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연애 고자들
꿈에서 엄마를 보았다. 효은아. 우리 효은이. 예쁘게 컸구나. 그 말을 건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 안 가득 안아 주었다. 사랑해. 사랑한다, 장효은. 그리고 미안해. 효은은 엄마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엄마. 난 이제 괜찮아. 그리고 더 크게 팔을 벌려 엄마를 안았다. 엄마는 힘이 엄청 셌다. 숨이 막혔다. 그만. 놓아 달라고 팔다리를 흔들었지만 어림없었다.
“더 이상은 나도 못 참아.”
무슨 소리? 효은은 눈을 번쩍 떴다. 푸근할 줄 알았던 엄마의 가슴이 원래 이렇게 단단했었나. 뒤늦은 깨달음은 허리 아래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물건 때문에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으악!”
효은은 짐승이라도 만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그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될 리 없었다. 그의 단단한 몸에 팔다리가 얽혀 결박되듯 안긴 꼴이 되었다.
“아직 새벽이야.”
속삭이는 이도의 말에 효은은 저절로 어젯밤이 떠올랐다. 약에 취했다. 그렇지 않고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을 테니까. 아니다. 헷갈리게 하지 말라며 경고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효은은 얼굴이 뜨거워지며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계속 아파?”
이도는 다른 쪽을 생각하며 심각하게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알레르기가 가라앉지 않은 걸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남자가 지치지도 않고 그녀의 몸을 괴롭혔던 게 떠오르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심한 것도 잠시, 이도는 끊임없이 효은의 안으로 파고들며 그녀를 생경한 감각 속에서 허우적대도록 만들었다.
좋으면서도 이상했다. 몸과 몸을 섞는다는 게 그런 것인 줄 미처 몰랐다. 그의 심장과 그녀의 심장이 맞닿아 거짓말도 할 수가 없었다. 떨림. 흥분. 처음 느껴 본 쾌감까지. 비로소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끝없이 가라앉던 몸은 구원받듯 다시 떠올랐다. 그에게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달라붙었다. 그만 끝내 달라고 울며 부탁한 것도 같았다. 그는 미안하다며 그녀의 얼굴에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흥분한 눈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 낯선 만족감을 주었다. 늘 선을 지키던 남자였다.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정신없이 그녀를 안을 때마다 효은은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이 남자를 혼자만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이 당연한 것처럼 찾아왔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밑바닥이었다.
“괜찮으니까, 좀 놔줄래요?”
괜히 민망한 마음에 효은은 그의 어깨를 밀었다.
“왜 또 화가 난 거야?”
“부끄러운 게…… 당연하잖아요.”
당신은 어째서 그리도 당당하냐며 효은은 그를 노려봤다. 첫날밤이었다. 그는 몰라도 그녀에겐 잊지 못할 순간이었으며, 어쩌면 평생을 따라다닐 기억으로 남을지도 몰랐다. 효은은 우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으윽.”
절로 신음이 터졌다. 아래로 닥치는 둔통이 어마어마했다.
“괜찮아?”
이도는 재빨리 효은을 상태를 살피며 그녀를 다시 안아 침대에 눕혔다.
“아저씨.”
“아직 정상 아니네. 안 되겠어. 병원부터 가자.”
그가 호들갑을 떨며 침대에서 빠져나갔다.
“……그거 아니라고요.”
“뭐?”
“알레르기 때문 아니라고요.”
효은이 얼굴을 붉혔다.
“…….”
“아무 말도 하지 마요. 하면 오늘부터 나랑 말 못 할 줄 알아요. 이런 건 줄 몰랐어요. 안 해 봤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니까 겁도 없이 아이를 갖자고 하는 그런 철없는 소리를 했겠죠. 반성해요. 반성 중이니까, 아저씨는 모른 척해요. 그냥 내 옆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
이도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내는 그녀를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제발 그 눈빛 좀. 효은은 그의 진득한 시선이 거슬려 미칠 것만 같았다. 반사 작용처럼 어젯밤이 떠올랐고, 아랫배가 뭉근하게 떨려 왔다. 전혀 느껴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그래. 이것은 현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반응하게 되는, 과학적인 논리에 부합되는. 효은은 머리가 점점 미쳐 가고 있었다.
“그 눈빛은…… 어떻게 안 되죠?”
“…….”
효은의 황당한 물음에 이도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웃지 마요. 아무것도 하지 마요.”
“…….”
그는 당장 웃음을 지웠다. 그녀가 시키는 건 뭐든 해 주었다.
“진짜 하지 말란다고 안 해요?”
정말 성격 이상한 사람이야. 뒷말을 하려다 효은은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미친 여자처럼 보일 것이다. 헷갈리는 짓 하지 말라며 꼬셔 놓고 아침이 되자 이거 어쩔 거냐며 책임지라고 하는 꼴이었다. 새로운 인간상을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줘요.”
효은은 항복을 외쳤다. 이도가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이라고.”
“……네?”
“그 처음이…… 암튼, 이런 거 익숙한 놈이 아니야. 나 때문에 네가 아프다고 하는데,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아무렇지 않게 웃어 주는 게 맞는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지, 아니면…… 아무튼…… 아무튼, 아프게 해서 미안해.”
의도치 않게 고백을 하게 된 이도가 난처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효은은 전혀 예상 못 한 화제에 기분이 이상했다. 좋아야해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속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오묘했다. 당연히 많은 여자를 만났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럴 만한 나이였고, 그가 가진 지위와 외모를 생각하면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진짜…… 그래요?”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맞아. 이런 걸 속일 놈으로 보여?”
“아니, 왜요? 어제 보니…… 문제없는…… 아니, 그러니까…….”
“경험 많은 남자가 좋은 거였어?”
이도의 질문이 다른 쪽으로 비껴갔다.
“아,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그러니까…….”
“관심 없었을 뿐이야. 이젠 관심이 많이 생겼을 뿐이고.”
“……많이요?”
“그래도 아픈 여자 건들 만큼 짐승 단계는 아니니까 걱정 말고.”
하여튼 말로 미운 짓을 하는 건 여전한 남자였다.
“짐승 되기 전에 얼른 출근하시죠?”
효은은 경고하며 그를 드레스 룸으로 보냈다. 그녀도 얼른 1층으로 내려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섰다. 좀 전보다는 아래의 당김이 덜해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도 그녀도 모두 옷을 입을 상태였다. 몸도 뽀송뽀송한 거 같고. 내려다본 침대 시트도 새걸로 바뀌어져 있었다. 효은은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솟구쳤지만 어쩐지 가슴이 충만한 따뜻함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정말 미워할 수도 없는 남자였다.
* * *
출근길부터 이도의 표정이 심각했다. 재영은 혹시나 권 회장에게 신사업 문제로 아침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회사로 향하는 길 내내 룸미러로 바라본 그는 핸드폰을 붙잡은 채 근심에 찬 얼굴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상무님.”
생각에 빠져 있던 이도는 재영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선배.”
이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재영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요즘 들어 그가 선배 역할을 해야 하는 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재영은 안도했지만 비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며 대답했다.
“오전 9시 근무 시간입니다, 상무님.”
“오후 6시까지 이 고민을 하라고?”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네요.”
그는 깔끔하게 태도를 바꿨다.
“무슨 문제야? 말해 봐.”
“……원래 이렇게 불안한 거야?”
이도의 질문이 난해했다. 사업에 있어선 구체적이고 명확한 그였지만 사랑은 달랐다. 재영은 며칠째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듯 온갖 경험치를 동원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도의 언어를 가까스로 해석하는 중이었다.
“불안?”
“좀 괜찮냐고 답장 보냈는데 답이 없어.”
알아듣기 위해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린 그의 고민이 너무 1차원적이라 재영은 웃을 수도 없었다. 권이도가 여자의 답장 하나에 이렇게 일희일비하다니. 사랑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지만 이도는 다를 것이라 너무 쉽게 단정 지었던 것 같았다. 재영은 사랑을 시작하는 이도에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재영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선배가 조언한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를 다 했어.”
이도는 그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아. 꽃다발, 귀금속?”
재영은 당연히 그 순서인 줄 알았다.
“귀금속 빼고.”
“아. ……뭐?”
난놈은 난놈인 것인가. 그게 어떻게 바로 그쪽으로 갈 수 있는가 잠시 고민하던 재영은 이도에게 심각한 질문을 받았다.
“순서가 중요한 거였어?”
이도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 질문을 받은 재영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난 순서대로 해서.”
재영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도는 잠시 자신의 선배를 바라봤다.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어쩐지 좀 불안했다. 재영의 눈빛이 점점 신뢰를 잃도록 만들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선배 연애 경험 많지?”
“내가 말 안 했어?”
재영이 당당하게 고백했다.
“지금 내 와이프가 첫사랑이라고.”
이도는 조용히 차 문을 열었다.
“10분 지났군요. 갑시다, 박 비서.”
누구를 탓할까. 이도는 연애 고자들이 뭉쳐 내놓은 답은 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수치상 신뢰도가 높은 인터넷을 믿을 걸 그랬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지하 주차장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순간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답장을 기다리던 효은일까. 이도는 어쩐지 마음이 들뜨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기대감은 여실히 무너졌다. 낯선 번호였다. 권 상무를 찾는 것이겠지. 그는 단단한 갑옷을 입듯 표정을 바꾸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권이도입니다.”
― 나 한성병원 김현철 교수예요.
전화를 건 이는 태호의 주치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