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장. 제가 좀 늦었습니다
첫 출근이었다. 승재의 모닝콜 덕분에 제 시간보다 앞서 지하철에 올랐다. 넉넉하게 잡아도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순조로웠다. 이렇게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에너지를 얻었다. 스물여섯. 남들처럼 이리 흘러가는 것이 맞았다.
“아가씨, 내가 좀 들어 줄게요.”
혹시 몰라 전공 서적을 챙겨 나온 효은은 한 손 가득 짐 가방을 들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해도 어르신은 손녀가 생각나는지 기어코 짐을 가져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목에 두른 스카프와 단정한 차림을 보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꼭 가야겠지……. 그래야겠지요?’
되묻던 물음이 아직도 가슴에 남았다. 효은이 그 집안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남편이었던 이도보다도 그녀에게 더 마음을 내주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혹시……, 혹시라도, 별장에서, 바보같이 그러고 있으면, 좀…… 챙겨 주세요.’
부탁은 단 하나였다. 그런 남자였으니까. 미워할 수도 없었으니까. 나쁜 사람으로 남아 달라고 말했지만 정말 그게 가능할까.
그녀는 유학 생활 내내 생각했다. 첫사랑이었고, 가짜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남편이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의 감정으로 남겨진다는 걸 심리학을 공부하는 내내 배웠다. 이도가 그녀의 인생에 큰 의미였다는 걸 무시할 순 없었다.
“난 이제 내리니까, 여기 앉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어르신이 효은을 끌어와 앉혔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게 된 그녀는 생각을 비우기 위해 손가방에 담아 온 전공 책 한 권을 꺼내려 했다.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딸려 온 서류 하나가 동작을 멈추게 만들었다.
2년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녀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뺏기지 않을 시간. 그들이 자연스럽게 헤어져도 의심받지 않을 시간. 효은은 이제 그를 정리하게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곧장 연락이 올 줄 알았던 남자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었다. 한 번씩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습관은 그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리 같은 건 의미가 없다며 무시하고 있는 걸까. 혹시나 바보같이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럴 남자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2년 동안 그녀를 찾지 않았던 남자였다. 딱 그녀가 부탁한 그대로. 나쁜 남자로 남아 있어 달라는 말만 들어주는 멍청한 사람. 효은은 정리도 그녀의 손으로 끝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지난 과거는 모두 잊는 게 맞았다.
* * *
비서의 일이란 기다림의 연속인 걸까. 종편 토크쇼에 패널로 초대된 최 박사가 촬영에 들어간 이후부터 효은은 그저 그녀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잠깐씩 휴식을 위해 촬영이 중단되면 그녀의 앞에 물을 내밀고 상담 센터로 연락할 스케줄을 전달하는 게 오늘 그녀의 임무였다.
“나한테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효은 씨 개인 공부를 해도 좋아요.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윤선은 좋은 멘토였다. 자신의 위치를 무기로 아랫사람을 함부로 휘두르는 오너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효은은 자신이 운이 좋은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긍정적인 생각. 그것이 행동과 미래를 바꾼다고 상담가들은 수없이 내담자들을 설득했다.
그녀 또한 자신에게 실천해 보았다. 태어난 처음으로 돌아가 마음을 먹었다. 부모가 없는 건 죄가 아니다. 할아버지를 그렇게 떠나보낸 건 너의 탓이 아니다. 그 남자를 사랑했던 건, 네 인생에서…….
“거기 핸드폰 소리 뭡니까?”
생각에 빠져 있던 효은은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적당할 일을 저지른 사람은 그녀였다.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진동으로 돌리고 세트장을 빠져나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승재였다. 바빠 죽는 말단 공무원이라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할 일이 전화밖에 없는 사람처럼 녀석은 수시로 그녀를 찾았다.
“왜?”
― 그냥. 일 잘하나 해서.
이유도 없었다. 효은은 허무하다 못해 웃음이 났다. 외로워서 이러는 건가. 또 나름의 직업병이라고 녀석의 행동을 해석하려 들었다.
“오늘 첫 출근 했거든.”
― 원래 첫날이 젤 중요한 거야.
“네 걱정이나 하시지? 툭하면 반차 쓰는 신입이 미운 털 박힌 건 당연할 테고. 너 혹시…… 왕따당해? 친구 없어서 시간 채우는 느낌이 나는데? 이 누나한테 다 말해 봐. 내가 상담료는 친구 디씨로 싸게 받을게.”
― 뭐라는 거야? 너희 박사님 첫날부터 영업까지 시켜? 내가 노동청에 동기가 있는데, 신고……
“바빠. 끊는다.”
이 녀석이 2년 동안 말재주만 늘었는지 이길 수가 없었다. 효은은 더 이상 농담으로 지체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다.
― 잠깐! 저, 저녁 먹자.
승재가 급하게 말했다.
“무슨 저녁?”
― 마, 맛있는 거. 칼도 쓰고 하는 거. 어제 제대로 못 먹었잖아.
어울리지 않게 녀석이 쭈뼛거렸다.
“민서는 어쩌고?”
― 오늘 형 휴무. 아무튼 저녁 시간 비워 놔. 회사 앞으로 갈게.
“야, 한승…….”
녀석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효은은 굳이 태우러 올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다가 편한 길을 놔두고 돌아갈 이유는 없단 생각을 했다.
“효은 씨, 여기 있었네요.”
“아, 끝나셨어요?”
촬영이 모두 종료됐는지 패널들과 스태프들이 우르르 세트장 밖으로 흘러나왔다. 효은은 얼른 비서 모드로 전환하며 가지고 있던 최 박사의 가방과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부재중 통화를 확인한 최 박사는 몇 통의 전화를 이어 가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효은은 그녀를 뒤따르며 재빠르게 운전대를 잡았다.
“저녁 약속이 하나 잡혔는데, 태워 줄 수 있겠어요? 도착하면 퇴근 시간이 지날 것 같아서요.”
“아, 괜찮습니다.”
효은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얼른 그녀가 알려 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승재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낼 생각이었다.
* * *
약속 장소는 도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전통 한식집이었다. 예쁘게 꾸며진 돌담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효은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최 박사에게 차 키를 내밀었다.
“약속 없으면 효은 씨도 같이 저녁 할래요?”
“네? 저도요……?”
오늘 미팅에 관한 서류를 모두 훑은 윤선이 간단한 일처럼 제안했다.
“여기서 뭘 태워 보내기도 그래서요. 이렇게 먼 곳에 장소를 잡았을 줄은 몰랐어요. 사업하는 양반들이야 이런 곳에서 만나는 일이 흔하겠지만, 난 그냥 시내에 있는 조용한 찻집에서 만났으면 했는데, 내 의견이 잘못 전달된 것 같네요.”
사업 미팅이라면 그녀도 도와야 할 일이었다. 효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윤선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승재와의 저녁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날이 많았다. 얼른 녀석에게 약속을 미루자는 문자를 보냈다.
“우리가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먼저 들어가 있을까요?”
“네.”
효은은 윤선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선흥이라고 알아요?”
찻잔을 들던 효은이 그대로 멈췄다. 가방 안에서 사업 설명서 파일을 꺼내던 최 박사는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의료 시니어 사업 쪽으로 유명한 회산데. 오늘 그쪽 담당자랑 만나기로 했어요.”
“……네?”
효은이 너무 놀란 표정을 짓자 최 박사는 다른 쪽으로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
“내가 너무 사업 쪽으로 치중하는 것 같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해해요. 요즘 센터 식구들도 불만이 많아요.”
최 박사는 어쩔 수 없이 나름의 변명을 시작했다.
“없는 시간 쪼개서 티브이에 얼굴 알리고, 센터 광고 키우고, 그게 다 사업 하나 제대로 차려서 장사하려는 속셈이라더군요. 뭐, 맞는 말이긴 해요. 난 심리 상담이 틀 안에 갇혀서 병으로만 인식되길 원하진 않아요. 대중화가 되기 위해선 사업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또 거기서 수익을 얻는다면 당연히 감사한 것이고요. 효은 씨 생각은 어때요?”
효은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현장에서 뛰어 본 경험도 부족했고, 개인의 야망과 사회적 활동을 구분하는 건 온전히 본인에게 솔직할 때 가질 수 있는 양심일 뿐이란 생각도 들었다.
“제가 조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거, 박사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들어 드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언젠가 저희 지도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그러시더라고요. 상담사들은 수많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만 정작 그 상담사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된다고요. 누구에게든 털어놓는 연습을 하라고 하셨어요. 잘 말할 수 있어야 잘 들어 주잖아요.”
최 박사는 효은의 말에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꾸 효은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유, 이제야 알겠네요.”
“네……?”
“내가 인복이 많다고요.”
효은은 뒤늦게 최 박사의 말을 이해했다.
“아니에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내 비밀 상담사님.”
두 사람이 웃음을 나누는 사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왔나 보네요. 내가 그쪽 상무님을 보고 싶다고 좀 세게 나갔거든요. 혹시나 권력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면 효은 씨가 정신 차리게 해 줘요. 알았죠?”
윤선이 찡긋, 눈짓을 보내는데 효은은 심장이 멈춘 것처럼 숨 쉬는 게 어려워졌다. 설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선흥이라도 이렇게 만나게 된다고? 그건 너무 운명의 장난 같았다. 이런 재회를 원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만으로 아직까지 반응하는 심장이라니. 효은은 갑자기 혼란스런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