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그의 불행을 바란 적은 없었다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민아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이도는 시간과 장소만 문자로 알렸다. 민아 역시에 그의 문자에 알겠다는 답변만 보내왔다.
“내가 늦었어요?”
민아는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눈을 맞췄다.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얼마 만인지. 그 이유가 서류 봉투 한 장 때문이더라도 민아는 상관없었다. 그동안 마음을 졸이며 잠 못 든 시간들을 모조리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욕심 따윈 없었다. 그저 이런 시간이면 되었다. 그가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 주는 남자이기를. 사랑해 달라고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민아는 효은으로 인해 행복해하는 이도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게 뭐야?”
이도가 물었다. 그는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꼭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평소보다 더 차분했다.
“나 배고파요. 밥부터 시키면 안 돼요?”
민아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답지 않게 어리광도 부려 보았다. 이 억지 같은 시간이라도 조금만 더. 그녀에게 허락해 줄 수 없냐는 절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이도에게선 냉정한 물음이 날아왔다.
“네가 원하는 게 나야?”
권이도가 모를 리 없었다. 서류 봉투가 의미하는 바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목적을. 민아가 그의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서류를 준비해 그의 앞에 내밀었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원하는 바가 있다는 의미였다.
이 비밀이 새어 나온 근원지가 선영이라면 이도가 아니라 권 회장과 협상을 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를 찾았다. 제발 그의 추측이 틀리길. 가능성조차 차단한 감정이 수면 위로 오르지 않길 빌었지만 그녀는 끝내 참아내질 못한 것 같았다.
“맞아요. 내가 원하는 건 오빠예요. 내가, 오빠를 좋아해요.”
민아는 웃으며 순순히 모든 걸 인정했다. 이제 와 변명하거나 거짓을 말하며 그녀의 감정을 속일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고백할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너한테 여지를 준 적 있어?”
빈틈없는 이도에게서 잔인한 물음이 이어졌다.
“아니, 네 감정을 내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나?”
그의 말들은 민아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헤집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이런 말들로 무너질 감정이었다면, 스토커라도 된 것처럼 그의 공간을 뒤져 이 검사를 의뢰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날 좋아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이전처럼…… 그렇게 나란히 서 있기만 해 줘요.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요.”
민아는 오히려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도는 우습다는 듯 눈빛에 가시를 세웠다.
“그깟 부탁 때문에 날 쥐고 흔들 생각을 했어?”
“오빠.”
“안타깝지만 그 서류,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 회장? 넌 내가 회장 자리를 탐낸다고 생각했어? 여태까지 날 다른 감정으로 지켜봤으니 잘 알 거 아니야? 내가 허수아비 인생을 살아왔다는 걸.”
그래서 그를 위해 마음을 숨겼다. 우리는 같은 운명이었으니까. 그 비밀의 문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이도였다. 그는 사랑이란 걸 해서는 안 됐다. 그녀를 두고 행복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빠를 믿었어요. 나를 믿게 했잖아요. 우리는 아무것에도 미련 두지 않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오빠가 보여 줬잖아요. 왜 내가 이런 마음을 먹게 만들었어요? 왜. 그 여자랑 행복하게 웃는 오빠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어땠을 것 같아요?”
이도는 그제야 이 어긋난 복수심의 이유를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네가 나한테 가지는 감정이 뭔 줄 알아? 사랑? 아니. 너는 내 불행을 핑계 삼아 네 삶을 위로한 거야. 동정도 연민도 아니야. 그렇게 해서라도 네 마지막 자존심을 챙긴 거야.”
민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이도의 행복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가 멀어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이 뭐든, 지금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마음대로 해.”
이도는 단칼에 거절했다.
“난 들어줄 생각 없어.”
그는 어떤 마음이기에 고민조차 하지 않는 걸까. 이제껏 허수아비로 살았으면서.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던 삶이 이렇게나 달라진 이유가 도대체 뭘까. 민아는 그 중심에 한 여자가 있다는 걸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인정하긴 싫었다. 뭘 얼마나 만났다고. 서로 조건을 내걸고 진짜도 아닌 가짜 결혼을 해 놓고선 이제 와서 모든 게 진심인 것처럼 구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그 여자 때문에요? 그 여자를…… 정말, 사랑해요?”
“그래. ……사랑해. 네가 내민 봉투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그 사람이랑 있으면 다음을 계산하는 게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감사하도록 만들어.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이도는 다른 사람 같았다.
‘사랑해.’
민아는 그를 따라 하듯 입 속에 단어들을 머금었다.
‘행복해.’
그가 내놓은 말은 생경했다. 그 이유가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내뱉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그의 불행을 빌었을까. 민아는 미련 없이 돌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단두대 위에 함께 서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줄 알았다. 같은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녀가 받았던 위로가 사랑이 아니라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도 그의 불행을 바란 적은 없었다. 민아는 서류가 든 가방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 * *
“여기예요!”
민아는 호들갑스럽게 손을 들고 크게 흔들어 보였다. 남자가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오자 절망으로 뒤덮였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괜찮아지는 것 같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마치, 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외로웠던 걸까. 누구든 상관이 없었던 걸까.
권이도를 품은 마음이 거짓이라면 그녀는 어떤 게 사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벌써…… 이만큼 드신 거예요?”
승재는 민아의 앞에 놓인 초록색 술병을 보고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 취한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웃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승재는 좀 전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내가 좀 이상한 여자라는 거 알아요. 그냥, 누가 내 앞에 좀 앉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주아주 착한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보고 있으면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술에 취한 목소리가 절박해 보였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 여자는 아무도 곁에 두지 못하는 걸까. 몇 번 만난 어린 남자를 불러내 외로움을 달래려 하는 걸까. 승재는 자신이 그녀를 동정한다는 걸 알았다. 그 마음이 지금 이 여자에게는 진짜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거절 또한 할 수가 없었다. 닮아 있었으니까. 지금 그와 그녀는 같은 모양으로 사랑을 앓고 있었다.
“저번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죠.”
민아가 불쑥 확인하듯 물었다.
“아직도 좋아해요?”
승재는 그녀가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알아요. 그래도 좋아하죠?”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하려는 듯, 민아는 대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졌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승재는 거짓 없이 현재의 진심을 내놓았다.
“……네. 좋아해요. 그래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 때문이 아니라도.”
언제나 그랬다. 효은의 행복이 그의 행복이었다. 그녀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 주었다. 이제껏 그걸 우정으로 착각했지만, 그 당연한 마음이 사랑임을 인정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녀가 그 남자로 인해 행복하다면, 그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아야 했다. 이 모든 감정을 정리하는 게 맞았다.
“승재 씨는…… 조연 역할에 만족하는구나.”
민아는 시시하다며 웃었다.
“조연이 어때서요?”
승재의 되물음에 민아는 반박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여기, 여기네요. 감사합니다.”
승재는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급하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잠들어 있는 민아를 깨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몸을 흔들어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택시 기사는 눈치를 주며 그가 민아를 업는 걸 도와주었다.
승재는 하는 수 없이 민아를 업은 채 커다란 대문 앞에 섰다. 급한 나머지 지갑에서 운전 면허증을 꺼내 주소를 확인하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집에 도착할 즈음이면 민아가 깨어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벨을 누르자 경계심 강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 누구시죠?
“혹시 여기가 서민아 씨 댁 맞습니까?”
― 어머, 잠시만요!
여자의 놀란 목소리가 사라지고 곧장 대문이 열렸다. 승재는 안으로 들어서며 큰숨을 한 번 내쉬었다. 등 뒤에서 뒤척이던 민아가 그의 목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가씨! 아이고, 술 냄새야.”
집안 도우미로 보이는 여인이 카디건을 반쯤 걸친 채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승재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좁은 투 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실이 나타나고 로브를 걸친 한 여인이 소파 가운데 서 있는 게 보였다.
“2층 방으로 안내해 줘요.”
그녀는 놀란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승재는 짧게 인사를 건네며 낯익은 여자에 대해 떠올리려 애썼다. 효은의 결혼식. 그 남자의 친척들 무리에 함께 서 있던 여자였다. 이 여자와 민아는 어떤 관계인 걸까. 그것은 곧 쉽게 밝혀졌다.
“민아 엄마예요.”
승재가 민아를 침대 위에 눕히고 거실로 내려오자 선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네. 한승재라고 합니다.”
승재는 자신과 민아의 관계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선영에게서 빠르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만나는 사인가요?”
“아. 아닙니다. 친구 결혼식 때 신세 진 게 있어서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입니다.”
거짓말에 능하지 않은 승재는 오해하지 않을 선에서 사실을 덧붙였다.
“그래요? 이런 적이 처음이라. 내가 실례를 했다면 이해해 줘요.”
“괜찮습니다. 그럼.”
승재는 얼른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고 집을 빠져나갔다. 선영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2층으로 올라갔다. 민아의 방문을 열자 술 냄새가 지독했다. 몇 번 만난 어린 남자의 등에 업혀 올 만큼 무너진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선영은 궁금증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화장대 위로 눈을 돌렸다. 민아의 가방이 보였다.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