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발에 채운 족쇄
[왜 답장이 없어?]
[아침 회의 들어가.]
[다시 회의.]
[전화 엇갈렸네.]
[서울에서 먹고 싶었던 거 말하라고. 사 갈게.]
[박 비서가 핸드폰 가져갔음. 미안.]
[보고 싶어.]
마지막 문자를 내려다보던 효은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붉혔다. 올라간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기분이 하루 종일 소풍 전날처럼 설레어 여러 번 심장 소리를 체크해야 했다.
예전부터 집안일을 봐주던 정희 아주머니가 별장에 내려와 짐 정리를 도와주었지만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몇 번이고 그녀의 부름을 놓치기 일쑤였다.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하냐고 아주머니가 물어도 그녀는 그저 실없이 웃기만 했다.
“박사님. 우리 효은이, 시집가더니 더 예뻐진 것 같죠?”
“여기서 더 예뻐지면 어쩌나, 나도 걱정하던 참이야.”
정희의 말에 태호가 한술 더 뜨며 효은을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왜 그래요, 두 분 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오늘은 제가 쏠게요.”
“아주 비싼 거 시켜야 겠는걸.”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이림 초밥 드실래요?”
“그 집 초밥이 여기까지 배달된다고? 분점이 있어?”
농담인 줄 알았던 정희가 가능한 일인가 물었다.
“아……. 먹고 싶은 거, 사 오겠다고 해서요…….”
“누가? ……어머나! 새신랑이 사 오는 거야?”
“……새신랑. ……네. 신랑이요.”
그녀는 작게 말하며 웃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해.”
잠시 핸드폰에 시선을 주던 태호가 효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아차 싶었다. 그를 자꾸 내려오게 만드는 철없는 행동을 꾸짖는 건가 싶어 반성이 되기도 했다. 이도의 방문이 태호에게는 신경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부담감을 가지지 않도록 효은은 얼른 말을 바꿨다.
“응. 그냥 오늘은 오지 말라고 할게.”
“그래. 네가 올라간다고 해.”
“응. ……응?”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기 전에 별장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휴가를 받은 현철은 안부를 전하고, 태호의 상태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방문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효은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곧 할아버지가 벌인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다녀와. 권 상무 고생시키지 말고.”
어린 손녀의 철없는 행동을 지켜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효은은 불쑥 감춰 왔던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을 위해 내려왔으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도만 생각하며 지낸 것 같았다. 아픈 태호의 옆에서 그를 떠올리며 웃고 행복해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제 정희 씨도 있고. 걱정할 일 없다. 주말에만 와.”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태호 한 명뿐이라고 여겼다. 그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것 같아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이도와 결혼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새 이도를 전부처럼 여기고 있었다. 할아버지 태호는 알았을까. 그녀의 이런 쉽고도 가벼운 마음을. 또 얼마나 서운했을까.
“당연한 거야.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고. 권 상무가 여길 내주며 같이 지내겠다고 했을 때, 말려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나도 너희들과 같이 살아 보고 싶었던 건가…… 생각했다. 네가 행복한 모습 봤으니 됐어.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효은은 눈물을 삼키며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뭐. 다녀올게.”
할아버지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그녀는 서울 갈 채비를 했다. 더 나쁜 손녀가 되려는 것처럼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에게 시위하듯 가방을 싸서 현철의 차에 올랐다.
이렇게 골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별장을 돌아보지 않았다. 곧장 미안하다며 태호의 손을 잡아 주지 못했다.
“효은아.”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효은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울보는 답이 없었다. 안타까움을 참지 못한 현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효은은 정신을 차리듯 얼른 눈가를 훔쳤다.
“괜찮아요. 다 제 잘못인데요.”
“누구 잘못이 어디 있어.”
현철은 의사로 지내며 수많은 이별을 봐 왔다. 부모의 긴병을 간호하며 지친 자식이 술에 잔뜩 취해 이제 그만 가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았을 땐, 인간에게 생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로를 탓할 순 없었다. 남은 사람들에겐 살아야 할 날들이 있으니, 떠날 이들은 그들에게 미련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어느 쪽이든 죄책감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처음엔, 할아버지를 위해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행복한 모습을 보여 드리면 더 좋아하시겠지. 기뻐하시겠지. 내 행복이 할아버지의 행복이니까. 그렇게만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젠 할아버지 마음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해요. 나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 사람이랑 결혼했는데, 이젠 그 사람이 옆에 없는 게 더 견딜 수가 없어요.”
사랑이 그랬다. 현철은 효은의 엄마 희진을 떠올렸다. 그녀가 마음에 품은 남자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약혼할 여자가 있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태호는 뒤늦게 모든 걸 받아들였지만 곧 딸을 떠나보내야 했다. 상복을 입은 채 자지러지게 우는 효은을 텅 빈 눈으로 내려다보던 스승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다르게 생각해 봐. 네가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을 어떻게 견뎠을까? 박사님이 원하는 마음으로 곁에 있어 드렸을까? 힘들어하는 네 모습 보시면서 끝을 준비하셨다면 더 괴로우셨을 거다.”
사람을 잃은 슬픔은 사람으로 위로받는 것이 아닐까, 현철은 태호가 효은을 홀로 키워 내는 모습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의 태호가 효은에게 위로받았듯 효은은 그 남자에게 위로받고 있는 것이겠지.
“네가 지금 할 일은 그 사람을 더 원 없이 사랑하는 거다. 그게 할아버지를 잘 보내 드리는 방법이야.”
효은은 현철의 말을 받아들이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그녀와 그를 이어 주려 했던 것일까. 그녀가 그를 사랑할 것을, 그래서 자신과의 이별에 덜 아파할 것이라는 걸. 서울이 가까워져 올수록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남자가 보고 싶었다.
* * *
“내 핸드폰 어디 있습니까?”
이도가 재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회의 들어가셔야 합니다.”
선을 넘는 비서의 행동에 이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잠깐 개인적인 통화 하는 것도 제한받는 자리에 앉아 있는 줄 몰랐습니다.”
“상무님.”
재영은 강원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이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급히 민아를 만난 것도 그 추측에 힘을 실어 주기 충분했다. 평소와 같이 스케줄을 소화하며 권 상무로서의 역할을 잘 이행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뭔가가 달랐다.
그것이 효은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걸까. 그는 수시로 문자를 보내고 잠깐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와 통화하려고 했다. 한창 사랑에 빠진 남자가 보이는 흔한 모습이었지만 재영은 이도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그는 이전과 다르게 웃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놓칠까 봐 잔뜩 날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비밀. 재영은 언젠가 이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아도 모른 척해 줄 수 있느냐고. 그것만 가능하다면 비서 자리를 주겠다고 했었다. 늘 흔들리지 않으려 자신을 더 채찍질해 온 보스였다. 그가 조금씩 따뜻하게 변해 갈수록 재영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민아의 눈물은 그의 형체 없는 걱정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 여자가 그 비밀의 열쇠를 쥔 것은 아닐까. 이도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막고 싶었다. 그에겐 지금의 권이도를 지켜 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오후 스케줄 몇 개 남았습니까?”
“모두 조정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도는 그가 빠져나갈 문까지 닫아 버리는 재영의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보인 태도에 민아가 어떤 결정을 할지. 차라리 모든 걸 밝히고 그 족쇄를 벗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자 효은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겁쟁이가 된 것처럼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시간을 끌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의 행복 때문일 것이다. 너무 달콤해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불안했으니까. 그녀를 사랑할수록 그는 그 자신의 비밀 앞에서 혼란스러워졌다.
때마침 그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재영이 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효은이었다. 이도는 곧바로 안도감이 들었다.
“응. 나야.”
― 바쁘죠?
“너랑 전화할 시간은 돼.”
이도가 다정하게 말하며 차가운 눈으로 앞의 재영을 바라봤다. 뜻을 이해한 재영은 고개를 숙이고 상무실을 빠져나갔다.
― 저녁은 안 사 와도 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그리고 오늘은 내려오지 마요.
효은이 재빨리 전화를 건 목적에 대해 말해 왔다.
“……왜?”
이도는 어쩔 수 없는 섭섭함을 느꼈다. 나는 이리도 보고픈데. 너를 놓칠까 봐 겁쟁이가 되고 있는데. 그 혼자만의 마음인 것 같아 아이처럼 원망이 찾아들었다.
― 누구 좀 만날 거예요.
“누가 놀러 오기로 했어?”
그는 감정을 숨긴 채 덤덤하게 물었다.
― 아뇨. 내가 만나러 가고 있어요.
“…….”
― 너무 보고 싶어서.
덜컥. 그녀의 말이 심장에 걸렸다. 이도는 뒤늦게 효은의 말을 이해했다. 벅찬 마음에 행동이 바빠졌다.
“어디야, 너?”
― 이제 눈치챘어요?
장난기를 머금은 효은의 목소리가 모든 걸 위로했다. 그의 불안을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도록 만들었다.
― 회사 근처에서 기다릴게요. 천천히 와요.
“아니야. 지금 갈게.”
이도는 책임감 따윈 모르는 사람처럼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가짜 권이도. 허수아비 권 상무. 그를 옭아매던 모든 게 한 여자 앞에서는 소용없어졌다.
― 사실은…… 로비에 있어요.
그는 전화를 끊고 차 키를 챙겼다. 상무실 문을 열고 나서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박 비서의 부축을 받고 서 있었다.
“마침 자리에 있었구나.”
노인이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그의 위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가 끄는 지팡이 소리가 이도의 심장을 긋는 것만 같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도의 표정을 읽은 권 회장이 쯧쯧, 혀를 찼다.
“내가 못 올 곳이야? 들어오너라.”
그가 직접 손자의 발에 채운 족쇄를 확인하러 온 걸까.
이도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