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너니까
중요한 임원 회의에서 이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민아는 비서실 라인을 통해 그가 오늘 다른 스케줄을 치를 것이란 보고를 받지 못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 이유가 혹시나 그 여자 때문이라면. 당연한 것처럼 찾아온 직감이 민아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이도의 집무실로 찾아간 그녀는 그의 비서진에게 보스의 행방을 물었다.
“권 상무님, 통화가 안 돼서요. 급한 일 생기셨나 봐요?”
“아……. 저희가 전달받은 건…….”
어린 여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민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회장 외손녀라는 걸 이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친손녀가 아니라 장녀 선영이 입양한 딸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선영의 오른팔이 되어 앞길을 닦는 충견. 민아에 대한 정의는 정확하고도 가차 없었다. 회사 안에서 이도의 주위를 맴도는 것도 모두 그녀의 어머니가 시킨 짓이라는 게 공공연한 가설이었다. 그래서 여비서는 더욱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때마침 이도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박 비서였다. 민아는 재영이 회사에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더욱 조여 왔다. 같이 움직이지 않은 걸 보니 분명 개인적인 일일 것이다. 혹시나 그녀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즘은 정말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화가 치솟기도 했다. 어떻게 이래. 그럴 일 없다고 말했잖아! 민아는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발만 동동 굴리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 회의감이 찾아들었다.
“이모님이 오늘 저녁에 다 같이 모여 가족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요. 오빠한테 연락하니 핸드폰이 꺼져 있네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이 돼서 찾아왔어요.”
“오늘 식사 자리는 참석하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전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재영은 단호한 표정으로 민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걱정이 돼서 그래요. 오빠 지금 어디 있나요?”
“…….”
민아는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빛이 바뀌자 재영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느 누구라도 지금 그녀의 행동을 본다면 다른 쪽으로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아는 이제 상관없었다. 모든 게 무의미해져 갔다.
결국 긴 눈싸움 끝에 재영이 먼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모님과 같이 계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요. 그렇군요. 민아는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웃어넘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여비서들의 시야를 막는 재영을 바라보고는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급하게 눈가를 훔치자 눈물이 묻어났다. 어이가 없었다. 민아는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듯 신경질적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 * *
“아저씨는 안 그럴 줄 알았어요.”
도대체 어디를 가는 것이냐고 실랑이를 벌이다 이도가 고속 도로로 차를 올리자 효은은 입을 닫았다. 포기하고 나니 어쩐지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 따윈 해서 무엇 할까. 지금 두 사람이 같이 있는데. 효은은 그를 말릴 수 없다면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일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뭐?”
이도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효은다운 추측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그녀의 추측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오늘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온종일 그의 옆에 두고 바라보고 싶었다. 지겹고, 재미없고, 무겁기만 한 일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공모자로 만들어서 할아버님한테 빠져나갈 구멍 만들려는 것도 안다고요. 근데, 뭐…… 나도 요즘 잘한 거 없으니까 이번엔 맘껏 갖다 써요. 혼날 때 같이 옆에 서 있어 줄게요. 또 내 웃음 한 번이면 할아버님이 금방 용서해 주실 거예요. 내가 미리 점수 많이 따 놓았거든요.”
아주 든든한 방패막이였다. 이도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결혼을 아주 잘했어.”
그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효은은 그걸 이제 알았냐고 으스댔다.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이도의 손이 자연스럽게 효은의 손을 끌어와 붙잡았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어느새 여름이 끝나 버린 것인지 바람이 선선했다. 모든 게 좋았다. 여기서 멈추고 싶을 만큼.
이도가 차를 주차한 곳은 강원도의 별장이었다. 풀숲 사이를 지나면 바다가 보이는 명당자리. 권 회장도 모르게 이도가 2년 전에 매입한 것이다. 언젠가는 내쳐질 운명이란 걸 알았다. 권 회장의 결정에 의해 그때까지의 시간이 짧아지고 길어질 뿐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게 되면 이곳에 들어와 살 생각이었다. 그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고, 진짜 권이도가 되어서. 남은 생을 조용히 보내고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었다.
그렇게 마련한 공간이 생각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이도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진짜임을 남기고 싶었다. 결국 효은이 그의 모든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 버린다고 해도, 그는 진심이었다는 것을. 지금 하는 것들은 전부 진짜 권이도의 인생에서 처음이라는 것을.
“우와……. 풍경이 예술이네요.”
효은도 입을 벌릴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별장 거실의 통유리 창으로 보이는 바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이 아닌 환상이라고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살면 그 어떤 것도 두렵고 무섭지 않겠지. 자연은 언제나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니까. 길고 긴 자연의 시간에 비하면 지금의 고통은 작은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고 위로해 주는 것일지 몰랐다.
“여기서 살까?”
효은의 등 뒤로 다가선 이도가 물었다. 그녀가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이도가 낯설었다. 분명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있을 텐데, 좀처럼 추측하기가 힘들었다.
“나야 좋지만, 아저씨 일은요?”
효은은 농담일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백수 권이도는 싫은가?”
“당연한 거 아니에요?”
“진짜 그렇단 말이지?”
이도가 서운한 목소리를 내자 효은이 웃었다.
“나중에. 나중에요. 언젠간 꼭 살아 보고 싶은 곳이긴 해요.”
“나중은 없어.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야.”
효은은 그제야 가슴이 스르르 잠기며 모든 걸 깨달았다. 그가 이러는 이유. 추측했던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병원. 할아버지. 아저씨. 별장. 죽음. 머릿속을 떠돌던 단어들이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 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 있죠?”
“…….”
이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했어요? 그만……하고 싶으시대요?”
그녀의 눈가엔 이미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가장 가까이서 태호를 간호하는 효은이 그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효은은 모른 척했다. 부디 할아버지가 그녀의 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그런 거…… 아니야.”
이도는 그녀를 돌려세워 품에 안았다. 울지 마, 제발. 눈물이 많은 여자를 사랑한 게 잘못인 건가. 효은이 울 때마다 이도는 가슴이 고통스럽게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냥, 내 생각이야. 여기서 잘 보내 드리는 게…….”
효은이 이도를 밀쳐 냈다.
“난 싫어요. 포기 못 해요. 그건 할아버지 욕심이에요. 난 다 했어요. 할아버지가 원하는 거. 아저씨랑 결혼하라고 해서 결혼도 했고,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 보여 주려고 얼마나……. 그런데 나한테 어떻게 이래요? 그냥…… 내 옆에 조금 더 있어 달라는 거…… 그 부탁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눈물은 결국 울음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도는 효은을 달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하다고, 그가 다 잘못한 것이라 말해 주며 자신을 반성했다.
효은이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그의 욕심 때문에 이곳으로 데려왔다. 정말 그의 욕심이었다. 이곳에서 세 사람이 함께 살며 짧게나마 채워질 그의 진짜 인생을 위해서, 이기적인 제안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이도는 효은을 다시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다른 마음을 먹은 듯 급하게 그의 옷을 벗겨 내려 했다. 두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 가져요. 그럼 될 거예요. 빨리 가지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아저씨, 도와줘요. 제발…….”
단추를 풀어내던 효은이 쓰러지듯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이도는 더 깊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심장이 저리듯 아파 와 숨을 참아야만 했다.
이도는 효은을 품에서 떼어 내고 얼굴을 붙잡았다. 그녀의 젖은 두 뺨을 다정하게 쓸어 내 닦아 주었다.
“그래.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해 보지, 뭐.”
그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길어질 거 같으니까 일단 장어부터 먹고 올까?”
엉뚱한 이도의 말에 결국 효은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음과 웃음이 섞여 엉망이었지만 그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녀를 웃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가 고마웠다.
효은은 울다 지친 몸을 그에게 기댔다. 이도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들렸다. 마음이 놓였다. 편안했다. 엄마 배 속의 아이처럼 웅크린 채 그의 가슴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고마워요.”
“……뭐가?”
내 옆에 있어 줘서. 당신이라서 다행이에요.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그녀는 잠들고 말았다.
밖은 어느새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효은을 침실로 데려와 눕힌 이도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함께 잠들어 버렸다. 먼저 눈을 뜬 건 효은이었다. 그의 팔을 베고 누웠던 건지 이도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져 있었다. 효은이 그곳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곧 이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배고파…….”
“장어 먹으러 갈까요?”
효은이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다른 거.”
이도가 당연한 것처럼 효은을 끌어와 깊게 입을 맞췄다. 기다렸어. 정성스런 키스는 심장을 떨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너 깰 때까지. 다정하고 따듯한 손길이 뛰는 가슴을 쓰다듬었다. 너무 참아서. 하나하나 새겨 넣듯 그녀의 몸을 훑어 내린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장어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옷을 모조리 벗겨 낸 이도는 효은의 위에 몸을 겹쳤다.
“으읏. 아저씨…….”
그가 단단히 선 중심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반사적으로 들리는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움켜잡으며 가장 깊은 곳에 닿으려 몸을 붙였다. 그녀를 몰아세우듯 아래를 움직이며 이도는 뒤늦게 셔츠를 벗어 내 침대 아래로 던졌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효은이 숨을 끊어 냈다. 서로를 가지기 위해 정신없이 살을 비볐다. 몸이 부딪치는 소리와 신음이 뒤섞여 조용한 별장 안을 뜨겁게 채웠다.
효은이 절정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자 이도가 눈빛을 바꿔 허리 짓의 속도를 올렸다. 그만. 더 이상은. 목구멍까지 파고드는 것만 같은 그의 중심이 아래의 끝,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하자 뜨거운 기운이 몸 안으로 퍼져 나갔다.
탈진한 효은이 그를 밀어 내려 했지만 이도는 그녀의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세를 바꿔 효은을 뒤쪽에서 끌어안았다. 통유리에 비친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난…… 아이 가지고 싶지 않았어.”
욕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눈빛으로 이도가 고백했다. 효은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 나와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잠자리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그가 밉기도 했다.
“……알아요.”
효은이 그의 눈빛을 피했다. 이도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지금 나한테 선택권은 없어.”
효은은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비친 모습이 아닌, 실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그가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