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장. 아픔을 새겼다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 효은의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녀가 있는 곳은 태호의 방이었다. 도우미 아주머니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이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켰다.
남아 있던 태호의 장례 절차는 모두 그의 손에서 치러졌다. 모두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안도했다. 입을 연 이후, 효은은 끝까지 할아버지의 조문객을 맞으며 제 몫을 해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효은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고, 그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어, 왔어요?”
방에서 걸어 나온 효은이 그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당분간 휴가를 쓰겠다고 했지만 효은은 그가 강원도에만 머물러 있길 원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도 계시고, 걱정할 거 없잖아요. 더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내 말은 무조건 들어준다는 약속, 어디 갔어요?’
효은이 그렇게 물으면 이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도망이라도 갈까 봐 겁이 나 그녀의 허수아비가 되어 갔다.
“오는 길에 닭강정 좀 샀어.”
“우와. 여기 시장에서 파는 거 맞죠? 나 엄청 먹고 싶었는데.”
효은이 호들갑스럽게 좋아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데, 이도는 불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많은 거 아는데, 지금은 그냥 옆에만 있어 줘요. 그래 줘요.’
태호를 보내고 돌아오던 날. 효은이 부탁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방이 적이었고, 그는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했으니까. 변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이야기였다. 차라리 모른 척 살겠다는 그녀가 고마웠다. 떠나 버린다는 건 아니니까. 사라지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이도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흘러가게 만들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기대고, 그가 그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나쁜 놈인 채로 사는 게 무슨 대수냐 싶었다.
“어머나,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태호의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온 도우미 아주머니가 이도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태호가 떠난 후부터 그녀는 근처 마을에 숙소를 잡고 지내기로 했다. 일부러 그럴 필요 없다고 괜찮다 말려도 신혼부부 곁에서 눈치 없는 어른이 되긴 싫다고 거절했다.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효은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제 버릴 건 이게 다지?”
“네. 가시는 길에 좀 부탁드릴게요.”
아주머니 손에 들린 건 태호의 물건들이었다.
이리도 빠르게 정리할 줄은 이도도 예상하지 못했다. 꼭 할아버지가 떠나길 기다린 사람처럼 효은은 빠른 속도로 태호의 흔적들을 지워 갔다. 그를 그리워하거나 우는 일도 없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밥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전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냈다.
태호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효은은 무너지지 않고 밝게 웃었다. 이도는 그것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그는 직접 의사들을 만나 그녀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럴 수 있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과 함께 정 걱정이 된다면 상담을 받아 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이도는 괜찮다며 돌아 나왔다. 의사를 만나고, 상처가 터지고, 아프게 현실을 직면하면 그에게서 멀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효은을 관찰하고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느라 오히려 그 자신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라도 그의 시선을 벗어나면 심장이 사라져 버렸다. 잠을 자다 손으로 옆자리를 확인하는 일도 잦았다. 효은이 그 자리에 없으면 불이라도 난 것처럼 놀라 찾았다. 정작 그녀는 냉장고 앞에서 물을 마시며 왜 그러느냐는 눈빛을 보이곤 했다.
“뭐 하고 있어요? 얼른 씻고 와요. 닭강정 식어요.”
어느새 아주머니를 보낸 효은이 그의 슈트 재킷을 받아 든 채 눈앞에 서 있었다.
“……그래. 금방 갈게.”
이도가 효은의 볼에 작게 입을 맞췄다.
* * *
태호가 남긴 주식은 아주 쉽게 이도의 몫으로 넘겨졌다. 그것을 사직서와 함께 권 회장 앞에 내밀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여전한 무시. 그게 무상의 방식이었다. 약속을 지켜 달라고 따지지는 않았다. 족쇄처럼 그들 사이를 묶고 있던 비밀은 이제 모두가 공유한 사실이 되어 버렸고, 누구라도 나서지 않는다면 이도 자신이 먼저 폭탄을 터뜨리면 끝날 일이었다. 그는 그저 효은에게 말할 수 있는 날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어느 날을.
* * *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도는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방엔 어둠이 낮게 깔려 있었다. 고개를 돌려 효은의 자리를 내려다봤다. 비어 있었다. 당연하게 심장이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
방을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가 없었다. 거실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간 거야. 이도는 누군가 자신의 숨통을 움켜쥐고 흔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발길을 옮기다 태호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을 열자 효은이 주인을 잃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이도는 안심했다.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침대 쪽으로 다가가 나란히 누웠다. 효은을 끌어와 품 안에 안았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이도는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 들었다.
* * *
“……봄날은 간다?”
“네. 그 영화 촬영한 곳, 가 보고 싶어요. 여주인공이 살았던 아파트. 여기서 얼마 안 걸리더라고요.”
주말이었다. 두 사람 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거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이도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효은이 가고 싶다니까. 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어디든 데려가줘야 할 사람은 이제 자신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옷 어때요?”
모처럼 만의 외출에 효은은 신이 난 것 같았다.
“아무거나 입어도 예뻐.”
“진짜 멋없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녀의 지적에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효은은 고민 끝에 새하얀 원피스를 골랐고, 이도는 그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캐주얼 차림으로 별장을 나섰다. 차에 올라 삼척으로 향하는 내내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달아 내뱉는 효은이 귀여워 이도는 그녀의 손을 끌어와 꼭 붙잡았다.
영화 촬영지는 그저 작은 언덕 위 동네일 뿐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곳. 너무 시시해 오히려 하나하나 새기게 되는 장소였다.
이곳에 사는 여자가 보고 싶어 남자는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온다. 사랑을 감당하지 못해 넘쳐흐르던 순간들이 곳곳에 추억을 남겼다. 그런 마음이 결국은 변하며 여자는 남자를 떠나 버린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쓸쓸한 명대사가 탄생한 곳에 앉아 두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추워.”
쌀쌀한 날씨에 이도는 자신의 겉옷을 효은에게 걸쳐 주었다. 바다는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묵묵하게 그들을 지키고 기다려 주는 것만 같았다. 이도는 그런 사람을 알았다. 태호를 떠올리자 효은이 그를 불렀다.
“아저씨.”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 그녀도 똑같은 사람을 생각한 걸까. 이도는 그제야 이 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아 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 수많은 시간들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모두 그가 놓쳐 버린 것만 같았다. 이도는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돼. 안 된다고 했잖아.”
무슨 말을 꺼낼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경고였다. 애원이었지만 효은은 그의 눈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
“나…… 그냥, 아저씨를 미워할래요.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효은은 차분하게 숨겨 왔던 말을 뱉었다. 이도는 다급하게 효은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날카롭게 내쳐졌다. 돌아본 그녀의 눈 안엔 원망과 고통만 남아 있었다.
“효은아.”
“그래요. 이유가 있었겠죠. 들으면 다 이해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근데…… 안 듣고 싶어요. 묻어 둘래요. 그냥, 아저씨는 나한테 나쁜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할아버지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아요.”
누가 잔인하다 말할 수 있을까. 이도는 웃어 버렸다. 그 모든 변명들이 그녀에게 전해지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된다고. 이미 그는 기회를 놓쳐 버렸는데.
“그날도…… 하루 종일 아저씨 생각만 했어요. 할아버지한테는 시간이 얼마 없는데, 나는 내 사랑에 미쳐 있었어요. 아저씨가 나를 두고 어딜 갔는지 알게 됐는데도, 옆에 없는 게 불안했어요. 나는…… 바보같이 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뭐가 잘못된 건지 알아야 하잖아요. 근데…… 이렇게, 아저씨 옆에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결국 효은이 벗어나야 할 상처는 그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상처를 헤집고 있는 그가 믿지 못할 존재로 그녀의 앞에 앉아 있었다.
“…….”
“아저씨는 내 말 잘 듣는 사람이잖아요. 그냥…… 또 어린애가 억지 부린다 생각하고 잊어 줘요. 우리…… 그렇게 하기로 하고 결혼했잖아요.”
이도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알겠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결국 그는 효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변명조차 차단당한 채 기꺼이 죄의 무게를 짊어진 이도는 그녀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효은의 입가에 홀가분한 미소가 걸렸다.
“진짜 혼자가 돼 볼래요. 외국으로 가 보려고요. 새로운 것도 배워 보고, 모르는 사람들이랑 부딪쳐도 보고, 뭐가 하고 싶은지, 먹고살 것도 궁리해 보고. 무서운 것도 잘 참을 수 있도록 단련할 거예요. 옆에 아무도 없다고 울 나이는 한참이나 지났잖아요.”
효은은 그동안의 자신을 반성하듯 웃었다. 그녀는 이 결혼으로 성큼 성장해 있었다. 홀로서기. 태호가 처음 그에게 부탁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를 보내 줘야 하는 걸까. 그게 맞을까. 그럼 그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도는 끝내 그녀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변하지 마요. 지금처럼 살아 줘요. 나랑 바꾼 주식, 멍청하게 다른 사람 주지도 말고, 꼭 아저씨 걸로 지켜요. 그게…… 내가 주는 벌이에요.”
이도가 알겠다 대답하곤 손수건을 내밀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마스카라를 번지게 만들어 그녀의 고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엉망인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아 낸 효은이 그만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도는 묵묵히 그녀를 뒤따랐다.
차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온 후, 효은은 준비했던 사람처럼 짐을 챙겨 그곳을 떠났다. 통유리 창에 서서 텅 빈 마당을 바라보자 바짝 마른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흔들려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찬 늦가을이었다.
* * *
이도는 그녀의 흔적이 남은 그곳에서 여전히 출퇴근을 했다. 새벽녘에 일어나 앉아 멍하니 옆자리를 내려다봤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한참 동안 불을 켜지 못한 채 거실에 서 있을 때가 많았다.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외딴섬 같은 곳에서 그는 홀로 아픔을 새겼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