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그게 사랑이라는 것처럼
사랑이 여간해서 멈춰지지 않는 것이라면 이별은 어떨까.
― 백영옥 장편 소설 『애인의 애인에게』
* * *
“도심형 시니어 타운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은데, 병원 연계도 그렇고. 쉽진 않을 겁니다. 중국 쪽에서도 더 이상 무리수를 두고 싶진 않은 것 같고요. 아울렛으로 넘어가면서 투자금 회수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야 손해 볼 건 없지만 고모님 쪽에선…….”
“잠깐.”
“네?”
재영이 룸미러로 뒷자리의 이도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창가 너머로 향해 있었다.
“세워 봐.”
“아, 네.”
얼른 갓길에 차를 주차한 재영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도는 이미 목표물을 향해 직진하듯 상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구라도 만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곧바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재영은 자신이 더 흥분해 얼른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헐레벌떡 이도를 따라가자 꽃집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벌써 그 계절인가 싶었다. 작년에도 이맘때였다. 해바라기 철이 지날 때까지 이도는 꽃을 사 모았다. 주지도 못할 꽃을 사면서 그는 그리움을 쌓는 것만 같았다.
“올해는 얼마나 사시려고요?”
재영이 옆으로 다가서 묻자 이도가 기억을 떠올리듯 물었다.
“작년에 얼마나 샀지?”
“백 송이는 넘었을 겁니다.”
“오버하지 말고.”
“진짜 세어 볼까?”
그가 사 모은 꽃들은 결국 자리를 감당할 수 없어 별장으로 옮겨졌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그의 해바라기 사재기는 끝이 났다. 그래서 재영에게 별장은 지긋지긋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1년 동안이나 출퇴근하는 자신의 보스를 지켜보는 것도 지옥이었다.
한번은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잔인한 현실을 일러 주었다.
‘그렇게 기다려도 안 옵니다. 올 거면 이미 오고도 남았을 겁니다. 정신 차려.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멱살까지 잡을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이 돌아와 멈출 수 있었다. 그랬다면 지금 그는 이도의 곁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금주 상태인 걸 이도는 아는지 모르는지 올해도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할 생각인 것 같았다.
모든 내막을 알았을 때 재영은 어떤 게 정답인지 결론 내릴 수 없었다. 이도 몰래 효은의 뒷조사를 해, 그녀가 외국 어딘가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는 걸 알아냈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재회가 아니라 시간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배팅인지도 그는 잘 알았다. 아버지를 하루아침에 떠나보낼 때도, 오래 투병한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눈감게 했을 때도, 그는 모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후회는 늘 뒤늦게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 시간들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는 자만이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갑시다.”
어쩐 일로 이도는 꽃을 사지 않았다. 재영은 그것이 더 불안했다. 그리워할 마음조차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너무 아프지 않은가. 그의 사연을 듣고, 권이도가 어찌 살아왔는지 지켜본 그로서는 어린 사모님이 야속했다. 한번 용서해 주는 게 그렇게 힘든 걸까. 하루에도 수십 번 싸우고 화해하는 게 부부인데. 이리도 사랑을 못 잊어 죽어 가는 남자를 두고 홀로서기라니. 그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가 저녁에 사서 오피스텔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이도는 1년 전 여름이 끝날 무렵 별장에서 올라와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그의 출퇴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재영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 그곳으로 내려와 그의 끼니를 챙기기 시작한 강 여사를 본가로 되돌아가게 만들기 위한 이유가 더 컸다.
혹시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된 권 회장이 보낸 것이라고 이도는 추측했다. 하지만 진실은 따로 있었다. 강 여사에게 효은이 부탁하고 떠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도는 더 이상 그곳에서 슬픔에 잠겨 있을 수도 없었다.
“꽃은 그냥 꽃이더라고.”
그는 체념한 웃음을 보이며 돌아섰다. 그의 말대로 꽃은 효은을 대신할 수 없었다. 이도의 시간은 여전히 그녀가 떠나기 전에 머물러 있었고, 그 시계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도야.”
효은이 한국에 돌아왔다는 말을 꺼내야 했다. 재영은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이도는 재영에게 고개를 흔들고는 권 상무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회의 늦겠습니다.”
그리움의 무게도 모두 감당하는 게 그에게 내려진 벌인 걸까. 이도는 자신에게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처럼.
* * *
립스틱을 바르던 효은이 급하게 입술을 닦아 냈다. 이번 색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정하게 보이려면 더 톤이 낮고 산뜻한 느낌이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색을 고르려는데, 핸드폰에 찍힌 시계 숫자가 그녀를 화장대에서 벌떡 일어나게 했다.
“미쳤어, 미쳤어!”
지금 나서도 안정적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효니는 다 좋은데 빠지면 못 나와. 그게 문제야.’
영국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때 만난 제인은 토종 서양인이었지만, 한국말을 곧잘 했다. 한국의 유명한 아이돌 가수를 좋아해서 배우게 된 한글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어 독학 중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인은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다. 두 사람이 룸메이트로 정해졌을 때 제인은 뛸 듯이 기뻐했다. 너랑 같은 방 쓰고 싶었거든. 그러면 한국어 공짜로 배울 수 있잖아. 이유가 너무 확실해 효은은 더 편하게 제인을 대할 수 있었다.
처음 효은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을 때 제인은 ‘은’ 발음이 쉽지 않다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곧 ‘그냥 효니라고 부를게.’라고 말하며 그 누구도 아닌 자신과 깔끔하게 타협했다. 상대를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드는 시원함이었다. 효은은 뭐든지 솔직한 제인이 마음에 들었다.
뭐, 단점도 있긴 했다. 잔소리가 심한 타입이었다. 효은의 홀로서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꼭 자매처럼 그녀를 챙겨 효은이 자신의 행동을 다시금 반성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걱정시키고 보호하고 싶게 만드는 어수룩한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아얏!”
제인을 생각하며 재킷을 집으려던 효은이 아직 풀지 못한 짐 상자에 발을 찧고 말았다. 아픔을 달래려 그 자리에서 한쪽 발만 들고 콩콩콩 뛰기를 반복했다.
‘이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해?’
제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효은은 그녀를 떠올리며 발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레 헤어질 당시 눈물을 참지 못하던 제인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시큰거렸다.
‘가지 마. 나 외롭단 말이야. 1년만 더 같이 있자. 내가 효니 가족이잖아.’
가족은 한국에 있냐는 물음에 짧게 ‘없다.’라고 답했다. 제인이 놀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자 효은은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음의 준비를 했던 터라 그녀 나름의 괜찮다는 설명이었다. 제인은 그때부터 더 그녀를 챙겼던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효은이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계속 연락을 해 왔다.
‘다시 돌아와. 효니가 그리워.’
그녀의 표현에는 계산이 없었기에, 효은은 그대로를 믿을 수 있었다. 제인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마음을 계산해야 하는 건 효은에게 상처였다.
효은은 거울 앞에 섰다. 마음을 다스리듯 얼른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들었다. 이젠 정말 꾸물대다가는 큰일 날 시간이었다. 구두까지 맞춰 신고 나서는 그녀의 걸음이 평소보다도 더 전투적이었다.
마을버스부터 쉽지 않았다. 서울은 그녀가 떠나기 전보다 더 복잡하게 변해 있었다. 2년 전에는 한 번에 직행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이제는 여러 번 나눠 타야 했고, 그 중간에 지하철까지 추가되어 정신없음이 옵션처럼 따라붙었다.
차라리 이번 달 생활비를 포기하고 택시를 탈 걸 그랬나. 마을버스 안에서 오징어처럼 말려지는 순간마다 후회가 밀려왔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 핸드폰까지 요란하게 울려 대 패스할 수도 없었다.
진동으로 바꾸려고 화면을 확인하자 반가운 이름이 찍혀 있었다. 마음이 약해진 효은은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효니!
귀가 터질 것 같은 애탄 목소리가 날아왔다.
“응. 제인. 잘 지내지?”
― 진짜 이럴 거야? 나 섭섭해. 한국 갔다고 날 잊은 거야? 우리 사이가 그렇게 라이트하지는 않았잖아. 나 요즘 밤마다 효니 꿈만 꾼단 말이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오히려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이전 룸메이트의 서운함이 싫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해도 갑작스러운 한국행이었다. 석사 과정을 2년 안에 마무리할 수 있다고 해서 영국으로 떠났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꿈에 다가선 효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보이 프랜 생기면 마음이 달라질걸. 제인, 남자를 만나라니까.”
― 효니처럼 말이지?
“어?”
― 내가 모를 줄 알아? 효니 한국 간 거 남자 때문이잖아.
어떤 추측을 했기에 그녀는 이런 결론을 내린 걸까. 효은은 궁금해졌다.
“또 소설 쓸 거면 전화 끊고.”
― 그럼 그 전화는 뭔데? 남자랑 통화하는 거 다 들었거든. 목소리도 좋고, 아주 다정하고, 효니도 그리워하고. 그럼 딱 답이 나오는 거 아니야?
목소리. 다정함. 그리움. 매치되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너 소설 쓰지 말고, 수사관 해라. 아주 명탐정이야.”
― 그치? 맞지? 그렇다니까.
“그 남자, 저기 오네. 끊는다.”
― 뭐? 야, 효니! 너 정말 이러…….
효은은 얼른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환승 단말기에 찍었다. 우르르 지하철역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 속에서 효은은 그날 밤 남자와 다정하게 통화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살면 살아져. 정신없이. 내 마음 같은 건 사치다. 극복할 거야. 이겨 낼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중엔 웃을 수 있도록.
웃어야 하는데 효은은 시계를 내려다보며 울상을 짓고 말았다. 시계는 약속한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하철 환승역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그녀는 발길을 돌렸다.
택시를 잡기 위해 큰 도로로 나와 크게 두 손을 흔들었다. 빈차 불빛이 꺼진 택시들만 그녀 앞을 쌩하니 지나쳤다. 서울은 전보다 더 그녀에게 차갑고 싸늘해진 것 같았다. 효은은 포기하듯 뒤돌아섰다.
그 순간, ‘빵빵’ 클랙슨이 울리고 그녀의 앞에 멋진 차 한 대가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