 제가 한 권 들고 올 걸 그랬습니다.”
박 팀장은 선 굵고 차가운 외모와 다르게 아부를 잘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젊은 나이에 팀장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의 노하우가 있었을 것이다. 윤선은 자신의 상사를 PR 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담당자를 보자 조금 우습기도 했다. 상무가 아무래도 선흥의 실세가 확실한 듯 보였다. 어쩌면 오너가의 핏줄이거나. 너무 뻔한 시나리오에 흥미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요? 다음에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그럼, 우리 이제 일 얘기를 해 볼까요?”
“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박 팀장은 얼른 윤선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고 긴장의 끈을 조였다.
두 사람이 사업 설명서를 차근차근 짚어 가는 동안에도 효은은 다른 생각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 * *
“3일은 계셔야 합니다.”
재영의 말에 이도는 웃음을 흘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병동 VIP실은 그의 집무실과 크기가 비슷했다. 이곳이 병원이라는 걸 알게 해 주는 건 그가 입고 있는 병원복과 팔에 꽂힌 링거 바늘뿐이었다.
호화로운 액세서리를 차고 있는 것처럼 이도는 마음이 불편했다. 언제부턴가 그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부들이 가슴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처럼 다가왔다. 정말 벌이 맞았다. 효은은 그가 어느 부분에서 가장 고통받는지 똑똑하게 찾아냈다. 그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까지도.
“차가 흔들리지도 않았어. 오버하지 마.”
사고는 어이없는 순간에 일어났다. 지방 공장을 둘러보고 올라오던 길에 점심을 거른 이도가 걱정된 재영이 차 안에서 간단히 먹을 음식을 사러 나간 참이었다. 어느 누가 갓길에 주차된 차로 달려와 부딪칠 줄 알았겠는가. 그것도 어마무시한 수리비를 지불해야 하는 외제 차를.
가해자는 살짝 술 냄새를 풍기는 젊은 대학생이었다. 재영은 뒷일을 처리함과 동시에 이도를 곧장 병원에 입원시켜 버렸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참에 건강 검진을 제대로 받아 보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한편으론 조금 다른 환경에서 이도가 생각을 전환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사람이 아프면 절박해지고, 소중한 것이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저 잘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시면 제 말 들으십시오.”
“누가 선배를 잘라? 잘라도 내가 잘라.”
“자를 생각은 있으신 거 같습니다?”
“그런 짓을 계속하고 있네.”
이도는 얼른 이 공간에서 벗어나게 만들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재영은 능구렁이처럼 이도의 눈길을 피하며 탁자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일하지 마십시오.”
“…….”
이도는 대답 없이 창가로 시선을 주었다. 이 자리, 이 공간에 누워 있던 한 여자가 떠올랐다. 그의 눈조차 바라봐 주지 않았던 야속한 사람. 그의 시간은 자꾸만 미래가 아닌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 * *
“……아웃렛?”
“그래.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뭐 해?”
주말이었지만 효은은 승재의 집으로 출근을 해야 했다. 우는 민서를 재우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해 오니 그녀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졸지에 두 사람은 젊은 부모가 되어 주말 시간을 민서와 함께 보내야만 했다.
“차라리 나가면 시간이 더 잘 갈 거야.”
아이디어를 낸 건 효은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땐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라고 배웠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남자를 생각하느라 며칠을 넋이 나간 채로 살았다. 2년의 노력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쿨하게 이혼 서류에 합의하고 법원을 걸어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존재는 이제 그녀에게 지나가는 과거일 뿐이라고. 다짐은 쉬었다. 하지만 현실은 미련했고, 그녀를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래. 집에 있는 것보다 낫겠지. 가자. 가 보자.”
승재는 효은과 함께 민서의 준비물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냥…… 집이 더 나았겠는데?”
시장통도 이러진 않을 것이다. 요즘은 시장이 더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아웃렛으로 튀어 들어온 것처럼 공간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대부분 유모차를 한 대씩 끌고 다니는 젊은 부부였다.
이렇게 세대의 문화는 변해 갔고, 돈을 버는 구조도 달라졌다. 윤선이 노인 심리 센터에 사활을 거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였다. 흐름을 파악하고, 남들보다 한발 앞서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지지 않기 위해 넥타이를 조여 맨다는 한 남자가 떠올랐다. 모든 게 연상 작용이었다. 효은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유모차를 쉼터 끝에 세웠다.
조심히 민서를 바라보자 아이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효은은 잠든 아기는 천사라는 말을 지금 이 순간 절감하는 중이었다. 칭얼대며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한번 웃어 주거나, 조용히 잠든 모습을 볼 때면 육아의 피로가 단번에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도 이런 마음으로 그녀를 키웠을까. 지금의 승재처럼 어설픈 남자의 손으로, 그러나 효은이 주는 잠깐의 행복을 위로 삼아,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은 것일까. 물음은 질문이 되어 나가지 못했다. 그는 지금 그녀의 곁에 없으니까.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그 남자의 아이를. 만약 그랬다면 지금 그녀의 삶은 달라졌을까. 효은은 확실한 답을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심은 달랐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붙잡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멍청한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민서 잠들었어.”
“그러네. ……이제 천사 같다.”
승재도 효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든 민서를 감상했다.
“형이 그러더라고. 이 모습 때문에 어디를 못 보내겠다고. 이렇게 예쁘게 잠드는 천사를 보내면 벌받을 거라고. 이제 사업도 잘되고 성공했는데 망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걸 왜 민서 일에 갖다 붙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보내기 싫은 거겠지. 그래서 이것저것 핑계를 대는 거야. 인생엔 답이 정해진 일들이 있다고 하더라고. 어쩔 수 없는 마음, 같은 거. 기수 오빠한테는 민서가 그런 거겠지.”
어쩔 수 없는 마음. 승재는 효은의 말을 곱씹었다. 그도 그런 마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 감정의 방향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쪽으로 끌어와야 할까.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갖은 핑계를 갖다 대면서 지키려 했던 그 마음을 그도 이제는 욕심부려 보고 싶었다.
“효은아.”
“아, 기저귀는?”
효은이 승재의 말을 덮으며 물었다.
“네 가방 안에 넣었어.”
“우유도?”
승재는 아차, 싶었다.
“아, 그건 차에 두고 왔다.”
“으앙!”
두 사람의 소곤거림이 컸던지 민서가 잠에서 깨 버렸다. 승재는 우유를 가지고 오겠다며 곧장 주차장 쪽으로 뛰어갔다. 효은은 얼른 민서를 안아 들고 몸을 흔들어 달랬다. 그러면서 아기가 울음을 그칠 만한 장소를 보여 주려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상무님. 발표 10분 전입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