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산타라도 만난 아이처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결혼하고 난 후, 이도는 효은의 요구에 항상 같은 답을 했다. 하지만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그만하겠다는 말만은 들어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내내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서 떨어지기 싫다는 얼굴을 보였다. 거짓이든, 진심이든, 중요치 않았다. 그 모습에 효은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마음. 눈앞에 있는 현실을 생각하는 게 맞았다.
“너무 멋져서 할아버지도 놀랄걸.”
병실에 남은 태호의 짐을 싸면서 효은은 연신 강원도 별장을 어필했다. 퇴원을 결정하고, 권 회장에게 분가를 허락받고, 새로운 공간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건 순식간에 일어났다. 세 사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로, 그 끝을 잘 마무리하는 게 지금의 최선이었다.
“그렇게 좋아?”
“응. 너무너무. 병실에서 분수 보는 거랑은 비교도 안 돼. 이젠 예쁘고 멋진 것들 제대로 보면서 살아 보자, 우리도. 할아버지가 좋으면 나도 좋아. 아니다. 내가 좋아서 가는 건가.”
효은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울지 말아야지. 울컥하지도 말아야지.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쉽지 않았다. 연명 의료 거부서에 사인을 하고, 김 교수의 당부를 듣고, 행복하게 잘 보내 드리라는 권 회장과 강 여사의 말을 듣는 순간에도 울음을 참아 냈다.
하지만 태호의 담담한 눈빛 앞에선 쉽지 않았다. 이별이 이리도 어려운데, 엄마는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이 모든 게 그녀에게만 힘든 것일까. 나이를 더 먹으면 쉬워지는 걸까. 효은은 깊은숨을 몰아쉬고 눈물을 삼켰다.
“……은아. 우리 ……강아지.”
태호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응. 괜찮아. 난, 괜찮아.”
“그래. 다 괜찮을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주문을 외웠다.
* * *
“할아버님이 허락하실 줄은 몰랐어요.”
이도의 갑작스러운 분가는 권씨 집안사람들에게도 쇼킹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고 나선 각자의 위치에서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기 바빴다. 민아는 선영의 지시로 권 회장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본가에 들렀다. 마침 강 여사가 두 사람의 짐을 정리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그 일을 도왔다.
“권 상무가 어려운 결정을 한 거지.”
강 여사는 속 깊은 생각을 한 이도를 기특해하면서도 이제 두 사람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것에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효은이 이 집 안에 들어온 이후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지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강원도라고 했죠? 오빠는…… 아무래도 떨어져 지내야 하겠네요.”
민아는 오히려 그들의 분가 소식을 반겼다. 결론적으로 효은과 그녀 할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위한 이도의 배려였다. 상무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이도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어쩌면 지금이 민아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이도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모든 승부수를 던져야만 했다.
“효은 양은 몰라도 권 상무가 참을 수 있을지 몰라.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지 요즘 퇴근 시간이 정확해. 내가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권 상무가 누군가를 그렇게 다정하게 쳐다보는 눈빛도 처음 봤어. 권 상무 사랑을 받아서 그런가. 효은 양도 더 예뻐진 것 같고. 얼마 안 있어 이 집에 아기 소리가 들릴 것 같다고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더 신이 났어.”
모두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부부. 악역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민아는 평소보다 들뜬 강 여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와서 왜. 너는 그런 사람인데. 그렇게 태어난 운명이었는데. 어느 누구도 그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욕하고 원망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껍데기뿐인 삶을 연기하며 이도의 행복을 빌어 줄 수가 없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민아는 배를 만지며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옷장 정리를 시작한 강 여사는 민아의 행동에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저녁까지 이삿짐을 보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민아는 식사도 마다하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약속이 생겨 출타 중이던 권 회장의 귀가가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결국 오늘 그녀의 방문은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다.
“권 상무 보고 가지 그래?”
짐 정리를 하느라, 도움만 받고 보내는 것 같아 강 여사는 마음이 쓰였다.
“회사에서도 볼 건데요, 뭘. 이사 잘 마무리하라고 전해 주세요.”
민아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싹싹하고 마음이 고운데……. 서 대리도, 아니, 민아 양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도록 해. 권 상무 보니까, 다 자기 인연이 있는 것 같아.”
뭐라고 답해야 할까. 답할 수 있을까. 민아는 점점 감정을 조절하는 게 힘들어졌다.
“그렇죠……. 인연이란 게…….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 나를 봐. 나도 내가 여기 눌러앉게 될 줄은 몰랐어. 그땐…… 이 집 사람들이 다 불쌍해서 그냥, 조금만 더 있자 싶었거든.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정이 되고, 인연이 되고 하는 거였어.”
강 여사는 민아에게 다가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피로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게 아니더라. 그런 말은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지켜본 똑똑한 그녀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심은 통하고, 언젠간 마음을 알아줄 날이 온다는 것을.
“가 볼게요.”
민아는 으레 하던 것처럼 밝게 웃으며 강 여사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민아의 모습에 강 여사는 자신이 괜히 충고를 해 마음을 다치게 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위태로운 젊은 날의 방황이 부디 길지 않기를. 되돌릴 수 없는 선택으로 후회하지 않기를. 그녀는 민아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빌어 주었다.
* * *
이도는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효은과 훌쩍 떠난 일탈 같은 하루의 휴가. 그리고 분가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미뤄 둔 일 폭탄이 그에게 지금 제정신이냐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회의를 하고 사인을 했다. 권 상무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 일을 해결했다.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은 충만했다. 이 시간을 견뎌 낸 뒤 얻어 낼 행복이 달콤했기에 그는 현재의 고행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줬으니, 너도 네 몫을 해야 할 거다.’
권 회장에게 분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기다린 것처럼 이도에게 못을 박았다. 이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효은을 위해서라면. 그는 토 하나 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권 상무가 권 회장이 되도록 해라.’
무상은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왕의 자리에서 군림하기 위해 그를 끝까지 이용할 족쇄를 쥔 것이었다. 이도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를 위해 기꺼이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과는 달랐다. 이제 권이도 옆에는 장효은이 있었고, 그녀가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밤 운전 위험할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본가로 퇴근해 우선 필요한 물건들만 차에 간단히 실었다. 재영이 같이 움직이겠다고 했지만 이도는 그렇게까지 부려 먹을 정도로 염치없진 않았다. 그에게도 돌아갈 가정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위해 어떤 것이든 이겨 낼 자신이 있다는 선배를 그는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박 비서님 고생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라.”
효은은 할아버지와 둘만의 시간을 원했다.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고 했으니 주말부부로 지내자 했다. 그를 배려한 마음이라는 걸 알지만 서운함이 생겼다. 그는 한시도 그녀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데. 하루 종일 안고 싶은 마음뿐인데. 뻔뻔한 욕심엔 브레이크가 들지 않았다.
“할아버님은?”
고속도로로 진입하며 이도가 효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 괜찮으세요. 저녁 먹고, 오늘은 산책도 했어요. 여기 공기가 좋아서 금방 다 나을 것 같으시대요.
“……다행이네.”
그의 선택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이도는 안도했다.
― 아저씨는요? 아직도 회사예요?
“그래. 밀린 일이 많네.”
이도는 거짓말을 둘러대며 지금의 방문을 비밀로 만들었다. 이왕이면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주말부부 같은 건 우리한테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빠른 후회가 찾아오길 바랐다.
― 땡땡이를 많이 치긴 했죠.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일해요. 나, 백수 남편은 싫어요. 일 잘하고 능력 좋은 남자 좋아해요.
이런 채찍질이라니. 이도는 서운함이 더 생겨 버렸다.
“일만 하냐고, 독박 시집살이 시킨다고 문자 보내던 사람은 어디 갔어?
― 아…….
효은이 잠깐 그때의 자신을 반성하는 게 전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이도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 그, 그때야 본가에 있을 때고요. 지금은 얼마나 편한데요. 미운 소리 하는 아저씨도 없고. 아주 좋아요. 진작 여기 오겠다고 할아버지 조를 걸 그랬나 봐요.
효은이 소심한 복수를 시작했다.
“내가 없어서 편하다?”
― 네. 왜 다들 주말부부 하는지 알겠어요.
“그럼 아이는 언제 만들어?
이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당황한 효은이 말을 잇지 못했다.
― 어, 할아버지? 뭐라고? 아 김치전! 알았어. 아저씨, 할아버지가 찾아요. 저녁 잘 챙겨 먹고, 굿나잇. 끊어요.
전화는 아주 냉정하게 끊어져 버렸다. 이도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리도 일방통행인 마음이었나. 오늘 밤엔 기필코 진실을 알아내고자 속도를 더 올려 도로를 달려 나갔다.
[상무님 저녁도 거르시고 출발하셨습니다. 점심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만 드셨어요. 제가 챙긴다고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죄송합니다. 맛있는 음식 좀 부탁드릴게요. ―박 비서―]
효은은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한 재영의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어쩌다 보니 그에게 스파이 노릇을 시키고 있었다. 이도가 식사를 잘 챙겨 먹는지 걱정되다 보니 수시로 체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 모르게 재영과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나름대로 정성껏 만든 요리를 식탁 위에 준비해 놓고 효은은 별장 밖을 살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태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어? 아, 아니. 그냥, 낮에 본 고양이가 어디 갔나 해서.”
효은이 어색하게 행동하며, 다시 밖을 내려다봤다. 그때 별장의 유리창에 차의 라이트 불빛이 반사되어 비쳤다. 효은은 산타라도 만난 아이처럼 곧장 현관으로 달려가 허둥지둥 신발을 꿰어 신었다. 우당탕탕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요란스럽게 별장 밖으로 나서는 게 태호의 시선에 보였다. 뛰어간 효은이 차 앞에 멈춰 섰고, 이도가 문을 열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