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장. 변함없는 온도
효은이 놀라 뒷걸음질 치자 조수석의 창문이 열리고 익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빨리 타!”
“……한승재?”
“그러고 있을 시간 없을 텐데.”
맞았다. 효은은 자초지종은 나중에 묻기로 하고, 우선 차에 올랐다. 지도 교수님이 특별히 소개해 준 중요한 면접 자리였다. 첫 취업 도전기를 시간 개념 상실로 실패했다는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승재는 이미 효은의 면접 장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넣고 있었다.
“지니는 언제나 주인님이 힘들 때 바람처럼 나타나지.”
어제저녁 통화를 할 때만 해도 그는 오늘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도 출장을 다녀온다고 했다. 잡무가 많은 신입 공무원이 이렇게 비싼 차를 샀을 리도 없었다. 효은은 그녀가 한국에 없는 사이, 승재가 로또에 크게 당첨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당첨이 되면 N분의 1을 하자고 맹세했던 스무 살의 약속은 까맣게 잊은 걸까. 효은은 섭섭함이 찾아왔다. 요즘 돈이 궁해지긴 했다.
“너…… 공무원 된 건 맞아?”
“뭐? 뭔 헛소리야?”
분명히 그의 목에는 시청의 이름이 박힌 공무원증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한국에 들어오던 날. 수교한 나라의 귀빈을 모시듯 큰 플래카드를 흔들며 웃고 있던 녀석이 떠올랐다. 반차를 쓰고 왔다며, 공무원증도 벗지 못한 채였다. 증명사진은 어디서 찍은 것인지 귀가 노랗게 나와 효은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웃은 게 이 녀석 때문이었다.
“그럼 이 과분한 차는 뭔데? 로또 아니면 횡령…….”
“장효은!”
“미안. 너랑 이 차가 너무 안 어울려서.”
“차 세운다? 걸어갈래?”
“아아. 진정하고. 너,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졌어?”
“넌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했어?”
“그렇게 살아야 하는 세상이잖아. 착해서 남는 건 없더라.”
효은은 또 그렇게 진지한 깨달음으로 승재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녀가 단단해질수록 그는 마음이 아팠다. 상처받지 않길 원했지만 효은은 결국 결혼을 끝내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그때 승재는 붙잡을 수 없었다. 뻔뻔하게도 기회를 생각했다. 놓쳤던 마음을 이제는 표현할 수 있는 걸까. 효은이 혼자인 게 그는 다행스러웠다.
“너, 원래 안 착했어.”
“그래. 알려 줘서 고맙다.”
또 그렇게 직선적인 농담으로 마무리되었다. 효은이 웃었다. 승재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이렇게 곁에 있을 수 있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녀와 떨어져 있던 그 세월 동안 그는 마음을 더 키워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 차는 누구 건데?”
“형.”
승재는 짧게 진실을 말했다.
“헐. 기수 오빠 로또 됐어?”
효은이 그 이유밖에 없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로또라고 볼 수도 있지. 갑자기 가게가 잘 풀렸어.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망한 가게 살리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형이 오버해서 울고불고한 게 동정 여론이 생겨서 방송 끝나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찾아왔거든. 요리 개발한다고 주방에서 나오질 않더니 지난달엔 분점도 냈어.”
헐. 진짜 ‘헐’이란 표정으로 효은이 승재를 바라봤다.
“왜 말 안 했어?”
“형이 말하는 거 싫어해. 주변 사람들이 자꾸 돈 빌려 달라 한다고.”
효은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기수 오빠다웠다. 그래도 그가 잘 풀렸다니 꼭 그녀의 일처럼 기뻤다. 승재와의 인연 못지않게 기수도 그녀에겐 친오빠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밝음, 철없음,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이 늘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또 놀랄 일이 하나 있는데, 그건 나중에. 너 면접 보고 나서. 다 온 거 같은데? 여기 아닌가?”
승재가 갓길에 차를 주차하자 효은은 얼른 밖을 내다보았다. 건물의 간판을 확인한 뒤 곧장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다 문을 열고 선 채 뒷말을 덧붙였다.
“오늘 성공하면 소고기. 콜?”
“허세는. 잘 보기나 해.”
“알았어. 끝나고 전화할게.”
돌아서 건물로 향하던 효은은 갑자기 뒤늦은 물음이 떠올랐다. 오늘도 반차를 쓴 건가. 업무 시간에 나타난 승재의 뒷사정을 묻지 못했다. 그것보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효은은 가방을 움켜쥐고 뛰기 시작했다.
“편하게 앉아요.”
면접관으로 나타난 최윤선 박사는 몇 번인가 찾아본 티브이 화면에서보다 더 젊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국내 최고의 부부 심리 연구가로 임상 심리 상담 쪽에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방송 효과가 아니어도 실무적으로 뛰어난 능력자라는 건 그녀가 남긴 업적이 증명해 주었다. 요즘은 노인 심리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가는 중이라 현재 여러 곳에 분점을 세워 운영하고 있는 심리 센터에 대한 투자를 높이고 있다는 소식까지 기사로 서치하고 온 길이었다.
“신 교수한테 얘기는 들었어요. 영국에서 석사까지 마쳤다고.”
“네. 얼마 전에 과정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학부 시절, 심리학을 전공한 게 그녀의 진로를 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엔 그게 취업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않았지만 20대 초반의 효은은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했었다.
그녀가 경험하지 못했던 부모와 자식의 심리 형성 과정을 들으며 효은은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고 했었던 것 같았다. 결국 그녀 자신을 먼저 알고 들여다봐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어 외국으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면 현지 내담 경험도 부족하고, 곧장 실전에 투입하긴 힘들다고 봐서…… 김 교수한테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어요.”
“아, 네.”
효은도 짐작했던 부분이라 이해했다. 한 번에 취업이 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유학을 다녀온 게 플러스가 되는 현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곳 내담자들과의 상담 이력이 중요한 직업이었다. 더군다나 최 박사의 상담 센터는 현지에서 경력을 가진 상담사들도 앞다투어 탐을 내는 곳이었다.
“아, 그렇다고 돌려보낼 생각으로 부른 건 아니에요.”
최 박사가 얼른 해명의 웃음을 보였다.
“그럼……?”
“혹시, 내 비서로 일해 볼 생각은 없어요?”
효은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곧장 입을 열지 못했다.
“뭐, 비서라곤 하지만 결국 내가 하는 일이 상담 쪽이니 효은 씨 수련하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바로 자리를 마련하기엔 나도 다른 직원들 눈을 무시할 수가 없어요. 마침 요즘 센터 일 말고도 여러 기획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일손이 부족했거든요. 어때요? 강요는 아니고, 거절해도 괜찮으니까…….”
“아뇨! 하겠습니다!”
어쩌면 그녀에게 더 좋은 찬스일 수도 있었다. 최 박사의 개인 비서라면 얻는 게 더 많을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겐 어떤 것이든 일이 필요했다.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흔쾌히 받아 줘서 고마워요.”
효은에게 시선을 맞추던 최 박사가 뒤늦게 그녀가 작성해 온 이력서를 훑어 내려갔다. 특별한 사유나 생각이 있다면 자신이 참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음…… 결혼은 안 한 거 맞죠? 표기가 안 되어 있어서.”
“결혼……했었어요. 지금은 별거 중이고요. 곧…… 이혼할 생각입니다.”
‘미혼’과 ‘기혼’의 표기란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던 효은은 무엇이 정답인지 몰라 자리를 비워 두었다. 혹여나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직접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혹시…… 문제가 되나요?”
한국 사회는 이혼녀에 대한 인식이 외국과 다르다는 걸 상담 사례를 통해서 많이 접했었다. 그녀 자신이 그 일을 겪은 당사자였기에 내담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강점을 내세우긴 했지만 현실의 벽은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편견을 가진 곳이라면 그녀도 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리가요.”
최 박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
“아, 네! 가능합니다.”
“그럼, 내일 봐요.”
윤선이 새 식구를 맞이하듯 효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노인 심리 상담 센터 건은 지난번 보고드린 박사님을 섭외해 뒀습니다.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도 높은 편입니다. 다만, 사업 설명서만으로는 못 미더워하는 눈치입니다. 상무님을 직접 만나서 투자 의도를 듣고 싶다는데, 약속을 잡아 볼까요?”
그런 일까지 이도에게 넘어오지 않도록 팀장 선에서 처리하던 재영이 어쩐 일로 그의 의중을 물었다. 노인 심리 상담 센터는 이도가 1년 전부터 공을 들이고 있는 사업이었다. 스마트 양로의 길을 열기 위해선 보다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이제 사업도 겉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나보다 박 팀장이 더 전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도가 다른 서류들을 검토하며 객관적으로 되물었다.
“그거야…… 그래도 칼자루를 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재영이 생각을 굽히지 않자 이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른 이유가 있느냐는 듯한 그의 눈빛에도 재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도가 보던 서류를 손에서 내려놓고 정답을 알려 주었다.
“그럼, 회장님을 만나야지.”
직설적인 대답에 재영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부터 이도는 회사 일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내는 중이었다. 모두들 권 상무의 열정이 힘을 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섣부른 추측을 하기도 했다.
야근도 없었고, 결근도 없었다. 정시에 출근해 정시에 퇴근하는 올바른 삶을 두고 그가 회장직을 포기한 것이라 결론지어 버렸다. 이도는 소문 따위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맡고 있는 역할만 해낼 뿐이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박 팀장에게 넘기겠…….”
“약속 잡아요.”
이도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재영을 관찰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뜻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변함없는 온도였다. 재영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상무실에서 나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도는 서류 파일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