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이제 내가 있으니까
“어쩐 일이야?”
이도는 일부러 꽃다발을 감추지 않았다. 민아가 이 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고 해도 부끄러울 건 없었다. 예전의 권이도가 아니라며 그더러 변했다고 해도 그는 딱히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이젠 그게 진실이니까.
“내가 무슨 일 있어야 와요? 그냥, 여사님 밥 먹고 싶어서요.”
민아의 예고 없는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효은이 민아를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도 그녀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효은이 상대해야 할 사람이 는다는 건 그만큼 스트레스받을 일도 늘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이도는 민아에게 자신의 목적만 찾았다.
“거실 청소하는 중이라서 내가 대신 나왔어요.”
“……청소?”
효은이 그런 것까지 한단 말인가. 이도는 이제야 그녀의 하루 일과가 예민하게 다가왔다. 새벽에 일어나 강 여사와 함께 아침 준비를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출근하고 나면 할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병원으로 향했고, 오후에는 몇 학점 남지 않은 학교 수업을 들으러 간다고 했었다. 그러곤 본가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돕고 청소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던 걸까.
첫 가족 식사 자리에서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만큼 열심히 배우겠다고 말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이도는 자신이 미리 그녀를 배려해 강 여사에게 몇 마디 넣어 주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시집살이시키는 걸까 봐 걱정돼요?”
민아는 이도의 앞으로 좀 더 다가서며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웃지 않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걸 막겠다는 것처럼 현관을 등지고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니야? 고생시키려고 내 옆에 데려온 거 아니니까.”
더 이상 어떤 말로도 받아칠 수가 없었다. 이도의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손안에 들린 꽃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어머니 선영이 그녀에게 준 미션을 수행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두 사람은 서로에게 품은 감정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러 온 꼴이었다. 민아의 심장이 바닥으로 끝없이 가라앉았다.
“……오빠.”
이도가 그녀를 지나쳐 현관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행복해요? 그래요? 이 행복이 진짜일 거라 생각해요?’
민아는 가슴에 담긴 말을 숨긴 채 이도를 바라만 봤다.
“왜? 얼른 들어와.”
그는 민아의 표정 따위엔 관심 두지 않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이도는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눈으로 효은을 찾았다. 그녀는 다용도실에 청소기를 옮겨 놓고선 주방 쪽으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장효은.”
이도의 부름에 효은이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녀는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소스라치며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만요. 오, 오지 마요!”
“왜 그래?”
이도가 놀라 효은에게 달려갔다. 그의 한 손에는 여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저씨! 에, 에취!”
효은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 어서 꽃다발을 저 멀리 치우라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이도가 다급하게 꽃다발을 다용도실 안으로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알레르기 있어?”
“그…… 에취! 이거…… 에취! 복수…… 에취! 날 죽이려고 그런 거죠? 에취!”
노력한다고 하더니 죽이려는 노력이었나 보다. 효은은 순식간에 온몸이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손쓸 시간도 없이 눈물까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이도가 또다시 그녀를 안아 들으려 했다. 보는 눈이 몇 개인데. 효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2층 독채로 뛰듯이 도망쳤다. 그녀를 괴롭히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였다.
침대 끝에 앉은 효은은 끝도 없이 재채기를 했다. 이도가 그녀의 옆에서 반성하는 자세로 티슈를 내밀었다. 병원부터 가자는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서 챙겨 온 상비약 중에 다행히 알레르기약이 있었다. 먼저 약부터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 순간만 지나면 곧 가라앉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꽃이면 다 그래? 그럼 부케도 안 되는 거였잖아.”
“해바라기만…… 에취! 그것만…… 그래요. 에취!”
꼭 골라도. 이도는 자신의 운을 탓해야 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탈이 난다고 했던가. 점수 좀 따 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었다.
“근데…… 그거…… 나 주는…… 거예요? 에취.”
기침이 어느 정도 잦아든 효은이 뒤늦게 물었다.
“그럼 누굴 줘, 내가?”
이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며 눈을 꿈틀거렸다.
“지금 화내는 거예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가 쩔쩔매자 효은의 입가엔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순 없지 않은가. 어디 노력해 보라는 말을 하고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노력한다는 게…… 꽃다발 사 오는 거예요?”
효은은 티 나지 않게 표정 관리를 하며 물었다.
“꽃 싫어할 여자는 없다잖아.”
“누가요?”
“박 비서가.”
“그런 것도 묻는 사이였어요?”
“내가 말 안 했던가. 박 비서, 대학교 선배야.”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효은이 눈을 키웠다.
“선배를 그렇게 부려 먹어요?”
“부려 먹긴 누가 부려 먹어? 월급을 주고 그에 합당한 일을 시켜는 거야.”
이도는 그녀의 단어 선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일자로 만들었다. 이건 그녀의 생각이 지나쳤다. 상무와 비서의 사이가 선후배처럼 막역한 것도 문제일 테니까.
“혹시나 오늘 일 때문에 박 비서님한테 뭐라고는 하지 마세요. 나도…… 꽃, 싫지 않아요.”
“그중에 딱 하나 안 되는 게 해바라기인 거고?”
효은은 민망함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굴 탓해. 그걸로 골라 온 나를 탓해야지. 알겠어. 앞으로 조심할게.”
이도가 순순히 약속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서슴없는 그의 행동에 효은은 숨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 위로 열꽃이 올라오는 건 아닐까 싶어 이리저리 살피는 그의 손길이 더할 수 없이 다정했다. 효은은 저절로 심장이 쿵쾅댔다. 이 정도 거리라면 분명 그의 귀에도 들릴 것이 뻔했다.
“괜, 괜찮으니까…….”
“알레르기가 심장에도 영향을 줘?”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확인하자 효은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진짜, 이 아저씨가! 효은은 이도를 있는 힘껏 저 멀리 밀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도가 더 빨랐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채 자신의 왼쪽 가슴으로 가져갔다.
“난 알레르기도 없는데, 왜 이런 거야?”
이도가 효은에게 물었다. 그의 가슴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안으로 쿵쿵쿵, 이도의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효은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그의 진한 눈빛만 피했다.
“……가져와요. 그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 생각했다. 이도는 그녀의 말을 뒤늦게 이해하고 안 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또 무슨 일을 내려고. 당장 갖다 버릴 테니까…….”
“멀리서 보는 건 괜찮아요! 비닐종이에 꽁꽁 싸서 보기만 할게요.”
이도는 효은의 의도를 곧장 알아챌 수 없었다.
“……처음 받는 거란 말이에요. 남자한테. 그리고…… 아저씨가 나 생각해서 사 온 거고. 꽃은 또…… 함부로 버리는 거…… 아니랬고…….”
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찌할까. 이도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지금 키스하면 더 마이너스야?”
이도의 말에 효은이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그만 해 브여. 이버에는 따그마 마스를 버게 할 그에여.”
“따끔한 맛이 어떤지 맛보고 싶긴 하지만 누가 치우기 전에 해바라기부터 찾아올게. 공기 하나 안 들어가게 비닐에 꽁꽁 싸매서 갖다 놓을 테니까 멀리서 보기만 해.”
“……고마으여.”
효은은 여전히 입술을 사수한 채 대답했다. 그가 침실을 나서고 나서야 그녀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노력한다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내놓은 흘러가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도가 하루 만에 다른 사람처럼 달라지자 효은은 또다시 과거를 잊은 바보처럼 기대감이 차올랐다.
모든 게 거짓이라고 해도,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었다. 첫사랑.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거부할 수 없는 마음 앓이인 것인가. 효은은 그녀에게 줄 해바라기를 열심히 싸고 있을 이도를 상상하며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약 기운이 올라오자 잠이 쏟아졌다.
“알레르기라고?”
민아와 저녁상을 준비하던 강 여사가 놀라 물었다. 분명 퇴근하고 들어온 이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덩달아 효은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알레르기라니.
“네. 제가 모르고 꽃 선물을 사 왔는데……. 아무튼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약 먹었으니 좀 쉬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 그래. 우리는 신경 쓰지 마.”
강 여사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꽃 선물이라니. 그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마음이 든든했다. 이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 생전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데는 분명 효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배경이 있을 터. 권 영감도 아주 좋아할 소식이었다. 강 여사는 어서 이도를 독채로 올려 보내려 했다.
“오빠 식사는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아가 불쑥 물었다.
“아, 내가 생각을 못 했네. 권 상무 저녁은 어떻게…….”
강 여사는 민아의 지적을 받고서야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괜찮습니다. 효은이 좀 좋아지면 같이 나가서 먹고 오겠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할아버지께도 말씀드려 주세요.”
“어어, 그래. 알겠어. 내가 잘 말씀드릴게.”
강 여사를 뒤로하고 이도가 급히 독채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비닐로 꽁꽁 감싼 해바라기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민아는 그곳으로 눈길을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리도 다정한 사람이었나. 왜 그런 남자를 나는 갖지 못하는 것인가. 가슴속에서 울분의 피가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민아는 점점 모든 걸 참기가 힘들어졌다.
“해바라기 여기 두…….”
침실로 들어선 이도는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효은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금방 잠들 만큼 약효가 강했던 걸까. 이도는 꽃다발을 방 입구 쪽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직 자신의 몸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꽃가루를 털어 내기 위해 욕실부터 향했다.
말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이도는 서재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세웠다. 괜찮은지 잠깐 얼굴만 보겠다는 다짐까지 덧붙여 효은에게로 다가갔다.
잠든 효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끙끙 앓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 많은 꽃들 중에 왜 해바라기를 선택해서는. 이도는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반성하듯 효은의 미간을 애틋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 순간 효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 취한 눈이었다.
“……해바라기요.”
효은이 잠꼬대처럼 말했다.
“그냥…… 자.”
“……엄마가 좋아하던 꽃이에요.”
그녀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것만 만졌대요……. 할아버지가 말려도…… 그것만 보고. 그래서 알레르기가 생긴 건가 했어요. 엄마를 그만 그리워하라고……. 의사들한테 말하니까…… 그냥 신체 반응일 뿐이라고 웃어넘겼어요. 할아버지도 그만 좋아하래요. ……그만하면 됐다고.”
“…….”
“근데 난…… 아직도 해바라기가 좋아요.”
효은이 슬픈 눈으로 웃었다. 이도는 참을 수 없었다. 따끔한 맛을 보게 된다고 해도 그녀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아프지 마. 슬퍼하지 마. 외로워하지 마. 이제 내가 있으니까. 그는 입맞춤으로 그녀를 뜨겁게 위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