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합의 이혼 신청서
수입산 소고기 팩을 들려던 효은은 마음을 크게 먹고 한우를 집었다. 할아버지와 살던 집을 정리해 생긴 돈과 그녀가 물려받은 유산을 통장 하나로 만들어 놓은 후 단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았다.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지출한 비용은 모두 이도가 미리 건넨 위자료로 해결했다. 그는 결혼을 유예해야만 주식을 받을 수 있었고, 효은은 그에 대한 대가라면 받겠다고 했다. 아직까지 그들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서류상의 기록일 뿐이라 생각했다.
효은은 얼른 취업을 해, 그녀가 당당히 번 돈으로 위자료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도가 가져간 주식을 양도받아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태호가 남긴 모든 재산을 그의 이름으로 기부할 것이다. 그래야 그녀를 따라다니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뒤가 꽉 막히고, 고집이 센 장효은은 결국 한우 소고기 팩을 내려놓고 다시 수입산을 잡았다. 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다는 건 제인이 말해 준 진리였다.
― 리얼리? 정말? 진짜 취업한 거야?
갑자기 전화를 끊어 버린 게 미안해 효은은 먼저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차가 맞지 않아 아직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제인은 효은의 취업 소식을 재차 확인했다.
“그래. 나도 이제 돈 번다고.”
― 진짜 대단하다, 효니. 한국에서 일자리 잡기 힘들다고 하던데. 이렇게 한 번 만에 될 수도 있다니. 넌 정말 축복받은 아이야.
제인의 좋은 점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효은은 그녀에게 더 의지했는지 모르겠다. 삶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도에게 당당히 혼자가 되겠다고 했지만 그 말처럼 우습고 철없는 소리는 없었다. 2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면서 효은이 저절로 깨닫게 된 인생의 교훈이었다.
“제인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 그래. 아임 미슈. 그럼 오늘 그 보이랑 축하 파티 하는 거야?
“응. 고기 사서 가는 중.”
― 와우. 좋은 시간 보내! 효니가 행복한 것 같아 나도 행복해.
제인에게서 넘치는 응원을 받은 효은은 두 손 가득 음식 재료를 사 들고 마트를 벗어났다. 승재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그의 집으로 가는 게 목표였다. 아직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효은은 설렘을 가득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너……?”
“연락도 안 받더니, 무슨 일이야?”
“너야말로 언제 아빠가 된 건데?”
“뭐? 아…….”
승재는 그제야 자신이 안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효은이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일단 들어와. 뭘 그렇게 사 왔어?”
“나야…… 취업해서…….”
“으앙!”
“잠깐, 효은아.”
승재가 어설픈 동작으로 우는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는지 아이의 울음소리가 격하게 올라섰다. 어쩔 수 없이 부엌에 짐을 내려놓고 효은은 승재에게로 다가갔다.
“이리 줘 봐.”
효은이 승재에게서 아이를 넘겨받았다. 능숙하게 어깨에 기대도록 만들고 등을 토닥이자 거짓말처럼 울음소리가 그쳤다. 승재는 그런 효은의 모습에 놀라 입만 벌리고 있었다.
“왜, 난 아이 잘 보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이름이 뭐야?”
“아, 민서. 한민서.”
효은은 민서를 안고 거실을 서성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공주님은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조용히 잠들었다. 승재는 효은을 보고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아무래도 요리는 무리겠다. 시끄러우니까.”
잠든 민서를 침대에 눕혀 놓은 효은이 주방으로 들어서며 승재에게 말했다.
“전화를 하지 그랬어.”
큰 손 장효은이 사 온 재료들을 보며 승재가 고개를 흔들었다.
“서프라이즈 이벤트 하려고 했지. 취업 턱으로.”
“어, 진짜? 된 거야? 진짜?”
승재가 큰 소리로 재차 묻자, 효은은 얼른 녀석의 입을 막으며 민서 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에도 승재는 눈빛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이렇게 축하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나저나, 빨리 이실직고하시지?”
이 녀석은 언제 그녀 몰래 아이를 만든 것인가. 효은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놓고 자신을 감쪽같이 속이다니. 몇 달은 잔소리를 들어야 할 소식이었다.
“조카……라고 할 수 있지.”
“어?”
승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없는 사이 한기수 씨의 인생이 아주 스펙터클하게 변한 거 같아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결혼한다는 말 없었잖아.”
“설명하자면 복잡해.”
“그럼, 아기 엄마는?”
“지금은…… 아빠랑 삼촌뿐이야.”
승재가 사연을 떠올리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가게 잘나갈 때 들어온 대학생 알바가 있었는데, 착실하고 오래 일해서 형이 아꼈어. 근데 자꾸 배가 불러서 이상하다 싶었지. 그래도 그냥 살찐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진통이 와서 가게 화장실에 쓰러져 있는 걸 형이 발견했어.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꼭 데리러 오겠다는 편지 한 장 써 두고 사라져 버렸고. 난 무슨 신파 드라마 찍는 줄 알았다.”
승재는 체념한 듯 흐리게 웃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데리고 있는 거야? 그 여자 가족은 있을 거 아니야?”
“세연이, 아, 그 알바한테 남동생이 한 명 있긴 한데, 군대 가 있고. 혼자서 장학금 받고 대학 다니면서 생활비 번 것 같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들었거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런 어린 여자가 갑작스레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으니. 얼마나 당황하고 혼란스러웠을지 효은은 같은 여자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갓난아기는 어쩐단 말인가. 정말 약속한 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효은은 저절로 한 아이가 떠올랐다.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위탁 가정에 봉사활동을 다니곤 했었다. 그곳은 단체 위탁 시설보다는 가정에서 아이를 맡아 주고 출가하도록 도와주는 환경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게 아이의 정서 발달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돌봤던 엘리는 눈동자가 하늘빛이라 자꾸만 바다가 생각나는 여자아이였다. 민서처럼 어린 엄마가 6개월만 맡아 주길 원하고 떠났지만 3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기수의 마음도 이해되었지만 효은은 어떤 것이 정답인지 섣불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자 둘이 애를 봐? 뭘 할 줄 안다고.”
“그 말 좀 우리 형한테 해 주라. 바쁘다고 민서 케어는 나한테 다 맡겨. 나도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야 아는데, 진짜 쉬운 게 아니다. 애 보는 거.”
“너, 일 갈 땐 누가 보는데?”
“어린이집 보내지.”
“저 어린 걸?”
“그럼, 어떻게 해. 난 형한테도 말했어. 절대 감정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애 엄마가 안 나타나면 형이 데리고 살 거냐고? 형 인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잘 결정하라고.”
어떤 면에서 승재는 기수보다 이성적이었다. 효은에게도 그랬다. 그녀가 울고 있으면 위로는 해 주었지만 꼭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다. 그럴 때마다 감성이 메마른 놈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승재의 이성적인 생각 덕분에 큰 결정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형이 아무래도 걔를 좋아한 거 같아.”
“뭐?”
“나한테는 아니라고는 하는데, 내가 형을 몰라? 알바할 때도 부모 없이 열심히 산다고 기특하다고 칭찬을 끝도 없이 하더니. 그럴 거면 자기가 잘 고백해서 사귀든지. 하여튼 우리 형은 한발 느려서 문제야.”
“넌 빠르고?”
효은의 기습적인 물음에 승재는 곧장 얼굴을 붉혔다. 꼭 그의 마음을 알고 묻는 질문 같았다.
“아, 난…… 당연히 스피드지. 최단 기간 공무원 시험 합격. 그거, 우리 시골 가면 아직도 붙어 있어. 네가 아직 대한민국 공시생의 치열한 경쟁률을 모르는구나?”
갑자기 승재가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효은은 그러냐며 고개를 몇 번 끄덕여 주고는 간단히 만들어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 예전보다 요리 솜씨가 많이 늘어 이젠 간단하게 해 먹는 음식은 곧잘 만들었다. 그 음식의 맛이 늘 최고라고 엄지를 세워 주는 제인은 없었지만 승재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게…… 무슨 맛이야?”
그 생각은 아주 오산이었다.
* * *
이도는 익숙한 숫자 네 자리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여자 구두가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고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주방 냉장고 쪽에 서 있던 여자가 그를 발견하고 동작을 멈췄지만 그는 익숙한 루틴처럼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여자는 도둑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거실 한가운데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이도는 냉장고 문을 열어 냉수 통을 꺼내고 식탁 위에 놓아둔 유리잔을 들어 물을 따랐다. 그리고 냉장고에 다시 물통을 집어넣는 동작에서 여자를 의식하는 것은 없었다.
“오빠.”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여자 쪽이었다.
“그냥 가.”
이도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냥…… 강 여사님이 반찬 가져다주신다기에…….”
“이제 여사님도 못 오시게 할 거야. 그 원인 제공은 네가 했고.”
“오빠.”
“……그만 좀 하자.”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이도의 눈빛이 찌를 듯이 민아에게로 향했다.
“나한테도 기회를…… 줘요.”
“무슨…… 기회?”
“오빠 이렇게 사는 거, 원한 적 없어요. 알아요, 내 잘못으로 시작됐다는 거. 내가 돌리고 싶어요. 그렇게 하게 해 줘요.”
“너……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가 참견할 자격 같은 건 없어. 이 정도로 봐주고 있는 것도 내가 너한테 무관심하기 때문이니까, 더 이상 내 눈에 띄지 마.”
이도는 거칠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새언니…… 한국 온 거 알아요?”
하. 웃음이 샜다. 이도는 돌아서 민아에게로 다가갔다.
“나가라고.”
얼음 같은 이도의 목소리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민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이도는 곧장 냉장고로 돌아가 그녀가 가져온 반찬들을 꺼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서 거실 소파에 기대앉은 이도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감정이 가라앉을 즈음 몸을 일으킨 이도는 며칠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류 봉투를 내려다봤다.
[합의 이혼 신청서]
발신인에 효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서류가 뜯기지도 앉은 채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