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33화 (33/74)

33장. 밤이 짧아

뛰어내려 오던 효은이 그의 차 앞에 멈춰 섰다. 그 행동만으로도 이도는 모든 걸 읽을 수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런 것인가. 사랑이란 게. 이리도 사람을 덧없이 웃게 하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만드는 것인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이 여자가 될 것을 확신한 순간, 이도는 그 어떤 것도 억울하지 않았다. 모든 게, 감사하고 소중했다.

“장효은.”

이도가 성큼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 어쩐 일이에요? 나는 고, 고양이 보러 나왔는데.”

발갛게 상기된 볼을 한 채, 잘도 거짓말을 했다. 아니,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면서 아닌 척을 했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해 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 그는 또 한 번 웃었다. 맹랑하고 어린 여자는 그의 심장을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왜 왔겠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이도가 물었다. 효은은 부끄러워 그의 눈빛을 피하다가 창가에 서 있는 할아버지 태호를 발견했다. 얼른 발걸음을 물려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순간, 이도의 큰 손이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더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었다.

“자, 잠깐만요. 할, 할아버지가 보신단 말이에요.”

“잘됐네.”

이도는 오히려 더 뻔뻔했다.

“뭘, 원하는 거예요?”

“대답.”

‘그러니까 무슨 대답이요?’ 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이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 보고 싶었어?”

아……. 이 남자, 점점 더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직진하는 속도가 비행기 못지않았다. 사람 헷갈리게 할 땐 언제고. 효은은 어쩐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말하기 싫어요.”

“할아버님 보시는데 키스할까?”

“잠, 뭐라고요?”

“입으로 확인하지, 뭐.”

이도가 고개를 내려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려 했다. 이미 그의 단단한 손에 얼굴이 붙잡혀 있는 효은은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정말 할아버지가 보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일인가.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어른들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게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보수적이었느냐마는, 효은은 당장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고, 심장도 고장 난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대답할게요. 대답!”

빠져나갈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래. 말해 봐.”

이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다렸다.

“……보그 싶었……음어요.”

효은이 개미 같은 목소리로 흘려 말했다.

“……뭐?”

이도는 봐주는 법이 없었다.

“보고, 싶었다, 고요. 보고 싶었어요! 됐어요?”

그 순간, 이도의 입술이 내려와 효은의 입술을 막았다.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며 발버둥을 쳐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키스에 열중했다. 태호는 이미 창가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었다. 그걸 효은만 모르고 있었으니, 권이도는 그가 원하는 모든 걸 얻어 낼 수 있었다.

“하아……. 이러기죠?”

겨우 벗어난 효은이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밥도 못 먹고 달려왔어. 이 정도는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정말! 그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효은은 또 마음이 약해져 눈빛을 바꿨다.

“그러니까, 얼른 들어와요. 밥……해 놨어요.”

효은이 귀엽게 말하고는 별장 안으로 달아나듯 도망갔다. 이도는 행복감에 미소 지으며 그녀를 뒤따르다 창가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확인하고 잠시 멈춰 섰다. 냉철하고 차가운 권이도는 이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산 적이 있었던가. 놀라운 변화는 그에게 더 욕심을 부리게 만들었다. 진짜 권이도로 살고 싶었다. 적어도 이 별장 안에서는 그를 감추고 싶지 않았다.

“같이 드시죠?”

식탁 위엔 효은이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태호는 이미 식사를 마쳤다며 괜찮다는 웃음을 보였다. 이곳으로 옮겨 온 뒤 그의 낯빛이 더 좋아졌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정도였다. 현대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었던 병을 자연이 낫게 해 주었다는 책과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기적이 태호에게도 찾아오길.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라며 마지막 희망을 붙잡았다.

“배고플 텐데, 얼른 들어.”

태호가 거실로 향하며 자리를 비켜 주자 이도는 수저를 들었다. 점심도 간단히 때운지라 음식 냄새를 맡자 배고픔이 몰려왔다. 눈으로 봤을 때 그럴듯해 보여 맛을 의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국을 한술 떠 입에 넣는 순간, 이도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곧장 기침이 터져 나왔다.

“흠.”

“왜 그래요?”

앞자리에 앉은 효은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아니야.”

짜도 너무 짰다. 원체 입맛이 까다롭기도 했고, 강 여사가 내놓은 건강한 음식에 길들여진 탓일까.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이도의 입 안에서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맛이…… 이상해요?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셨는데. 레시피도 강 여사님한테 전화해서 다 물어본 거예요. 똑같이 계량해서 한 거라 아저씨 입맛에도 맞을 줄 알았는데.”

“맞아. 맛있어.”

이도는 얼른 거짓말을 했다. 요즘의 그는 효은이 처음으로 차려 준 밥상을 거절할 정도로 간이 크지는 못했다. 혹시나 그녀가 실망해 토라지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이 더 힘들었다. 식어 빠진 샌드위치도 먹었는데. 간이 맞지 않는 음식 정도는 참고 먹을 수 있었다. 그래야 모든 게 편안했다.

“밥 더 줄까요? 혹시 몰라서 많이 했어요.”

“……어?”

이도가 음식들을 급하게 입 안으로 넣는 걸 보고 오해한 효은이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어떻게 막지. 막는 방법이 있기나 할까.

“이 할아비한테는 안 권하더니, 그게 다 권 상무 주려고 남겨 놓은 거였어?”

어느새 나타난 태호가 평소와 다르게 효은에게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도에게는 구세주였다.

“아, 아니야. 할아버지, 오해야. 잘 못 드시는 것 같아서 입맛이 없는 줄 알았지. 지금이라도 다시 차려 드릴까요? 밥은 아주 많아.”

“저녁 많이 먹으면 소화 안 된다며?”

“아, 그렇지…….”

“권 상무도 너무 늦게 먹어서 좋을 거 없어. 다 먹었으면 나랑 산책이나 가세.”

“아, 네. 저도 요즘 살이 좀 붙어서.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이도는 빛보다 빠르게 식탁을 벗어나 그들의 침실 쪽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눈빛 교환을 했다는 걸 효은이 알아서는 안 되었다. 주방에 홀로 남게 된 그녀는 처지 곤란이 된 남은 밥을 내려다봤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내일 아침 메뉴를 골똘히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산책로로 들어서며 이도가 뜬금없이 인사를 건네자 태호는 웃음으로 받았다.

“내일부터 집안 일 봐주던 정희 씨가 올 테니 걱정 말고.”

“네. 사람이 완벽할 순 없죠.”

요리까지 잘했다면 효은을 세상에 내놓는 게 더 불안했을지도 몰랐다. 그 단점마저도 예쁘고 사랑스러우니 그에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실 그는 효은이 집안일만 하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세상에 나가 자신의 꿈을 펼치는 데 아낌없이 지원할 생각이었다.

기쁠 땐 같이 웃고, 슬플 땐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보호자로서 그녀의 옆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있길. 네가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내가 되길. 그의 소원은 이제 그 하나로 이어졌다.

“내가…… 효은이한테는 주식 얘기를 못 했어.”

태호가 묻어 놓은 비밀을 꺼내듯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건네려고 일부러 둘만의 시간을 원한 것인가 싶었다.

“제가…… 천천히 말하겠습니다.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있나. 시작은 나였는걸. 그저…… 난…… 저 녀석이 상처받을까 그게 걱정이지. 괜히 자네 마음을 오해할 수도 있고. 이젠…… 그런 게 다 소용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건가?”

“아닙니다. 이제는 제가 더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효은이를…… 저한테 보내 주셨으니까요.”

“우리…… 효은일…… 사랑하는 거지?”

태호의 당연한 물음이 뭉클하게 가슴을 울렸다. 이도는 망설임 없이 곧장 대답했다.

“네. ……아주 많이요.”

그것이면 됐다며 태호가 이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녀석을 효은의 짝으로 점찍어 둔 일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물에 빠진 효은을 안아 들고 나타난 녀석이 그에게 보내오던 믿음직한 눈빛 때문이었다. 담담하고, 감정 따윈 없었지만 꼭 그리 말하는 것만 같았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때까지 태호는 효은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인 것만 같아 늘 불안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품 안에서 안심하고 잠든 효은을 내려다본 순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 녀석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이유 없는 확신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상을 통해 전해 들은 이도의 비밀이 그의 결정을 앞당겼다. 녀석은 감당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묵묵했고, 자신이 선택한 자리를 온 힘을 다해 지켰다. 효은에게도 그래 주길 바랐다. 물에 빠진 효은이 혹시나 감기에 걸리진 않았을까 문 앞에 조용히 약 봉투를 놓고 간 그 마음이라면 서로를 위로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도박 같은 선택이었지만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어 냈다. 태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생을 정리할 수 있어 감사했다.

“춥습니다. 이제 가시죠.”

“그래. 그 녀석, 기다리다 목 빠지겠네.”

밤이 깊어져 갔고, 두 남자의 마음은 한 여자의 행복으로 귀결되었다.

* * *

“……나만, 여기서 자라고?”

그의 잠자리를 봐 준 효은이 베개를 들고 일어섰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할아버지 혼자 주무시는 거 신경 쓰여요. 내 맘 이해하죠?”

이런 이유를 가져다 대면 그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 고단수 수법이었다. 이도는 입만 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주린 배를 붙잡고 고속도로를 달려온 몇 시간 전의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게 될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알았어. 잘 자.”

이도의 포기는 빨랐다. 그래서 오히려 효은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 먼 길을 달려온 이유가 그저 안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걸까. 보고 싶었냐고 묻기만 했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이 그녀를 점점 이상한 오해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네. 내일 몇…… 몇 시에 출발한다고 했죠?”

“다섯 시.”

이도는 간단히 말하곤 침대에 누웠다. 이대로 자려고 하나. 피곤할 것이란 추측은 당연했다. 정말 제대로 된 아내라면 그를 빨리 쉬게 해 내일 아침 운전이 위험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맞았다.

“알람 맞춰 놓았죠?”

“응.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도는 벌써 눈을 감았다. 더 말을 시켰다가는 날 선 눈빛이 날아올 것만 같아 효은은 조용히 돌아섰다. 문을 닫고 나오자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럴 거면 옆에 붙어 자겠다고 했어야지. 효은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태호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아래에 자리를 잡고 누운 효은은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태호는 통증을 잠재우는 약을 먹고 곤히 잠든 것 같았다.

효은은 어쩔 수 없이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이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 위가 비어 있었다. 벌써 떠난 걸까.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찾아왔는데. 미안함과 후회가 동시에 찾아들었다. 왜 감정을 숨기려 했을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데. 그를 향한 마음이 이리도 뜨거운데. 멈출 수가 없어서 하루에도 수십 번 심장이 고장 난 것만 같은데.

“내가 찾던 고양인가.”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효은이 놀라 돌아섰다.

“맞네. 숨바꼭질 좋아하는 나쁜 고양이.”

어둠 속에서 이도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 고양이가 어디 있다는 거예요?”

효은이 눈길을 피하며 뒷걸음질 쳤다.

“여기. 내 앞에.”

이도가 그녀의 턱 끝을 잡아 들어 올렸다.

“이제 도망가면 혼난다.”

손을 옮겨 느릿하게 귓불을 매만지던 그가 속삭이듯 경고했다.

“밤이 짧아. 우리한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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