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39화 (39/74)

9장. 같이 있고 싶어요

효은을 차에 태우고 난 후에야 이도는 승재에게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매번 신세를 지게 되는 것 같다는 그녀의 남편다운 말이었다. 승재는 신경 쓰지 말라며 웃어 버리곤 기수의 가게로 되돌아갔다.

“태워 줄 걸 그랬어요.”

차에 오른 이도에게 효은이 말했다.

“우리 때문에 눈치 보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우리가 어때서요?”

효은은 모른 척 되물었다.

“너, 나한테 화나 있잖아.”

이도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효은은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화난 것까진 아니에요.’ 하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그가 두 손을 모두 들고 항복하듯 사과해 왔다. 효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연한 듯 그를 믿게 되었고, 의심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이것도 사랑인 걸까. 그를 다르게 보는 안경이라도 쓴 것처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콩깍지. 그래. 그걸 사람들은 그리 불렀던 것 같았다.

“근데, 아무리 화나도 핸드폰은 버리지 마.”

이도가 그녀에게 익숙한 물건을 건네주었다. 효은은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

“돌아 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연락이 되지 않는 그녀를 찾기 위해 그는 얼마나 헤맸던 걸까.

효은은 그보다 자신이 더 미안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충전하느라……. 미안해요.”

“아무 일 없었으면 됐어.”

이도가 차를 출발시켰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효은은 뒤늦은 추리를 했다. 이걸 찾았다는 건 기수의 가게에 들렀다는 뜻이었다. 혹시 민아와 마주치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여자는 이 남자에게도 모든 걸 뻔뻔하게 고백했을까. 하지만 마음속 물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여긴…….”

당연히 강원도로 내려갈 줄 알았던 그의 차는 예상과 다른 곳에 세워졌다. 와 본 적 있는 장소 앞에서 효은은 기분이 오묘했다. 그때의 두 사람은 지금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 당시 효은은 그 가능성조차 지워 버리려 애써야 했다.

“기억나? 우리 처음 밥 먹은 곳. 뭐, 나 혼자 먹긴 했지만. 아무튼, 여기 다시 와 보고 싶었어.”

일부러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특별한 장소로 데려왔었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에서 그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그들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도록 머리를 짜내 보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반성의 웃음만 흘렀다.

“기억나요. 결혼 거부 작전 짜자고 불러내서는, 내 얼굴만 쳐다봤잖아요.”

“아마…… 그때 반했던 것 같아.”

이도가 뒷수습을 위해 오글거리는 변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나한테 현모양처가 될 여자는 아니라고 뼈 때렸어요?”

“아, 그건…….”

더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이도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할 거 없어요. 사실인데요, 뭐.”

“더 미안해하라는 소리 같은데?”

“역시 배우신 분.”

하하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주 앉아 웃고 나면 모든 걱정들을 잊을 수 있었다. 효은이 그랬고, 이도가 그랬다.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진실을 품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두 사람을 멀어지게 하거나 어긋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그것이라도 있어야 지금의 둘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한 커플의 모습이었다. 데이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달콤한 눈빛이 오갔고, 먹는 음식이 어떤 맛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너와 함께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행복으로 변한단 말을 누가 해도 어색하지 않을 시간이 쌓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 보았다.

“이렇게 맛있는 거 사 주는 거 보니, 나한테 잘못한 거 있죠?”

“……응?”

효은이 이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가 깊어진 눈빛으로 물잔을 집어 들었다. 그래, 여기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모든 것들을 털어놓는다면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서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때는 이런 감정이 될 줄 몰랐으니까. 그도 목적이 필요한 상황이었을 테니까. 효은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출장을 가야 해.”

그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갑자기요?”

“급하게 잡혔어. 혼자 있을 수 있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여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를 자꾸 어리게 취급하는 이도에게 삐뚤어진 마음이 생겨났다.

“남들이 보면 꼭 몇십 년은 살아온 사이인 줄 알아요. 아저씨랑 같이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요. 내 걱정은 말고 편하게 다녀와요. 오히려 이것저것 신경 안 써도 되고 좋을 것 같은데요?”

“……서운하네.”

이도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려고 했는데.”

“안 속아요.”

효은이 곧바로 덧붙였다. 이도는 씩씩한 모습의 효은이 고마웠다.

모든 걸 털어놓고 이해받을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벌인 행동들. 거기에 더하듯 그가 가져와야 할 것들을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전부를 포기하면 그의 진심을 믿어 주겠다는 말에 그는 증명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거짓말쟁이가 되어 모른 척 덮어 두는 게 낫다는 비겁한 마음이 들었다. 그와 그녀의 아이까지 생기고 나면 자신을 버리진 않겠지. 그런 멍청한 희망을 가지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변명 속에 숨어 그는 점점 겁쟁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언제…… 가는데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라앉은 효은이 물었다.

“내일 새벽 비행기야.”

“그, 그렇게 빨리요?”

꼭 누군가가 둘의 사이를 가로막으려 질투하는 것만 같았다. 효은은 이도가 없는 자신의 시간을 떠올렸다. 모든 게 무의미할 것 같아 우울해져 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박 비서와 마주했다. 그녀를 강원도까지 데려다주려고 온 것 같았다. 서운해하지 말아야지. 서운할 이유가 없는데 효은은 자꾸만 그가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나는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갑자기 잡힌 출장이니 떠나기 전 미리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었다.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올라왔으니 돌아가는 게 맞았다.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보내야 하는 게 맞는데 효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재영이 차 문을 열고 기다렸다. 효은은 이도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차에 몸을 싣고 문을 닫았다. 재영이 시동을 걸고 차가 천천히 그곳을 벗어나자 이도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죄송해요.”

효은이 급히 말하며 차를 멈추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내린 그녀가 이도에게 뛰어가 그를 붙잡았다.

“같이 있고 싶어요.”

* * *

호텔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은 목숨처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마스터키를 꼽기도 전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꼭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상대를 더듬는 손길이 절박했다. 이도가 효은의 블라우스를 찢듯이 벗겨 내고 가슴을 어루만졌다.

묵직한 혀가 삽입하듯 입 안을 오갔다. 노골적인 키스를 퍼부으며 거친 손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탐했다. 사타구니를 비비는 그의 중심이 너무도 선명하게 크기를 키워 가 섬뜩할 정도였다. 심장을 뜨거운 물에 담근 것처럼 헐떡이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아득함을 끝도 없이 느꼈다.

“고개. 고개 들어 봐.”

자꾸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마는 막막함에 효은은 이도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애틋한 주문에 고개를 들자 그가 타들어 갈 듯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미친놈이야.”

무엇이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른 채 효은의 다리 하나가 들려졌다. 사위는 어둡기만 했고, 두 사람의 거친 호흡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팬티와 치마가 함께 벗겨지며 효은의 몸이 벽에 밀착됐다.

“으…… 으윽.”

어느새 물기를 머금은 아래로 성난 중심이 곧장 들이닥쳤다. 선 채로 머금는 삽입감은 어마어마했다. 몸이 허공으로 들리는 기분이었다. 효은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버티려는 그녀를 안아 올리며 그가 더 깊숙이 허리를 힘주어 밀어 넣었다.

“으, 하……앗. 아저…… 씨.”

그때부터의 기억은 조각이었다. 몸을 부술 듯이 파고드는 그의 분신이 가차 없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목이 꺾이고 등줄기를 빳빳해져 저절로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천천히……. 천…… 흐읏.”

이도는 평소보다 더 난폭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색정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녀를 태워 버리려 했다. 달아오른 온몸을 잘게 다지는 듯한 고통과 쾌락이 이어졌다.

이렇게 부서지는 건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랑을 증명하는 일이니까. 불안을 잠재우니까. 효은은 몸의 고통은 중요치 않았다. 그를 더 깊이 그녀 안에 품고 싶었다.

그 뜻을 알아챈 듯 이도가 그녀를 안아 들고 저벅저벅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침대 위에 효은을 내려놓은 그가 자세를 바꿨다. 등 뒤에서 파고드는 그를 받아 내며 효은이 여러 번 자지러졌다.

압박감에 눈물이 흐르면 이도가 혀끝으로 하염없이 훔쳐 내 삼켜 버렸다. 말랑하게 젖은 혀가 온몸을 점령하며 그녀를 녹였다. 이대로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다. 어디도 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와 떨어지기 싫었다. 효은은 미친 것만 같았다.

* * *

꿈은 꾸지 않았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효은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옆자리를 확인했다.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아래에 고통이 느껴지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벌써 가 버린 걸까. 효은은 침대에서 내려가 핸드폰을 찾으려 했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디는데 작은 협탁 위에 놓인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갔다 올게. 사랑해.]

효은은 그의 바른 글씨를 훑으며 소리 내 읽어 보았다. 사랑해. 그 말을 그녀는 못 해 준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효은은 그가 누워 있던 옆자리를 내려다봤다. 메모장에 적힌 감동적인 말도 소용이 없었다. 자꾸만 마음이 쓸쓸해져 버렸다. 따라간다고 우길 걸 그랬나. 아쉬운 웃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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