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
그는 평소보다 다급하게 행동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효은을 끌어와 침대에 눕히고 입술을 부딪치며 뜨거운 혀를 밀어 넣었다. 다른 손은 위를 거치지 않고 아래로 직행했다. 귀여운 홈웨어가 속옷과 함께 거침없이 벗겨졌다.
“으읏. 천,…… 천히.”
“그게 안 돼.”
이도는 거짓 없는 눈빛이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눈 안이 타는 갈증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효은의 아래를 벗기고,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입술을 맞추고, 가슴을 움켜잡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면 그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괘, 괜찮으니까…… 빨리, 해도…… 흐, 윽.”
효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단단한 물건이 아래를 비집고 들이닥쳤다. 섬뜩한 고통이 머리를 스쳤다.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들이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게 만들려는 것처럼, 세포 하나하나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몸 안에서 천둥이 쳤다. 흔들리고, 꺾이고, 끝내는 비명을 질러 대는 이 무지막지하고 절박한 행동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효은은 알지 못했다.
“……미치겠다.”
이도는 어깨가 침대 헤드에 닿을 만큼 그녀를 몰아붙이는 자신이 무섭기까지 했다. 조절할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효은과 몸을 섞으며 알게 되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해 저절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혀로 핥으면서도 더 깊이 파고들려는 자신의 욕정에 항복했다. 끝없이 닿고 싶었다. 다 가지고 싶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절대도. 누구에게도.
“……다섯 시예요.”
“……알아.”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았다. 이도는 여전히 효은의 몸을 끌어안은 채 동이 트는 창밖을 멍한 눈으로 건너다봤다.
어느 날,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재영이 말했었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그래도 이 방 안에 갇혀 있겠느냐고. 그때는 싱거운 물음이라 생각하고 넘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날이 오늘이었으면, 지금이 끝이었으면, 영원히 효은을 안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됐다.
이도는 이제야 하나씩 욕심이 생겨났다.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싶은 게 없었다. 허수아비처럼 시키는 대로 삶을 살았고, 가짜라는 것에 불만조차 가지지 않겠다 마음먹으며 모든 걸 내려놓았다.
권이도는 권이도인가. 한 번씩 머리를 압박하는 물음이 지나갈 때면 생각을 끊었다. 끝없이 일하며 잊었다. 닫아 두는 것이었겠지. 이제야 그걸 깨닫고 말았다.
진짜 권이도가 되어 살고 싶었다. 그를 안고 있는 여자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울어도 보고 싶었다. 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아이같이 대답을 강요하며 기대고 싶었다.
“……가지 마요.”
효은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그려 내듯 찬찬히 훑어 댔다. 눈, 코, 입. 너무 잘생겨 한 번씩 놀라던 얼굴을. 내 사랑을. 현재를. 심장을. 전부를.
“그래. 안 갈게.”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춘 이도의 대답은 간단했다.
“거짓말.”
그럴 수 없는 남자라는 걸 알았다. 어깨에 올려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냐고 묻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중 어느 하나 그녀가 덜어 줄 수 있는 게 없어 슬퍼지기도 했었다.
“박 비서 시키면 돼.”
그의 대처는 명료했다.
“할아버님이 아시면요?”
“너랑 있고 싶었다 하지, 뭐.”
“그러다 회장 자리 다른 사람한테 준다고 그러시면요?”
“…….”
이도는 대답하지 않고 효은의 뺨을 다정히 쓰다듬기만 했다. 그의 잔잔한 눈에 담긴 뜻이 너무 많아 효은은 함부로 해석하기가 겁이 났다.
“그러니까 뺏기기 전에 얼른 일어나요.”
꿈에서 빠져나오듯 효은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장효은.”
지금 고백해야 했다. 이 결혼의 내막을 모두 말하고,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했다. 주식 따위와 너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나는 이제 너를 얻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봐요. 전화 온다.”
효은이 옷을 집어 입는 사이,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이도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는 박 비서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효은은 그것을 집어 이도에게 내밀었다. 혹시 모를 일탈을 막기 위해서일까. 이도는 바지를 꿰어 입었지만 통화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아직은 권 상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들어오세요. 괜찮다니까요!”
“아뇨. 제가 안 괜찮습니다.”
이도는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실랑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비서 정신이었다. 이런 걸 보고 비서 정신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영은 혹시나 그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 운전을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재영은 이도가 가진 여분 차를 몰고 그가 출발할 시간에 맞춰 강원도로 내려왔다. 거부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지면 이런 기분일까. 이도는 재영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가 빨리 샌드위치라도 만들게요. 그럼 올라가는 길에 같이 드시면 되잖아요.”
“아니, 괜찮…….”
재영이 거절의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효은이 현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영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보스를 바라봤다. 이도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안 올라갈까 봐 잡으러 왔어?”
“역시 눈치가 빠르…… 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이도는 포기하듯 별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속 재료가 분해되어 흘러나오는 샌드위치를 들고 이도는 출근 준비를 마쳤다. 태호에게 아침 인사를 전하고, 효은과 함께 별장 마당으로 나갔다.
“박 비서님한테는 죄송하지만 다행이에요. 가는 길에 좀 자요.”
효은이 이도의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며 당부했다.
“저녁에 봐.”
이도는 효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놀란 효은이 차 안을 바라봤다. 다행히 재영은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었다. 본 사람도 없는데 심장이 별나게 두근거렸다.
“주말부부 하기로 했잖아요.”
“그래. 넌 주말부부 해. 난 평일부부 할 테니까.”
이도가 어이없는 말을 잘도 만들어 냈다.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면서요?”
“들어주잖아. 주말부부.”
“진지하게 안 들을 거예요? 다 아저씨를 위해서라구요.”
“내가 뭘 원하는지 물어봤어?”
그의 물음에 효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보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만 했지, 내가 보고 싶었냐고 되묻지는 못했다.
겁이 났다. 늘 겁이 없다고 경고를 받았던 그녀가 그에게서 듣게 될 말이 무서워 아무것도 묻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이런 게 사랑이란 걸까. 두려움이 많아지고, 나를 나 같지 않게 만들며, 항상 바닥 위에서 한 뼘 떠 있는 듯한 불안함에 동동거리다 그의 다정한 한마디에, 웃는 얼굴 하나에, 모든 걸 가진 것처럼 행복해져 버리는. 시시하고 허무하지만 가진 모든 걸 걸어 버리게 만드는 위험하고도 달콤한 감정. 효은은 처음이라 더 기뻤고, 자주 슬펐으며, 아주 아프기도 했다.
“매일…… 날 보러 오고 싶을 만큼…….”
마치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효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 좋아……해요?”
그녀의 물음에 이도가 웃었다. 그러곤 싱겁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몰라. 이게, 어떤 건지 나도 모르겠어.”
대답은 빨랐지만,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효은은 실망한 눈빛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당신도 모르는 걸 내가 물었던 거군요. 허무한 개그 프로를 본 것처럼 웃으며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이도의 입에서 복잡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어? 지금 네가 나한테 등을 보이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것 같은 거. 하루에도 수십 번 네 생각을 하며 웃고, 널 안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거. 내가 하는 모든 걸 너도 똑같이 느꼈으면 하는 거. 세상에 너만 있으면 될 것 같은 거. 이런 게 다 널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맞을 거야. 내가 장효은을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어.”
이게 무슨……. 새벽 출근길 배웅을 하다 나눌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효은은 이도를 힘껏 끌어안았다. 재영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차 문을 열고 나왔지만 그녀는 이도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모든 게 진심이라는 걸 증명해 주었다.
“아침 일정 하나가 변경되어서 하산 공장부터 돌고 올라가는 스케줄을 잡았습니다. 오후에 예정된 회의 자료는 시간 나실 때 검토하시라고 옆자리에 두었습니다. 지난번과 동일하게 중국 측에 대한 신뢰도 문제에 관한 안건이라 따로 살펴보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시하신 저녁 모임들은 팀장급들로 내려보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보스가 밤낮 구분 없이 열정적인 상태가 지속되면 고생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걸 미리 예측한 박 비서의 경고 같은 부탁이었다. 이도는 멀어져 가는 별장을 창밖으로 지켜보며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었다. 진짜 잠을 자지 못해 미쳐 버린 걸까.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효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이럴 거면서 멋진 척을 하려고 태호와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후회는 늦었고,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이도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는 순간, 진동이 느껴졌다. 이도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화면을 확인했다.
[서민아]
권 상무의 가면을 써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도는 자꾸만 그 가짜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껍데기로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감정 없이 움직이던 예전의 자신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다시 눈을 감자 손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민아가 보내온 메시지였다. 확인해 보니 내용도 없이 서류 봉투를 찍은 사진 한 장만 첨부되어 있었다. 영문을 몰라 천천히 화면을 확대했다.
[혈족 확인 검사]
여섯 글자가 그의 눈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