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꽃다발, 귀금속, 뜨거운 밤
“……주식이요?”
“아직 확실한 건 모르지. 그걸 받는 조건으로 결혼을 진행했는지, 아니면 그 주식 때문에 결혼부터 시킨 건지.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장삿속 없이 사람을 들였겠어. 이미 예상은 했는데, 권이도가 그걸 따랐다는 게 음흉한 거지.”
아침 식사 자리엔 선영과 민아뿐이었다. 아버지 한길은 친가 쪽에서 추진하는 해외 사업 문제로 장기 출장 중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도 이도와 다르지 않았다. 조건에 맞춘 협약 같은 정략결혼. 그들에게 감정 같은 건 사치였다. 더군다나 선영이 불임이라는 사실이 양쪽 집안에 알려지자 서로가 원하는 바를 주고받는 일은 더 깔끔하고 쉬워졌다.
결혼 초기에만 해도 건설 사업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던 한길의 집안이 몇 번의 투자 실패로 부도 위기를 맞았을 때 마지막까지 버팀목이 되어 준 게 선흥이었다. 그 이후부터 당연히 선영 쪽의 힘이 커졌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결혼 생활이 유지되었다.
공개 입양 역시 선영의 선택이었다. 한길은 입양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본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을 원했다. 그러나 선영을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민아를 받아들였고 아버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건 민아가 제일 먼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의 한길은 그 누구보다도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그는 민아의 혈액형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선영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선영은 자신이 필요한 것만 한길에게 요구했다. 그가 종종 홍콩으로 긴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사적인 스케줄이 추가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바람 따윈. 애초에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 해도 이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혼으로 그녀의 위치가 흔들리게 될까 두려울 뿐, 가슴에 남는 건 작은 허무함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마음을 주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는 결론. 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그녀가 깨달은 삶의 이치를 그대로 확인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럼…… 주식을 받게 되면, 두 사람 결혼도…… 끝나는 거겠네요?”
민아가 수저까지 내려놓고 물었다. 선영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불쌍한 것. 가지지 못할 사람을 마음에 품은 것으로도 모자라 제 분수에 맞지 않게 질투심도 감추지 못했다. 무너질 사람이 누구인지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그 쉬운 명제를 아주 어렵게 망쳐 버리는 재주를 지녔다.
“그사이에 두 사람이 마음 맞아 애 낳고 잘 살아도 아버지가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어? 원하는 건 그 주식으로 깔끔하게 권이도를 회장 자리에 앉히는 거니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예요. 아니, 오빠한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사람이에요.”
“그럼 우리한텐 더 좋은 거 아닌가?”
선영이 정신 차리라며 경고했다.
“…….”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야. 주식 때문이든 뭐든 그 어린 여자애한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린다면 임원들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아버지도 이도를 백 퍼센트 믿지는 않으시겠지. 자기 자식이 하루아침에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상을 치른 양반이야. 손자라고 다를까.”
민아는 선영의 딸로 입양되면서 다시 태어날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과자 하나에도 죽일 듯이 머리를 뜯어 가며 싸우는 고아원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왜 내 세상은 이런 것일까. 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것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 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아버지라고 부르던 원장의 시커먼 눈동자 속에서 그 신조차 인간이 만들어 낸 거짓이라는 걸 깨닫고 체념했다. 밤마다 탈출의 날만을 세고 또 세며 견디고 버텼다. 죽기엔 억울했으니까.
그러다 선영을 만났다. 고아원으로 찾아온 선영이 그녀에게 눈을 맞춰 왔을 땐 다시 신을 믿게 되었다.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엄마가 된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러지 마.’
선영의 첫마디는 차가웠다. 철저한 거부. 껍데기뿐인 삶은 바뀌지 않았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하지만 민아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녀가 누릴 삶에서 가족, 사랑, 행복만을 빼내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선영이 그녀를 고른 이유는 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민아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선영의 곁을 충견처럼 지켰다.
“넌 권이도가 그 여자한테 더 정신 못 차리도록 만들어 봐. 그 녀석의 허점이 그 여자가 될 수 있도록. 내 앞에 무릎 꿇고 다 내려놓겠다고 울며 애원하는 권이도를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할 것 같지 않아?”
선영은 민아에게 미션을 주고 식사를 이어 갔다. 민아는 어머니를 따라 웃지 못했다. 선영이 이제껏 그녀에게 부여하던 스파이 임무와는 달랐다. 마치 그녀를 단두대 위에 오른 이도의 앞에 세워 두는 기분이었다.
원하면 같이 죽여 주겠다고. 어느 쪽인지 선택하라고. 하지만 어느 쪽에도 그녀가 바라는 결과는 없었다. 이도의 행복도 그녀의 불행이었고, 이도의 불행도 그녀의 불행이었다. 모든 건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민아는 생각해야만 했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버틴 만큼 얻어 낼 것이다. 이제는 그러고 말 것이다.
* * *
“펑 샤오강은 오후 7시 체크인입니다. 우리 측 자료는 이미 전달받고 훑었을 겁니다. 그런데 3차 자료가 못마땅한지 피드백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다른 조건을 내밀지도 몰라서 TF 팀에서도 긴장한 상태로 주시하고…….”
“……화났을 땐 어떻게 풀어 줍니까?”
“……네? 화가 난 것까진 아닌…….”
재영은 질문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이도를 바라봤다. 여태까지 그가 한 보고를 제대로 듣지 않은 듯했다. 앞에 놓인 자료 파일은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손에 들린 만년필만 책상 위를 노크하듯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침부터 심각한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어 비서실의 분위기를 줄곧 얼음처럼 차갑게 만들어 놓았었다.
“형수한테 쓰는 방법 뭐라도 말해 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이도의 눈동자가 곧장 재영에게로 꽂혔다.
“상무님.”
“여섯 시 지났어. 지금은 권 상무가 아니라 권이도야.”
재영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도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화난 와이프의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는 오늘 스케줄을 모두 완벽하게 소화했다. 모든 게 권이도답다고 생각하며 재영은 선배로 돌아가 되물었다.
“얼마큼 화가 났는데?”
“……얼마큼?”
이도는 자신이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빛이었다. 뭘,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함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 것이다. 재영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구체적인 발단을 물었다.
“뭐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은데?”
“그걸 알면 내가 선배한테 묻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재영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눈은 맞춰 줘?”
그게 왜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이도는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안 맞추면 내가 맞추게 하지.”
휴. 어련하실까 싶었다. 사랑도 사업처럼 하고 있는 것일까. 재영은 괜히 자신이 훈수를 두어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까 봐 걱정이 되었다. 흔들려 버리라는 조언도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이면 앞으로 그의 비서 자리도 위태로웠다.
“내가 노력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어디, 해 보라던데?”
“뭐? 하하하.”
재영은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신부의 자신감이 아주 대찼다. 천하의 권이도를 조련하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재영은 그저 이 상황을 팝콘이나 먹으며 지켜보는 관객으로 남고 싶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권이도가 그렇게 둘 리가 없었다.
“형수한테 먹힌 방법을 말해 보라니까. 시간 없어.”
저녁 시간에 맞춰 들어가야 노력이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이도는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재영에게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재영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음…… 꽃다발이나 귀금속, 아니면 뜨거운…… 밤. 아, 마지막은 위험 부담이 있어서 안 될 수도 있음. 그렇게 해서 우리 재은이가 태어났거든.”
“꽃다발, 귀금속, 뜨거운 밤……이라는 거지?”
이도는 투자처 대표인 샤오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작전이라도 읊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재영은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연애도 해 본 사람이 하는 것이라 했던가. 뒤늦게 사랑이란 것을 하려니 잘난 상무님 권이도도 어설픈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인간적이라 재영은 효은에게 감사할 정도였다. 권이도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부디 행복하게 만들어 주길. 그가 어린 사모님에게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였다.
* * *
“목련꽃…… 있습니까?”
집근처 꽃집 안으로 들어선 이도는 다짜고짜 목련꽃을 찾았다. 목련이 언제 피는지, 그 꽃으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는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남자였기에 주인은 잠시 당황했다.
“아, 목련은 철이 지났죠. 그리고 목련은 꽃다발보다는 한 송이씩 꽃병에 꽂아 두는 게 더 보기 좋아요.”
“아…….”
이도는 다른 고민 없이 목련으로 만든 꽃다발을 사 갈 생각이었다. 효은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새하얀 목련꽃. 그 꽃을 받고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요즘은 해바라기가 잘 나가는데. 이건 어떠세요?”
주인이 환하게 핀 해바라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도를 바라봤다.
“꽃말도 좋아요. ‘당신을 바라봅니다. 사모합니다. 기다립니다.’ 고백하시는 분들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죠.”
당신을 바라봅니다. 사모합니다. 기다립니다.
이렇게 절묘한 꽃말이 있을까. 이도는 홀린 듯 해바라기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차 안 가득 퍼진 꽃향기가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파이팅을 외치는 재영을 무서운 눈빛으로 돌아본 이도는 대문 앞에 섰다. 그리고 일부러 초인종을 눌렀다.
― 네. 누구세요?
효은의 목소리였다.
“나야.”
― 네. 잠깐만요.
감정 없는 짧은 대답이 날아왔다. 이도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 내가 짐이 있어서. 잠깐 좀 나와 봐.”
― ……짐이요?
“그래. 얼른.”
이도는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꽃다발을 등 뒤로 감추었다. 정원 끝에 서서 효은을 기다렸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런 짓도 하는 사람이었냐고 핀잔을 줄까. 아니면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용서해 주겠다며 환하게 웃어 줄까. 뭐든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게 풀렸으면 했다.
“짐은 어디 있어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박 비서는 급한 일 있었나 봐요, 오빠?”
그를 마중 나온 건 효은이 아니라 민아였다. 그녀의 시선이 곧 어색하게 뒷짐을 진 이도의 손으로 옮겨 갔다. 눈부신 해바라기가 그의 손안에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