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24화 (24/74)

24장. 마음의 소란

이불을 뒤집어쓴 효은은 답답한 마음에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샤워기 소리가 더 선명하게 그녀의 귓가에 빨려 들어왔다. 생각을 모두 집어삼킨 급작스런 키스는 곧장 다른 시작을 알렸다. 이도의 거친 손이 그녀의 잠옷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훑을 땐 온몸 끝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정신이 어질했다. 머릿속에서 저절로 빨간 경고등이 들어왔다.

효은은 가까스로 이성을 끌어모아 그를 밀어 냈다. 이도의 눈빛은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급했다. 그의 손을 내치며 거절하자 이도는 상처받은 눈이었다. 한참을 그녀만 내려다보던 그가 욕실로 향했다. 술 냄새 때문이라고 오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배려하려는 마음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그를 기다리는 고문 같은 시간이 그녀에게 주어질 줄은 몰랐다. 지금이라도 그만하자는 말을 건네야 했다. 뒤늦게라도 이성이 돌아왔으니 여기서 멈추는 게 맞았다. 그의 진심을 의심하며 모두의 앞에서 연극을 펼칠 자신이 없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효은이 견뎌야 하는 죄책감의 고통과 배신감의 무게도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만큼 욕심 또한 차올랐다. 그와의 입맞춤이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이용한다면. 그녀도 그를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어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녀가 품은 이 마음이 더 이상의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그에게 사랑해 달라고 원하면 안 될까.

갈피를 잡지 못한 생각으로 효은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눕자 곧장 물소리가 끊어지고 욕실 문이 열렸다. 침이 저절로 꿀꺽 삼켜졌다. 예고 없던 첫 키스에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만 버둥거리던 좀 전의 어수룩한 자신이 떠올랐다.

이도는 허공에서 떨고 있는 효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목에 감싸도록 만들었다. 그러곤 든든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발이 들리다시피 한 채로 그에게 기대 사나운 키스를 받아 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그의 입맞춤은 뜨거웠다. 혀가 입 안 곳곳을 휘젓고 다닐 때마다 먹먹하고 야릇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어지럽고 막막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몸 안에서 열꽃이 피어올라 그녀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든 것 같은 생경함이었다.

어떤 남자에게도 두근거림을 느껴 본 적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중학교 때 마주쳤던 까까머리 군인 아저씨가 유일했다. 넋 놓고 그를 바라보다 발을 헛디뎌 개울가에 빠져 버렸다. 놀라 허우적대는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린 건 그 남자였다. 화난 눈빛으로 그녀의 호흡을 살필 때는 본 적도 없는 엄마를 찾게 되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엄마. 나 어떡해.’

‘말해 봐.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머리가 어떻게 된 줄 알고 다그치는 그의 목소리가 달콤한 고백 같아 눈물이 났다. 그녀가 펑펑 눈물을 쏟자 그는 얼굴을 더 일그러뜨렸다. 기껏 물에서 구해 줬더니, 꼭 그가 잘못한 것처럼 몸을 밀치며 눈물부터 쏟는 여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첫 단추가 아주 단단히 잘못 꿰어져 버렸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버려서 눈물이 났다. 끝없는 서러움이 어디서 밀려오는지 알 길이 없어 그녀는 기절한 척 눈을 감아 버렸다.

그날부터 그와 같이 먹는 식사 자리도 피했다. 쪽팔림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말았다.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똑같은 포지션을 유지했다. 자신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남자가 미워지기도 했다. 이유가 없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을 느끼고, 열병을 앓았다. 그렇게 끙끙 앓고 나면 나을 줄 알았다. 그가 떠나기로 한 마지막 날. 효은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괜찮습니다. 쉬게 두세요.’

‘그래도, 이제 보면 또 언제 볼 줄 알고. 인사는 해야지.’

‘다시 만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런 남자였다. 그리워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도 잊었다. 잊으려고 노력했다. 더 멋진 사람을 품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다. 그 작은 스침이 뭐라고. 어설픈 마음의 소란쯤으로 여기며 추억으로 남기려 했다.

“……장효은.”

이도의 젖은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그가 쓰는 바디 워시 향이 시원한 공기와 함께 침대 위로 전해졌다. 추억은 무슨. 모든 게 또렷하고 생생했다. 효은은 억울했다. 왜 그에게만 가슴이 떨리는지. 왜 이렇게 모든 게 설레기만 하는지.

“누가 맘대로 키스하래요?”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고 그를 쏘아봤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사과할 맘 없는데.”

이도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마 아래로 내려온 젖은 머리가 그의 얼굴을 더 분위기 있게 만들었다. 잘생기면 다냐고.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당하기만 한 그가 미웠다. 이도는 당연한 것처럼 이불을 걷어 내 버렸다. 놀란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망설임 없이 그녀의 부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하지 마요.”

효은이 벗어나려 했다.

“아파?”

무턱대고 빨아 댔으니. 효은은 민망해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렸다.

“괘,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안 괜찮아.”

아, 정말. 그가 손을 거두지 않고 효은의 뺨으로 옮겨 갔다. 효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그가 또다시 웃었다. 심장이 민망함과 창피함으로 벌렁거렸다.

“술이나 깨고 이러시죠, 권 상무님.”

“취하지도 않았어.”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왜 마셨어요?”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닫히는 게 아닐 텐데. 하지만 효은은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여기서 더 이상은 나아가선 안 되는 거니까.

“네가 나 안 봐 줘서.”

하아……. 이젠 정말 항복이었다. 효은은 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단숨에 이도의 손에 붙잡혀 주저앉아 버렸다.

“놔줘요.”

“어디 가?”

“서재요.”

“거긴 왜?”

정말 몰라서 묻는 눈빛이었다. 효은은 그제야 이성이 찾아들었다.

“아저씨는 내 말이 우습죠? 아까 그만두자고 한 말 못 들었어요? 아님, 내가 그냥 투정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저씨는 날 진지하게 생각하긴 해요? 지금 내 마음이 어떨 것 같아요? 아이요? 그렇게 원할 땐 절대 안 되는 것처럼 굴더니, 내가 도망갈 것 같으니까 그제야 붙잡아요. 꼭 어장 안 물고기를 관리하는 것처럼.”

“……어장?”

그녀의 표현이 황당해 이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다 계속하라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효은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도 무서울 건 없었다.

“이제 아저씨가 하는 말, 믿지 않아요. 이랬다저랬다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거 지쳤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원해요. 쇼할 필요 없어요. 우리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네 눈엔 이게 쇼로 보여?”

되묻는 이도의 목소리가 낮았다. 가라앉은 눈빛이 어두웠다.

“쇼든 아니든 이제 관심 없다고요. 서로 상관하지 말고 살아요.”

효은은 단단히 이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이도도 같이 일어났다. 조용히 그녀의 손에 들린 베개를 뺏어 든 그가 한참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참…… 힘들게 해. 너. 나를.”

스타카토처럼 끊어 말한 이도가 돌아서 걸어갔다. 효은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억울함을 참아 냈다. 잘못한 것은 그인데 왜 그가 더 슬픈 얼굴인지. 주먹을 움켜쥐며 감정을 다스리는데 이도가 문 앞에서 돌아서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원하는 대로 다 할 테니까…….”

“…….”

“그러니까…… 그만둔다는 소리 좀 하지 마.”

* * *

스며들어 오는 빛에 정신을 차렸지만 이도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조용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슴이 또 먹먹하게 떨려 왔다. 요즘 들어 효은만 보면 나타나는 이상 증세였다. 심각한 병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증상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풀 죽은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지만 이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나면 가 버릴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은 마음이 그녀가 싫어하는 연극 놀이를 부추기고 말았다.

어젯밤, 어장이라는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쇼를 한다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만큼 신뢰를 주지 못한 듯해 저절로 반성하게 되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감정에 휘둘려 중심을 잡지 못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나 뒤늦게야 손을 붙잡았다. 그러한 뒤늦은 깨달음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효은은 지쳐 가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 그의 잘못이었다.

“……잠이 와요? 난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겠는데…….”

효은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도가 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놀란 효은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도가 간절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력할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네가 날 믿을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해 볼게.”

“…….”

효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 진심 같았다. 또 믿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아주 쉽게 뒤흔들었다.

“어디…… 어떻게 노력하는지 볼게요.”

당당히 받아치는 효은의 대답에 이도는 웃고 말았다. 민망해진 효은이 서재를 벗어나려는데 그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또 왜요?”

“노력하려면 네가 내 옆에 있어야지.”

이도는 노력이 아니라 고문을 하고 있었다.

“10분만 같이 있어.”

희망 고문. 그것은 지상 최대로 잔인하게 마음을 휘젓는 신종 괴롭힘이었다. 그가 효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러곤 만족한다는 듯 히죽 웃었다. 그를 보자 효은의 심장이 끝도 없이 두근거렸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그녀조차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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