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장. 날 무시해 주길 빌었습니다
독일 베를린의 날씨는 연일 비가 내려 스산했다. 정렬하듯 세워진 네모난 건물과 깨끗하고 조용한 거리가 차분한 도시의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완벽하게 선을 지켜 세워진 건물의 형식은 서울의 중심가와 다르지가 않았다. 다만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서울과 달랐다. 재빠른 걸음은 보기 힘들었고, 어디든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사이를 걸어가던 이도는 한 작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이런 일을 하며 살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효은의 생부가 책임보다 권리를 운운하며 뻔뻔하게 돈을 요구하는 거래처의 대표들과 닮아 있을 거라 예측했다. 그들은 뻔뻔했으며, 그 뻔뻔함을 책임감이라고 합리화했다. 나이가 들면 그리되는 것일까. 그런 인생을 살기 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지. 이도는 늘 다짐하며 살아왔었다.
[Kaffee ‘eun’]
문 앞에 달린 이름표를 보고 그는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간다면 그는 효은에게 변명이라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위해서였어. 네가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결국 만나지 않았어. 전부 포기했어. 너만 가질 거야. 널 사랑하는 내가 진짜니까.
문을 붙잡고 수없이 망설이던 이도는 끝내 권 회장을 떠올렸다. 골방. 손길. 기회. 마지막. 기계처럼 발이 움직였다. 늘 해 왔던 것처럼, 그는 세차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간단히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가 그를 맞았다. 중년의 남자는 테이블을 닦다 고개를 들어 손님을 바라봤다.
“아…… 한국분이세요?”
남자가 효은과 닮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누구를 닮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권이도라고 합니다.”
이도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손님을 대하던 남자의 미소가 걷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정적을 깬 건 이도의 주머니에서 울린 핸드폰 소리였다. 효은이었다. 그는 받지 않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10시간을 넘게 날아와 마시는 커피에선 한국의 맛이 느껴졌다. 그가 직접 갈고 내린 원두에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것일까. 이도는 커피를 마시는 것 외에 다른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는 명확했지만, 그래서 쉽지가 않았다.
“효은이가…… 그렇게 일찍 결혼할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평생을 하나뿐인 딸만 기다려 온 사람처럼 말했다. 무엇이 진실일까. 속고 속이는 전쟁터에서 터득한 것이라고는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 능력이었다. 앞에 앉은 남자가 그에게 원하는 건 명확했다. 유언장을 무기로 내밀며 그를 만나자고 한 남자가 보여야 할 태도는 이것이 아니었다. 이도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남자의 목적을 기다렸다.
“내가 왜 그 서류를 보냈는지 궁금하죠? 그렇게 뻔뻔한 행동을 해 놓고 시간을 끌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 테고.”
남자는 이도의 생각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깊은 눈에는 욕망이 없었다. 무엇을 가지기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도의 눈에는 그렇게 읽혔다. 도대체 이 남자는 왜 그를 이곳까지 날아오게 만든 것일까. 남자의 목적에 한 발씩 다가설수록 이도의 심장이 그 끝을 예측한 것처럼 조여 오기 시작했다.
“내가 효은이를 만나지 못하고,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거라 생각합니다. 나한테는 그 애를 생각할 자격조차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마음은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서 비겁한 짓을 해 봤습니다. 그 유언장…… 이미 효력이 없다는 걸 내가 더 잘 알고 있어요. 소송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른 무얼 요구할 목적이라면 이곳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난…… 권이도란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눈치채 버렸다면 그것을 함정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뻔뻔하게 고개를 흔들 수 있을까. 그게 진심이라는 걸 이 남자는 믿어 줄까.
“김 교수한테 이 결혼의 속사정을 전해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난…… 권이도 씨가 이곳에 나타나지 않길 바랐어요. 날 무시해 주길 빌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게 그 애 하나였으면 했어요. 만약 효은이를 이용하는 거라면…… 내가, 그 녀석 곁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모두 오해라고 말해 줄 수 있나요?”
“…….”
이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젠 그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효은이었을까. 아니면 그녀를 이용해 진짜 삶을 사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하나일 것이라 착각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그를 찾는 절박한 메시지들. 무시하지 말았어야 할 그녀의 전화. 그것을 받지 않은 건 명백히 그의 잘못이었다. 불행을 탓하는 건 결국 변명이 되고 말았다.
* * *
또각또각. 거슬리는 구두 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선영은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은 이전보다 더 젊어진 느낌이었다. 성형외과를 옮겨 다니며 그녀가 젊음을 유예하기 위해 써 대는 돈이 지금 선영이 맡고 있는 부서의 전 직원 월급과 맞먹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렇다고 한들 동생은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삶이 당연하다는 듯 살아왔으니까.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언니가 날 먼저 만나자고 하고?”
영란은 테이블 위로 거칠게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만남의 장소는 그녀가 평소 자주 찾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날것을 싫어하는 선영이 이곳을 약속 장소로 제안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여동생의 식성을 배려한 만남 같은 걸 고려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귀찮아하는 잘난 언니. 거기에 이골이 나 버린 삶이라 이런 호의가 오히려 역겹고 거북했다.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주문해.”
결국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계산하는 게 맞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 자신을 통해 얻어 내고자 하는 것. 만약 운 좋게 칼자루가 그녀에게 넘어온 것이라면 싱겁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인지 부터 말해. 나 성질 급한 거 알잖아?”
영란은 기다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어긋나고 실패해서 결국 포기해 버렸다. 사업이란 건 그런 성급함으로 절대 이뤄 낼 수 없다는 걸 아버지 보고 자랐다면 당연히 알 텐데. 어쩌면 동생에겐 아버지의 피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영란을 배 속에 품고 있던 내내 일에만 매달려 있는 남편을 미워한 여자가 아이의 씨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건 당연했다. 영란이 태어나고 한 해를 넘기지 못한 채 이유도 없는 병에 걸려 죽고 만 여자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건 우습게도 사랑이었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앞뒤를 잘라먹은 제안이 선영에게서 날아왔다. 급한 건 아무래도 영란이 아니라 선영일지도 몰랐다. 통쾌함을 감춘 채 영란이 되물었다.
“다짜고짜 무슨 말이야?”
“정말 정민이가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도 이제 그 정도 상황 파악은 되리라고 보는데.”
부탁도 당연한 권리처럼 상대의 우위에 서서 함부로 휘두르려는 뻔뻔함은 아버지를 닮았다. 영란은 언니 선영이 아버지를 닮아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닮은 사람을 올려놓고 모든 걸 뺏길 양반이 아니니. 그래서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적어도 권이도가 영감의 아픈 손가락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언니처럼 많이 배우질 못해서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어. 내 방식대로 말을 해 줘야 어느 쪽에 설지 결정을 할 것 같은데.”
제아무리 바보라 해도 눈치가 없을 리 없었다. 영란이 지금껏 쫓겨나지 않고 둘째 딸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천박함을 뛰어넘는 솔직함 때문이었다.
“정민이 상무 자리는 보장할게.”
또다시 어이없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란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달아올랐다.
“누가 보면 이미 회장 자리에 앉은 줄 알겠어? 혹시 권이도한테 약이라도 먹였어? 이제 와서 다 양보하겠대? 잘나신 고모님의 능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고 징징거리면서 다 집어던지고 나가고 싶대?”
선영에겐 영란의 말장난을 비웃어 줄 아량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선영의 눈빛을 보며 영란이 표정을 바꿨다.
“언니는 말이야. 그 자존심 때문에 매번 일을 그르쳐. 이도가 왜 무서운 줄 알아? 걔는 가지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거든. 언니와는 달리.”
그래서 영란은 효은의 임신을 부추겼다. 그에게도 가지고 싶은 게 생기면 싸움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 여겼다. 주제 파악을 해야 한다면 선영보다는 이도가 이득이었다. 집안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첫 번째는 당연히 선영이었다.
“네가 지금 착각을 하나 본데…….”
선영이 천천히 동생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섬뜩하게 찌르는 눈동자가 영란에게 닿았다. 무언가 쥐고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행동과 눈빛이었다. 영란의 머리가 급하게 돌아갔다. 판이 다르게 돌아간다면 그녀도 그 내막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영란은 잠시 입을 닫고 언니의 의도를 기다렸다.
“네가 가진 주식 넘겨. 내가 회장이 되면 되돌아가는 건 그 몇 배가 될 거야. 당연히 정민이 상무 자리는 보장해. 신사업도 너한테 넘길 생각인데, 어때?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
정말 영란으로선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제안보다도 달콤했다. 형제들이 나눠 가진 주식은 뭉쳐지지 않는다면 효력이 없었다. 권 회장은 그것까지 모두 계산해 물려준 양반이었으니 자식들은 꼼짝없이 제 편을 찾아야 했다.
이미 이도의 아버지는 죽어 버렸고, 남은 건 두 자매뿐이었다. 선영이 회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그녀가 물려받은 주식이 필요하다는 건 처음부터 계산된 일이었다. 그렇게 넘겨준 몫이 어떻게 되돌아올지가 관건이었다. 뼈를 깎듯 전부를 투자해 키워 놓은 아들은 매번 권이도에게 밀려나 2순위가 되었다. 이제 그녀가 선택할 동아줄은 승자의 것이어야 했다. 결정의 시간이 다가온다면 살아날 궁리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생각은 해 볼게. 급해서 좋을 건 없잖아?”
언제나 그 성급함이 일을 그르쳤다. 이번만큼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데, 그녀라고 못 하리란 법은 없었다. 보기 좋게 썩어 들어가는 언니의 표정을 보자 고민의 시간이 길어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롭게 메뉴판을 훑던 영란은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간단히 통화를 마친 그녀가 가방을 챙겨 들었다.
“밥은 나중에 먹어야겠는걸.”
선영이 동생의 겁 없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민은 장례식장에서 좀 더 진지하게 해 보지, 뭐.”
곧이어 선영도 같은 소식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