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23화 (23/74)

23장. 뜨겁고 절박한

재영이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 이미 이도의 표정은 평상시와는 달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삐뚤어진 넥타이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눈을 돌려 이도의 앞을 바라보자 양주병이 바닥을 드러낸 채 말 없는 친구처럼 놓여 있었다.

효은의 퇴원 수속을 비서 재영에게 맡긴 후, 그는 일에만 집중했다. 프로젝트 팀원들은 일주일 동안 지옥 체험을 경험하듯 신사업의 진행 상황을 그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해야 했다. 빠른 시일 내로 결과물을 가져오라는 권 회장의 입김이 존재하긴 했지만 이도는 무언가를 잊으려는 것처럼 자신을 더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집요하고 악착같은 추진력은 결국 중국 측과의 계약을 일주일 만에 마무리 짓게 만들었다. 모두가 혀를 내둘렀지만, 우선은 해방됐다는 생각에 집으로 기어갈 때도 이도만은 회사에 남아 또 다른 일을 처리했다. 재영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선 서늘한 독기만 흘러내렸다. 그렇게 일이라도 붙잡아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고집 앞에선 더 이상의 참견은 무의미했다.

그리고 주말이었다. 휴일을 보내던 그에게 주소만 찍힌 이도의 문자가 날아왔다. 얼른 옷을 껴입고 달려와 보니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앉아, 선배.”

재영을 발견한 이도가 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정말 힘들 때가 아니면 ‘선배’라 부르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를 ‘선흥’에 입사시킬 때 이도는 앞으로 선배 대우는 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그는 당연히 수긍했다. 당시엔 모든 것이 절박했고, 손을 내밀어 준 이도가 고마웠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면서 재영의 집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에게 남겨진 빚과 가장의 무게는 스물여덟의 청년을 세상 앞에 무릎 꿇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학 졸업을 유예하면서까지 붙잡고 싶었던 건축가의 꿈은 그에게 사치였다. 억대의 빚 독촉을 받는 상황에서 4년제 대학의 졸업장은 무의미했다. 당장의 밥벌이를 위해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주야간으로 공장에서 교대 근무를 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숨 쉬며 당시를 버텼다. 하지만 빚은 줄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었다. 모든 걸.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걸어가는 그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이도였다.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였다는 공통점밖에 없는 사이였다. 당시에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녀석이었다. 그의 배경이 그랬고, 성격 역시 지금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그런 권이도가 도와 달라는 말로 재영을 붙들었다. 남은 빚은 선흥을 담보로 융통해 줬고, 대졸 신입사원이 절대 받을 수 없는 액수의 월급을 지급하며 그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과분한 대우에 대한 대가로 이도가 재영에게 원한 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곁에서 자신을 보필하며, 만약 알게 되더라도 비밀을 지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무조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7년.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이도의 비서로 지내며 재영은 모든 빚을 청산했고, 가정까지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재영은 이도가 그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했다. 그의 행복을 가로막는 아주 큰 비밀이 존재한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킬 사람은 자신이 되겠다고 다짐한 맹세를 여전히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걸 다 드신 겁니까?”

재영이 이도 앞에 놓인 술병을 치우며 조용히 꾸짖었다. 이도는 미안하다며 웃었다.

“취하지가 않아.”

“더 시킬까요?”

월요일인 내일 아침부터 처리할 업무가 산더미라는 비서다운 말은 건네지 않았다. 재영은 생각했었다. 그도 한 번쯤은 무너지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너무 옥죄기만 하는 이도가 잠시라도 쉬어 갈 수 있다면 재영은 기꺼이 모든 뒤처리를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급작스럽게 결정한 결혼이 될 줄은 몰랐지만.

“부부 싸움이라도 한 거야?”

그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재영이 물었으나 이도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처럼 녀석의 눈이 깊어졌다. 첫 만남부터 호락호락해 보이진 않았다. 천하의 얼음 왕자를 되돌아보게 만든 여자였다. 그 이후부터 이도의 가슴 한구석엔 늘 그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그걸 모를 수는 없었다.

“선배 딸이…… 몇 살이랬지?”

이도의 물음에 재영은 녀석 대신 들고 있던 술잔을 놓칠 뻔했다.

“두 달 전에 돌잔치 하라고 봉투 준 게 너였어.”

“……아.”

아이를 가질 생각인 것인가. 재영은 이도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결혼조차 철저히 거부하던 녀석이었다. 특히나 여자는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혹시나 다른 취향이거나, 무성욕자가 아닐까 하는 의미 없는 생각을 잠깐하기도 했었다.

그런 녀석이 아이라니. 재영은 어린 사모님이 더욱더 대단해 보였다.

“갑자기 비서 사생활에 관심 생긴 건 아닐 테고, 뭐가 궁금한 건데?”

“난…… 사실, 선배가 결혼할 줄은 몰랐어. 그렇게 일찍 아이를 가질 거라고도 상상 못 했고. 그래. 이제 와서 솔직해지자면…… 절벽 끝에 서 있는 선배라서 내 옆에 데려왔어. 모두 다 잃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서, 내 옆에 둘 수 있었거든.”

재영도 솔직한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왜 자신인지. 다 잃어 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말에 그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가져도 그것은 전부가 아니며, 결국엔 모두 무의미해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 걸까. 왜 이도가 그를 옆에 두고 있는지 이제야 조금은 이해됐다.

“지금도 욕심내지 않아.”

이도가 그의 말뜻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봤다.

“……흘러갈 뿐이지.”

“무책임하군.”

“그래도 노력하지. 살아 내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재영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났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낳으며 미련 따윈 없던 세상에 맞서 싸울 용기가 생겼고, 설사 모든 걸 잃는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행복하려고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했다.

“……내 보스는 흔들리지 말아야 하지만, 내 후배 권이도는 흔들렸으면 한다. 그게 사랑 때문이라면 더더욱.”

재영이 명쾌한 해답을 내놓은 것처럼 이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흔들리라고. 그게 무슨 답인가. 돌팔이라 생각하며 이도가 웃어 버렸다.

“괜찮겠어?”

대리 기사가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재영은 이도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이도는 멀쩡한 모습으로 그의 손을 털어 냈다.

“보스는 흔들리지 말라며?”

이도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재영은 말없이 웃어 주며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비서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푹 쉬십시오, 상무님.”

“내일 봅시다.”

이도는 간단히 손을 흔들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돌계단을 오르며 그는 생각했다. 흔들려 버리는 게 가능할까. 그는 언제나 그 뒤를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마지막엔 효은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시시한 놈. 자격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승재와 함께 있는 효은을 보면서도 다가가지 못했다. 그 사람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여자 앞에 식은 죽조차 내밀지 못했다.

결국 쓰레기통에 처박혔던 그의 진심이 정신을 환기시켰다. 여기서 그만두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요?”

독채로 올라선 이도는 계단 앞에서 효은과 마주쳤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헛된 희망이 뻔뻔하게 가슴속 불씨를 지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효은은 퇴원한 후 철저하게 그를 멀리했다.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잊고 싶어 발버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어떠한 감정의 빛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상대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무는 충실히 수행하는 그녀의 행동이 미칠 듯이 숨 막혀 이도는 술이라도 마셔야 했다.

“……할 말 있어요.”

그런 여자가 그를 기다린 이유. 하나밖에 없었다.

“난 더 이상, 연극 못 하겠어요. 내가 억지 부려서 한 결혼인 거 알아요. 그런데 아저씨 말 듣고 정신 차려 보니까 모든 게 다 후회돼요. 그냥…… 철없는 어린애한테 된통 당했다고 생각하고 말아 줘요. ……미안해요. 할아버지한테는 내가 솔직하게 말할…….”

“원하는 게 아이야?”

“…….”

효은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대답해. 아이면 되는 거냐고.”

이도의 다그침에 그녀의 눈이 상처로 가득 차 버렸다.

“……왜요? 그것도 이제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이도가 효은의 손목을 붙잡고 안방으로 이끌었다. 침실 옆에 그녀를 세워 두고 거칠게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짙고 검은 그의 눈동자가 올곧게 그녀에게로 고정됐다.

효은은 눈빛만으로도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수치스러웠다. 이런 관계를 원한 건 아니었다.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이란 생각이 들었다. 욕심. 그 두 글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술 먹고 이러는 거라면, 그만둬요.”

싸늘한 목소리가 숨 막히는 침묵을 갈랐다.

“……왜? 건강한 정자가 필요해?”

상체를 드러낸 이도가 성난 눈빛으로 다가섰다. 효은의 눈가엔 결국 눈물이 맺혔다. 하도 깨물어 입술엔 잇자국이 선명했다. 그가 이렇게 해서라도 결혼을 유지하려는 이유. 그녀를 붙잡아야 하는 그 조건 따위를 차라리 몰랐으면 했다.

“……나랑 왜 결혼했어요?”

결국엔 멍청한 물음이 터져 나왔다. 진실을 듣는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을까. 그래도 한 번은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지금은 다르다는, 그저 네가 필요하다는 거짓말이라도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계속 생각나서.”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도가 대답했다. 그는 어느새 애틋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심장이 저릿하게 떨려 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도의 손이 천천히 효은의 입술을 매만졌다.

“요즘도…… 그래. 온통 네 생각뿐이야.”

효은은 차라리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눈물이 흘러나와 얼굴을 적셨다. 이게 고백이었다면.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면. 모든 건 가설일 뿐이었다. 끝까지 날 가지고 놀 생각이냐고 따지기 전에 입술이 그에게 삼켜졌다. 뜨겁고 절박한 키스였다. 바보처럼 모든 걸 믿고 싶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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