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그 사람을 몰랐으면 좋겠어
눈을 떴을 땐 낯선 창가가 흐리게 다가왔다. 머리가 흔들리고 온몸이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효은이 팔을 들자 무언가 걸리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것이 링거 줄이라는 걸 뒤쪽에서 날아온 단단한 경고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누워 있어.”
등 뒤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효은은 다시 눈을 감았다.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되었다. 이곳은 병원인 것 같았다.
어젯밤부터 복통이 조금씩 있었지만 진통제를 먹으면 진정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를 다시 마주하자 단단하게 굳었던 위가 돌덩이처럼 변해 버렸다. 경험한 적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맡은 임무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뒤따라 2층으로 올라간 이후로는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쓰러졌던 걸까. 그런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은 이도인 것 같았다. 왜. 왜 이렇게 그녀를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쁜 놈이 되려면 그것만 하면 되지 않는가. 나쁘다가도 이리도 다정하게 굴면 어쩌란 말인가. 그녀가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그의 태도에 효은은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이 결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운운할 테니까.
“난 괜찮으니까 출근해요.”
창가 옆에 걸린 시계는 이미 정오를 넘어 있었다.
“오늘은 옆에 있을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 말을 끝으로 서류 넘어가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렸다.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 남자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넥타이를 맨 채 매일 전쟁터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그가 자리를 비우면 회사는 어찌 될까. 큰 병도 아니고, 겨우 위경련을 일으킨 것 때문에 아내를 간호하겠다는 회사 대표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도를 믿고 권 영감이 회장 자리에 앉힐 리도 없었다.
“원래 자주 이랬어요. 입원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링거 맞고 나면 괜찮아지니까 아저씨는…….”
“이제 내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아?”
효은은 등 뒤에서 들리는 서운한 목소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 안쪽이 욱신거리듯 아팠다. 정말 사람을 못 살게 굴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조심히 일어나 앉자 와이셔츠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이도가 보였다.
“옷은…… 왜 그래요?”
“이게 중요해? 네 상태가 어떤지부터 물어봐야지.”
이도가 또 혼을 내듯 그녀를 다그쳤다.
“어때요? 심각하대요?”
효은이 포기하듯 힘없이 되물었다.
“며칠 쉬면 괜찮을 거야.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 아프면 바로 말하고. 혼자 끙끙대면 너만 손해야. 왜 바보 같이 병을 키워?”
“이렇게 1인실에 누워 보려고 그랬나 보죠, 뭐.”
효은이 그를 바라보며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이도는 이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얼굴 위로 작은 웃음을 띠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물이라도 건네려는데 효은이 기어이 고집스런 말을 꺼냈다.
“일어났으니 퇴원할게요. 할아버지 기다려요.”
무슨 마음인지 안다. 하지만 이도는 이기적이게도 지금은 효은의 건강이 더 소중했다.
“내일까지만 있어. 할아버님한테는 내가 대충 핑계 만들어서…….”
“무슨 큰 병이라고 누워 있어요. 할아버지한테 미안해서 못 해요. 지금도 충분해요. 이것까지만 맞고 일어날 테니까 아저씨도 얼른 출근…….”
“지금 너, 아프다고 전화드릴까?”
눈을 맞춘 이도가 결국엔 마지막 방법을 썼다. 효은은 그의 야속한 협박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가 무엇에 약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할아버지한테 말 안 한다고 약속해 줘요. 그리고 다른 사람 불러 주세요. 아저씨가 옆에 있는 거 불편해요. 더 아프게 만들 생각은 아니죠?”
핑계는 잔인했다.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은 없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이도 자신이었다. 그는 효은을 내려다보다 포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 여사님께 부탁드릴게.”
“아뇨. 친구 부르면 돼요.”
친구. 한승재를 말하는 거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솟구쳤지만 이도는 끝내 말을 뱉지 못했다. 지금 그 녀석이 옆에 있어야 이 병이 나을 것 같다는 말까지 듣고 싶진 않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
효은이 그제야 안심하듯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부탁 좀 하겠습니다.”
연락을 받고 뛰어온 승재에게 이도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얼른 출근하세요.”
승재는 그의 전화를 받고 놀라 달라올 수밖에 없었다. ‘효은이가 아픕니다.’ 그 한 문장에 심장이 내려앉았고, ‘그쪽의 간호를 원한다’는 말에는 이도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아내가 아프다는데, 그녀의 친한 남자 친구에게 간호를 부탁하는 남편. 누구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승재는 곧 이해했다.
‘가짜 남편 해 주겠대.’
그는 효은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이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가. 이기적이게도 희망이 솟아오르고 말았다. 정말 그렇다면 이미 그에게 마음이 가 있는 효은은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일까. 지금 그녀의 속병이 만약 이 남자 때문이라면, 승재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집부려도 당장 퇴원은 안 됩니다. 퇴근하고 올 때까지만 지켜봐 주세요. 혹시라도 그 전에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도는 마지막까지 신신당부를 하고 대기하던 비서와 함께 사라졌다. 그의 흐트러진 와이셔츠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승재는 잠깐의 희망이 헛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의 마음이 일방통행은 아닐 것이란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걸 눈치챈 자신이 불쌍해 웃음 지을 수 없었다.
“진작 고치라는 내 말 안 듣더니.”
병실 안으로 들어선 승재는 창가에 서 있는 효은에게로 다가갔다. 환자복을 입고 링거를 꽂은 효은의 모습을 보는 건 그녀가 맹장염에 걸렸던 고등학교 3학년 이후 처음이었다.
그날은 만우절이었다. 모두가 거짓말로 서로의 진심을 시험하던 때였다. 하루 종일 효은의 장난에 시달리던 승재는 야자 시간 효은이 배를 움켜쥐고 아프다는 말을 했을 때 믿지 않았다.
아픈 그녀의 얼굴에 대고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결국 효은이 정신을 잃고 책상 아래로 쓰러졌을 때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앞으로 평생 동안 그녀의 말을 믿고 따라 주겠다고 결심했다. 쓰러진 효은을 업고 5층 계단을 뛰어 내려가 양호실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지옥 같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 이후, 그녀가 아픈 건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다행히 그의 마음을 눈치챈 것처럼 효은은 크게 아프지 않고 잘 지냈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신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승재는 감사했다. 효은이 아픈 건 그가 아픈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미안해. 부를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 효은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무슨 일인데?”
“……위경련.”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 네 맘속에 있는 병.”
핵심을 날카롭게 파고든 승재의 질문에 효은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다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었다. 감정이 터지듯 흘러나와 버렸다.
효은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승재는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녀를 조용히 안아 주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옆을 지키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상무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보던 이도가 팀장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4분기 자료는 이미 요청해 둔 상태입니다. 덧붙일 게 있으시면 지금 말씀…….”
“아뇨. 송 팀장이 알아서 처리하는 걸로 합시다. 그럼.”
이도가 얼른 서류에 사인을 하고 팀장을 내보냈다. 병원에서 회사로 돌아온 후 숨도 쉬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 박 비서가 그를 위해 도시락을 챙겨 두고 갔지만 도시락이 담긴 봉투는 여전히 응접 테이블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도는 다시 핸드폰을 붙잡고 그 남자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효은을 그에게 맡긴 것부터 겁 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절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지 않을 것이란 어이없는 자신감. 10년 넘게 그녀의 곁을 지킨 친구보다 그가 더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일 것이란 자만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이도는 결국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업무를 뒤로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 지금 그의 감정을 효은에게 털어놓아야 했다. 그녀가 더 아프지 않게. 그녀가 그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하기 전에. 이도의 마음이 바빴다.
* * *
“……꼭 먹어야겠어?”
“응. 나, 괜찮다니까. 이거 먹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서 그래.”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은 효은이 아이같이 웃었다. 승재는 어쩔 수 없이 사 온 햄버거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위경련이라는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면서도 효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만 좀 울라’고 그가 애원하자 효은이 다짜고짜 햄버거를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엉뚱하고 막무가내인 장효은으로 돌아온 것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행동이 위험해 보였다. 두 사람은 병원 분수 앞에 앉아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럼 한 입만 먹고 나 줘. 다시 탈 나면 내가 어떻게 그 사, ……네 남편을 봐?”
“이 쫄보. 너까지 그 사람 눈치 볼래?”
“나 갈까? 전화해서 그 사람 다시 오라고 해?”
승재가 엉덩이를 드는 척했다.
“알았어! 한 입만! 딱 한 입 먹을게.”
효은은 얼른 승재의 손에서 햄버거를 뺏어 왔다. 최대한 크게 입을 벌리고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문 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남은 조각을 승재에게 건넸다. 입 안에 탄수화물이 들어가자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행복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너무 절박해서, 너한테까지 결혼하잔 헛소리를 한 그때가 생각나네.”
효은은 분수 가운데를 멍하니 바라보며 예전을 떠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네 배 속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건 나라는 걸 기억해라.”
승재가 유세하듯 으스대며 농담을 건넸다.
“그래. 그때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바보 같고.”
“……자학은 넣어 두고.”
“승재야.”
“왜?”
“돌아가고 싶어. 그때로.”
“…….”
“그 사람을 몰랐으면 좋겠어.”
효은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를 처음 만났던 중학교 시절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녀는 언젠가 그 남자를 만나고, 또 마음에 품는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그게 사랑이라는 걸 아프게 알아 가는 중이었다.
“나를 모르는 건 어때? 지금부터.”
“죽을래?”
효은이 승재를 노려봤다. 승재는 얄미운 웃음을 내놓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얇은 카디건의 매무새를 정리해 준 뒤 링거 거치대를 끌며 앞서갔다. 모든 게 익숙한 한 박자였다. 그가 효은의 남편이라 해도 수긍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도는 분수대 뒤쪽에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멍청한 웃음이 흘렀다. 그의 손에는 주인을 놓친 죽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