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38화 (38/74)

8장. 약하고, 가볍고, 주저하는 것들

“이게 누구야?”

한산한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기수가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효은은 어제도 왔던 사람처럼 기수 앞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지냈죠, 오빠?”

“나야 늘 똑같지. 근데 승재가 너 강원도로 내려갔다고 했는데, 아니었어?”

가게 안을 둘러보았으나, 승재는 보이지 않았다. 효은은 녀석과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무작정 기수의 가게로 찾아온 길이었다. 카페에서 조금 더 기다렸지만 이도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대신 박 비서에게서 급한 회의가 잡혔다는 문자가 들어왔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작정 기다릴까 봐 걱정돼 연락한 것 같았다.

효은은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몸을 일으켰다. 누구라도 만난다면 지금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돌아봐도 우스운 감정이었다. 제멋대로 찾아와 보고 싶다고 말하면 그가 바로 달려올 줄 알았나. 이리도 철없는 부인이 어디 있을까. 대학 친구들과 말했던 진상 애인의 표본이 바로 그녀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서울 공기 마시러 잠깐 왔어요.”

“에? 이 답답한 미세 먼지를?”

기수가 진심이냐며 되물었다.

“오빠 해물파전도 그립고요.”

“그렇지? 그것 때문이지? 우리 승재 보러 온 건 아니지?”

그의 한마디에 효은은 뜨끔하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요즘 한승재 잔소리 안 들어서 행복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자꾸 뒷문을 훔쳐보는 효은의 행동은 기수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그는 얼른 해물파전을 만들어 주겠다며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공간이 잠잠해지자 효은은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지만 새로 들어온 메시지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핸드폰까지 꺼 두고 어디를 간 걸까. 효은은 그동안 자신이 친구에게 너무 무관심했음을 반성했다.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할 녀석은 아니었지만 권이도란 남자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놓치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절로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효은은 통화 목록에서 태호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손은 망설이다 다른 글자를 눌렀다.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정희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시다는 말부터 전해졌다. 효은은 자신의 일정을 설명한 뒤 간단히 통화를 마쳤다.

어쩐지 마음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꾸만 핸드폰을 의식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몸에서 떨어뜨려 놓고 충천도 할 겸 그녀는 카운터로 향했다. 충전기에 핸드폰을 연결해 놓고 몸을 일으키는데 가게 안으로 익숙한 인물이 들어섰다.

“너……?”

장바구니를 든 승재가 토끼 눈을 했다.

“못 보고 가나 했는데.”

효은은 반가워 얼른 승재에게로 다가섰다. 그 순간 녀석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승재 씨, 핸드폰 여기…….”

효은을 발견한 민아가 자리에 멈춰 섰다.

“승재랑……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어요.”

민아와 효은은 기수가 내온 해물파전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마치 친한 친구들의 술자리가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효은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한 승재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새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단체 손님을 받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언제나 파리만 날리던 가게가 이런 때를 기다린 것처럼 두 여자에게 위험한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민아가 먼저 얘기 좀 나누자며 가볍게 제안했고, 효은은 거부하지 않았다. 왜 그녀가 자신의 친구인 승재와 가깝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일부러 접근했어요. 이도 오빠와 결혼한 여자가 궁금했거든요.”

민아는 거침없이 진실을 말했다. 이제 와 승재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녀에게 달라질 건 없었다. 이도에게 서류를 내밀었을 때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 이후로 그녀의 감정은 계산되지 못했고, 진실과 거짓이 가진 의미를 잃어 갔다.

“예상하지 않았어요? 내가 오빠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효은은 오히려 민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가져선 안 되는 마음이 아닌가. 아무리 입양되었다고 해도 엄연히 가족이었다. 효은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이었다.

“감정은 자유이긴 하지만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세요?”

효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민아가 웃었다.

“맞아요. 절대 가져선 안 되는 마음이죠. 내가, 감히 오빠를.”

솔직함을 빙자한 무례함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녀를 흔들고 싶은 걸까. 효은은 민아의 발악에도 동정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걸 아시면서 왜 제 뒷조사를 하셨어요? 승재랑 친해져서 얻는 게 뭔가요? 지금 상황도 그 사람이 오해하게끔 전할 생각인가요?”

효은이 당돌하게 몰아붙였지만 민아는 죄책감조차 들지 않았다.

“내 보고 하나에 흔들릴 만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

답하지 못하는 효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민아는 너무도 쉽게 그녀의 약점을 잡았다. 이미 악역은 정해져 있었고, 그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 와 착한 척이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오빠를…… 얼마나 알아요? 오빠가 하는 말이면 다 믿을 수 있어요? 선흥 사람들은 착한 한승재 씨랑은 달라요. 날 봐요. 구역질 나는 그런 감정을 갖고도 이렇게 뻔뻔하잖아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게 진짜라고 생각한 순간, 그게 전부 다 가짜라는 걸 알게 될 수도 있어요.”

효은은 민아의 말을 곱씹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만들고 말겠다는 생각만 되뇌었다.

“승재는…… 이용하지 마세요. 더 이상 만나는 일 없도록 해 주세요.”

효은의 입에서 강한 경고가 흘러나왔다. 민아의 시선이 손님을 받고 있는 승재에게로 향했다. 다시 효은에게로 되돌아온 그녀의 눈빛은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걸 왜 새언니가 정하죠? 승재 씨가 선택할 문제 아닌가. 그리고 묻고 싶은 게 생겼어요. 새언니가 승재 씨 사생활까지 참견하는 건 정상이에요? 아, 나는 괜찮고 너는 안 된다는 마인드인가. 그래요?”

“…….”

효은은 더 이상 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민아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왜요? 두 남자 다 가지고 싶어요?”

결국 참지 못했다. 효은은 반사적으로 물컵을 들어 민아의 얼굴에 물을 퍼부었다.

불쌍한 사람.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생각조차 무의미했다.

“……뭐야?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 너?”

승재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라 두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효은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쥐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평소의 장효은이 아니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감정적으로 만든 것인가. 승재는 생각해야만 했다.

민아가 효은의 남편과 친척 관계라는 것까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효은이 민아에게 적대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고, 두 사람이 마주친 상황에 대해선 나중에 사연을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효은아.”

승재가 이름을 불렀지만 효은은 모두 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급하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죄송해요.”

승재는 민아를 그대로 둔 채 효은을 따라나섰다. 기수가 뒤늦게 동생을 불렀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민아는 냅킨으로 젖은 얼굴을 천천히 닦아 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게를 빠져나온 승재는 앞서가고 있는 효은의 팔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장효은!”

돌아선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미안.”

효은은 짧게 사과했다. 친구의 얼굴을 보자 이성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잘못한 게 없었다.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 건 그녀였다. 왜 이렇게 됐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일단 가자.”

승재가 무턱대고 그녀를 이끌었다. 효은은 친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편의점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효은은 가게에서의 일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리도 쉽게 감정에 휘둘린 장효은이라니. 이도를 만나고 나서 그녀가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 같아 두려워지기도 했다.

“마셔. 이 오빠가 쏜다.”

승재가 효은에게 맥주 캔을 내밀었다.

“됐어. 너 일하러 가야 하잖아.”

“너 오랜만에 보는 건데 하루 땡땡이치지, 뭐.”

망설임 없이 캔을 딴 승재가 시원하게 맥주를 마셨다. 효은은 이게 한승재식 위로라는 걸 알았기에 그가 말한 대로 따라 주었다. 따끔한 맥주가 목으로 넘어가자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안 물어?”

효은은 당연한 수순처럼 말을 꺼냈다.

“말 안 해 줄 거잖아.”

“어떻게 알았어?”

장효은 도사가 여기 있었다.

“내가 너랑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알아. 그냥, 보면 안다고.”

승재는 늘 그랬다. 그녀가 생각한 그대로 행동하는 친구였다.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래서 믿음이 갔다. 곁에 둘 수 있었다.

생각은 저절로 이도에게 닿았다.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왜 그리도 결혼을 두려워했는지.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그는 그녀의 관심 자체를 차단시킬 때가 많았다.

그의 뛰는 심장만 믿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늘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불안감이 현실이 될까 봐 마주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리도 약하고, 가볍고, 주저하는 것들이 정말 사랑일까.

“그 여자…… 좋아해?”

효은은 불쑥 승재에게 물었다.

“누구? 민아 씨? 아, 아니야. 그런 거. 네 결혼식장 갔을 때 우연히 신세 져서 몇 번 만난 게 다야. 그냥…… 외로워 보인다고 해야 할까. 아슬아슬하다고 할까. 암튼 동정심 같은 거야.”

한승재다웠다. 녀석의 이런 마음이 민아에겐 더 슬프게 닿을 것을 알았다. 사랑과 동정심. 그것을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일까. 효은은 자꾸만 자신의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던 남자. 그 내막이 어떻든 그녀에 대한 동정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항상 그랬다.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눈빛과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어떤 여자를 좋아하든 네 자유지만, 너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이건 절친으로서 진지하게 건네는 충고야, 알겠지?”

효은이 속마음을 전했다. 승재는 잠시 친구를 바라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술이 쓰네. ……그만, 가자.”

남은 맥주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두 사람은 편의점을 나갔다.

그리고 한 남자와 마주했다. 마치 짜고 만든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효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도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가 인사를 건네는 게 맞았다. 오늘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척. 복잡하게 얽혀 든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연극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효은은 이도에게로 달려가지 못했다.

“안녕하셨어요? 효은이랑 잠깐…….”

“이리 와.”

화가 묻어난 이도의 목소리가 승재의 인사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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