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장. 나도 에피소드가 필요해
아침 회의 스케줄까지 조정하고 이도는 병원으로 향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효은에게 하지 못할 말이라면, 그 무게가 가볍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이제 그는 효은의 보호자이자 태호의 가족이었다. 이 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 신경 쓰는 것이 맞았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소원처럼 그들의 결혼을 원했던 태호가 떠나는 걸 이도 역시 원치 않았다. 효은의 바람대로 두 사람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고, 재롱을 부리는 모습까지 지켜봐 줄 수는 없을까. 효은이 무너지고, 아파하는 걸 그는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를 마음 깊이 품었다.
“권이도입니다. 진작 따로 찾아뵀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 교수의 진료실 들어선 이도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현철은 이도를 맞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이렇게 빨리 시간을 내 줄 줄은 몰랐다. 현재 권 회장을 대신해 선흥의 전반적인 일을 맡고 있다고 들었다. 그 직책이 가진 무게와 그의 시간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 모든 걸 뒤로하고 그를 찾아왔다는 건, 효은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그만큼 깊다는 걸까. 아니면 효은과의 결혼으로 얻게 된 태호의 주식 때문인 걸까. 현철은 아직 그 속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가 불쑥 전화해서 놀란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혹시…… 할아버님께 안 좋은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이도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박 비서에게 전해 듣기로는 분명 상태가 이전보다 호전되고 있다 했었다. 그들의 결혼이 안정감을 주는 것인지 치료가 잘 진행되는 중이라고 해서 이도도 한시름 놓고 있었다.
“당장 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에요. 나도 며칠 고민을 하다가……. 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손 박사님이 내 스승이에요. 그래서 일반 환자들처럼 대하기가 힘들어요. 그만큼 더 마음이 가고, 신경 써서 치료하고 있지만 걱정도 더 커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네. 교수님이 많이 애써 주신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효은이가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요. 감사한 마음을 더 일찍 전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앞으로 제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현철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나한테 신경 쓰라고 부른 게 아니에요.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네요. 미안합니다.”
“아뇨. 교수님이 미안해하실 건 없습니다.”
깍듯한 이도의 모습에 현철은 자신의 우려가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의 내막을 듣고 태호에게는 걱정스런 마음을 내비쳤지만 막상 그를 만나 보니 권이도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생명의 끝에 선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을 상대하는 게 자신의 업이었다. 돈도, 명예도, 죽음 앞에선 소용이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더 가까이서 깨닫고 있었다.
“효은이가 내 딸 같을 때가 많아요. 이걸 책임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녀석 아빠가…… 내 친구이기도 했고요.”
이도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효은의 아버지. 그에 대해선 금기시해야 한다고 권 회장에게 전해 들었다. 효은을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두고 곧장 새장가를 들었다고 했었다. 그녀에 대한 부성애가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효은도 절대 아버지에 대한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워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도는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 감정조차 그에겐 사치였고, 가질 수 없는 욕심이었다.
“제가 이런 마음인데, 박사님이야 오죽하시겠어요. 효은이를 위해서 평생 살아오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니…… 나도 더 이상은 설득할 수가 없어요.”
“무슨……?”
현철은 이도 앞에 작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연명 의료 거부서]
글자를 읽어 낸 이도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치료를 거부하겠다는 뜻인가. 왜. 하루라도 더 그가 옆을 지켜 주길 원하는 효은이 있는데. 이도는 지금 태호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좋아지신다고 들었습니다. 왜…….”
김 교수는 이도의 시선을 컴퓨터 화면으로 이끌었다.
“뇌로 전이된 걸 어제 발견했어요. 효은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못했어요. 박사님은 이미 눈치채셨고요. 이성적으로 말하자면 예상했던 일입니다. 재발하고 이 병원에 오셨을 때 이미 난 의사로서 끝을 봤어요. 그래도 효은이를 보니까…… 내려놓기 쉽지 않았어요. 분명 좋아지시기도 했습니다. 희망이란 걸, 기적이란 걸, 나도 생각했습니다. 다시 항암을 시작하자고 설득했지만…… 박사님이 원하시지 않아요.”
“…….”
이도는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슴 안쪽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의사셨으니까, 모든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아시는 겁니다. 지금도 마약성 진통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해요. 그 끔찍한 고통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가족이라는 이유로 계속 붙잡고 있는 게 진짜 환자를 위한 것인지 우리 의사들은 늘 고민합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도는 주먹을 쥔 채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태호가 효은의 짝으로 자신을 선택한 것이 이런 감당하기 힘든 상황 때문이었을까. 그녀 혼자 이 모든 걸 책임지고 결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건 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호가 힘을 내 이 생의 끈을 놓지 않길 바랐다. 그 누구보다 효은을 위해서. 이기적이게도 이제 그의 모든 생각은 효은의 행복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 * *
“내가 비겁하다는 것도 아네. ……이렇게 자네를 이용하고 있으니.”
태호의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모든 마음을 먹고 준비한 태도였다.
점점 더 말라 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어느 누가 충고할 수 있을까.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반대할 수 있을까. 이도는 어려웠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라 주는 것도 반대해 붙잡는 것도.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효은이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많이 아파할 거고요.”
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 두 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었다. 골방에 갇혀 현실을 부정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살기 위해 납작 엎드렸다. 이별한 마음을 달래는 법도 몰랐다. 그저 묻어 둔 채 가짜로 살아가는 삶에 만족했다. 들여다보지 않은 상처가 곪고 곪아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모른 척했다. 그게 그때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도 이제 자네가 있지 않은가?”
태호가 이도를 돌아보며 웃었다.
“할아버님.”
“그때는 지치는 것조차 내 안에서 허락하지 않았어. 엄마를 잃고 우는 효은이가 불쌍해서 내가 아픈 것이 대수롭지 않았지. 고통이야 지나면 그뿐이라 생각했어. 정말 마음먹은 대로 지나가 버리더라고. 효은이가 자라면서 그 고통을 이겨 낸 것에 대한 보답을 했어. 사랑스럽게 자라 준 것만으로 고마워. 이미 충분하다네.”
“…….”
머리로는 이해했다. 이도는 지금 태호가 어떤 말을 꺼내고 싶은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의사야. 지금 치료가 어떤 의민지. 나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그래. 자네가 없었다면, 이 병원에서 좀 더 버텼을지도 몰라. 우리 효은이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호흡기에 의지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러고 싶지 않아.”
“…….”
이도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내 소원은 하나야. ……자네가 우리 효은이 곁에 있을 때, 행복한 모습으로 떠나고 싶어. 이런 내 맘, 이해해 줄 수 없겠나?”
아파할 효은이 떠올라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이도는 태호의 곁으로 다가가 그가 자신에게 그랬듯 따뜻한 손을 붙잡았다.
“……고통스러운 치료들, 얼마나 힘드실지…… 압니다. 아니요. 저는 겪어 보지 않았으니 모를 겁니다. 모릅니다. 그래도, 효은이를 위해서 한 번 더 힘내 주실 수 없습니까? 효은이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 지켜봐 주셔야죠. 효은이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고, 그 증손녀가 할아버님 손을 붙잡고 걸을 때까지만…….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태호는 간절하게 애원하는 이도의 손을 그저 다독일 뿐이었다. 그를 효은의 옆에 세운 건 모두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을까. 이도는 그를 더 바라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모든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생각을 바꿔야 했다. 지금도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누가 왔다고요?”
널스 스테이션을 지나던 효은이 친해진 수간호사의 전언에 잠시 의아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키 크고 배우처럼 잘생긴 사람. 올 때마다 슈트 멋지게 차려입고.”
이도가 병원에 왔단 소린가. 그럴 리가 없었다. 출근하는 그를 배웅한 게 몇 시간 전이었다. 몸은 좀 괜찮느냐는 문자에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모른 척하긴 했지만 병원까지 찾아올 정도로 급할 일은 아니었다.
효은은 간호사가 사람을 착각한 것이라 생각하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 그에게 온 문자가 있나 확인하는 사이,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설마, 이제 답장하는 건 아니지?”
헉. 고개를 들자 정말 이도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아, 아저씨.”
어떻게 된 일이냐고 효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시킨 벌이야.”
“네?”
이도가 효은의 손을 붙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어, 어디 가는데요?”
“데이트.”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어이가 없이 효은이 헛웃음이 나왔다.
“회사는요? 일 안 해요? 아니, 나 할아버지 만나야 해요.”
“나도 에피소드가 필요해.”
“네?”
너를 행복하게 만들 에피소드.
우리 모두가 후회하지 않을 추억들.
이도가 효은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