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장. 온전한 진심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효은이 고개를 들었다. 금방 내려오겠다던 이도에게선 다른 연락이 없었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효은은 결국 손가락 끝을 화면에 내려놓지 못했다.
바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걸 제쳐 두고 달려올 만큼 가벼운 자리에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설픈 서프라이즈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반성이 들었다.
효은은 친구와의 약속이 생겼다며 퇴근 후에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정말 오랜만에 서울에 왔으니 승재를 만나고 내려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밀린 이야기가 많았고, 서운함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대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로비를 빠져나가려던 효은은 뜻하지 않은 인물과 맞닥뜨렸다. 효은이 고개를 숙이자 비서를 대동한 여인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보네요.”
선영은 효은을 마주하며 처음으로 활짝 미소를 보였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밀실 같은 공간으로 들어서며 효은은 그의 큰고모에게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계산했다. 고모님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첫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알아챘다. 그는 자신의 가족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배려했지만 그래도 예의를 갖추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은은 이제 이도를 진짜 남편으로 받아들였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취하고 싶었다.
“지금 강원도에 있다고 들었는데. 할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간단히 음료를 주문하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선영은 효은에게 눈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기 좋은 곳에 계셔서……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다행이네요.”
선영은 정말 자신의 일처럼 안심했다.
“서울엔 볼일이 있었나 봐요?”
“아, 네……. 그냥, 이것저것.”
허둥대며 대답하는 효은을 보며 선영의 입가가 동그랗게 올라섰다.
“그래서 이도는 만났어요?”
표정에서 모든 게 뻔하게 읽히는 걸까. 그 볼일이 이도를 만나는 게 아니라는 변명은 할 수가 없었다. 효은은 평소 자신처럼 솔직하게 대답했다.
“바쁜 거 같아서 기다리려고요.”
“좋을 때네요.”
선영은 조카 부부를 흐뭇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란을 대면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녀에게선 여유가 느껴졌고, 윗사람으로서의 위엄이 묻어났다. 그래서 효은은 용기 내 말을 건넸다.
“철없이 구는 건 아닌가 싶어요. 분가도 빠르게 결정하고. 아저씨, 아니, 이, 이도 씨가 여러 가지로 신경 쓰게 만들고. 고모님들 보시기엔 못마땅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결정이 그녀의 상황에만 맞춰졌다.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효은은 이도의 고모를 만나면서 돌아보게 됐다.
“전혀요. 그런 부담 느낄 필요 없어요. 두 사람 일이니 결정은 두 사람이 하는 게 맞죠. 우리 아버지야…… 섭섭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도 마음이 우선이죠. 두 사람 잘 지내면 그것으로 만족하실 거예요.”
선영의 생각을 듣고 나자 효은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만약 이도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그녀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까. 그 물음 앞에선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어요. 뭐가 뭔지, 내가 하는 행동이 맞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더 따지고 고민할 게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결혼 생활에서 믿음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믿음이란 단어 앞에서 효은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 말자. 뛰는 그의 심장만 믿자고 했지만 점점 욕심이 나기도 했다. 이도가 언제쯤 자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까. 아닌 척했지만 그녀는 솔직해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하고 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옛날 사람이란 생각이 드네요. 두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무슨 어설픈 충고를 한다고.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 줘요.”
선영은 자신을 돌아보듯 미안한 웃음을 건넸다.
“아뇨. 저한테 많이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효은은 선영이 난처하지 않도록 얼른 말을 붙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난 회의 시간이 다 돼서 먼저 일어나 봐야겠어요.”
핸드폰 문자를 확인한 선영이 가방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효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하려 하자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나올 필요 없어요. 여기서 기다렸다가 이도랑 좋은 시간 보네요.”
“아…… 네.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래요. 조카며느님.”
선영이 다정하게 효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카페 주차장으로 들어선 선영은 차에 급히 올라타며 비서에게 물었다.
“언제 도착하셨다고?”
“30분 전입니다.”
방금 전 카페에서 문자 내용을 확인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이도가 상무 자리에 오른 뒤 권 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나며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발걸음을 뚝 끊었다. 선영은 그게 손자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 주기 위한 쇼맨십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하나하나, 상대는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상대를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양반이었다.
그런데 그런 권 회장이 회사까지 찾아왔다.
“지금 위치는?”
“권 상무님 집무실에 계시다고 합니다.”
이리도 고약한 아비일 줄은 몰랐다. 선영의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오직 하나만을 위해서 달려온 것은 똑같았다. 불행한 결혼. 껍데기 남편. 주워 온 딸. 그 안에서 진짜는 없었다. 남들처럼 살라는 가훈에 따라 모든 걸 감내했다. 그 대가가 아비의 배신이란 말인가.
왜. 왜, 그녀가 아니란 말인가. 왜, 그녀는 될 수 없다는 건가.
그 물음의 답을 찾아낼 것이다. 끝까지 싸울 것이다.
선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테이블 상석에 앉은 무상은 어제까지 이 자리를 지킨 사람처럼 익숙한 모습이었다. 타고난 장사꾼. 그를 정의하는 말은 하나였다. 자식을 앞세울 때도 흔들림 없던 어깨였다. 무엇이든 원하는 걸 얻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이가 들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새아기 생부가 보내온 거다.”
권 회장이 이도의 앞에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외국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 주듯 봉투 위에 마크가 겹겹이 찍혀 있었다. 뻔뻔한 속내를 드러내는 봉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이도는 확인하기가 겁이 났다. 언제나 시키는 대로만 이행하며 살았고, 그에겐 무서운 게 없었다. 내쳐질 준비까지 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효은의 문제 앞에선 달라져 버렸다.
“예상 못 한 일은 아니다. 돈 앞에서는 다들 별수 없는 법이지. 손 박사 상태도 알게 됐을 테고. 혹시나 했지만 어쩔 수 없구나. 너를 만나고 싶다는 게 조건이란다. 원하는 만큼 쥐여 주고 확실하게 정리하고 와.”
효은의 생부가 권 회장 앞으로 보내온 것은 자필 유언장이었다. 효은의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흐릿한 글씨들. 한참 전에 효력을 잃어버린 내용 안에는 그녀 앞으로 된 재산을 당시 남편에게 넘긴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단, 자신의 아버지 태호가 생을 마감했을 시, 라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알아보니 그 주식 반이 이미 효은이 생모 앞으로 넘어가 있었어. 유언장 같은 건 몰랐을 테니 손 박사도 효은이 몫인 줄로만 알고 정리했을 게다. 소송을 해도 우리가 뺏길 건 없다. 시간 싸움에 불리해질 뿐이지. 그 기회를 잡을 사람이 누군지 계산해라.”
권 회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싸움에서 가장 상처받을 사람이 누군지 분명했다. 효은을 아프게 하는 일에 가장 앞서라는 무상의 지시에 이도는 예전처럼 생각 없이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그 주식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도는 서류를 다시 권 회장 앞으로 내밀었다. 무상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며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싸움에서 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가 원하는 회장 자리에 앉는 건 지금 이루어 둔 것들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했다. 처음부터 선영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한 발 움직이면 이도는 두 발 더 앞서가려 노력했다. 그렇게 숨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니 이 모래성이 한순간에 무너질 일은 없었다.
“어리석은 놈.”
무상이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더 꺼내 이도의 앞으로 던졌다.
[혈족 확인 검사]
이도의 시선에 익숙한 글자가 잡혔다. 저절로 웃음이 흘렀다. 이리도 빠르게. 상황이 그가 예상한 시나리오보다 한발 더 앞서 흘러가고 있었다.
선영이 기회라는 것처럼 찾아와 이 비밀을 내밀었을 때 권 회장은 자신의 딸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그릇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딸에 대한 실망감보다 그녀를 믿었던 본인에 대한 후회가 더 컸다.
무상은 마지막 전쟁의 서막을 알리듯 딸 앞에 준비해 둔 서류를 올려놓았다. 이도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이었다. 선영은 피가 솟구친 눈으로 아비를 바라봤다. 무상은 목적이 하나라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면 유언장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란 제안이었다. 지독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누구보다 지치지 않아야 할 사람은 그가 전부를 건 손자 권이도였다.
“네가 권씨 핏줄이 아니어도 이길 수 있는 패는 그것뿐이야. 그 조건으로 한 결혼이다. 네 몫이야. 악착같이 버틴 세월을 다 무용지물로 만들 셈이야? 이제 와 바보가 되겠단 소리냐?”
내가 믿어 준 만큼 너도 그 몫을 하라는 소리였다. 이도는 진절머리가 났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덫이 목을 옥죄었다. 전부 허무해졌다.
“저한테 원하시는 게 회장 자리입니까? 아니면 제 행복입니까?”
그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걸 들어드리겠습니다.”
이도는 정말 알고 싶었다. 어쩌면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권 회장이 자신을 권이도 그 자체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피는 그저 피일 뿐이라고. 마지막은 희망은 포기를 모르고 멋대로 그의 가슴을 맴돌았다.
“독일에 다녀와라. 그리고 회장이 돼.”
흔들림 없는 무상의 눈빛이 이도의 마음을 깊게 베었다.
‘너는 권씨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그날이 떠올랐다. 가짜가 되던 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에겐 기대를 가질 권리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대신,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이도가 무상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의 입에선 뱉어진 말은 노인에게 닿아 그들의 세월을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게 만들었다. 권 회장은 노여운 눈으로 손자를 건너다볼 뿐이었다.
“주식은 받아 내겠습니다. 저를 거둬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은 하겠습니다.”
“…….”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저를…… 놓아주십시오.”
무상은 아무런 말도 듣지 않은 것처럼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이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것이 그가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내뱉은 온전한 진심이었다.
“진짜 권이도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