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가슴에 갇힌 진심
“무슨…… 뜻인 줄 알고, 말하는 거야?”
이도는 웃어 버렸다. 진지할 수가 없었다. 입꼬리는 올라섰지만 눈동자는 더없이 차가웠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그가 효은에게로 다가섰다.
“할아버지가 원해요.”
“고모님 만난 거 알아.”
핑계 따윈 필요 없다며 그는 되돌릴 기회를 주었다.
“그럼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알겠네요.”
효은은 흔들리지 않았다. 기회는 이때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가 알아서 해. 너한테 그런 부담 지울 생각…….”
“아저씨가 뭘 어떻게 해결하는데요? 고모님을 해결하고 나면 할아버님은 어떻게 할 건데요? 결혼하면 거기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한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을 것 같아요. 결혼도 쉬웠는데 아이는 어때서요? 내가 낳은 아이 보면서 할아버지가 더 오래 사셨으면 해요. 나한테 그게 중요해요.”
이도는 도저히 효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는 사람은 너야. 너는……? 네 생각 따윈 없어?”
“나만 생각했으면 이 결혼도 안 했어요.”
결국엔 그가 예상한 답이었다. 이럴 줄 몰랐나. 무슨 대답을 원한 걸까. 그가 바라는 답을 말한다고 해도 들어줄 수 없다고 못 박은 사람이 그였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욕심났다.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여자를 남자로서 품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 더 안 돼. 이게 소꿉장난인 줄 알아? 이런 걸 정말 할아버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꼭 너여야만 하는.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소중한 축복으로 태어나지 못한 굴레. 아비를 속여 가며 자신의 잇속을 채운 어미에게 속 시원히 원망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대물림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밝혀질 껍데기 인생 앞에서 어떤 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도 싫었다. 아이는 더더욱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내 인생이에요. 걱정해 주는 척하지 마요.”
효은은 그의 가식을 비웃으며 경고했다.
“왜요? 이 부탁은 못 들어주겠어요? 이런 연극까지 할 생각은 못 하겠어요? 아저씨가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면 나한테 이 결혼은 의미가 없어요. 다른 방법을 찾을 거예요.”
효은이 냉정하게 의사를 전했다. 이도는 헛웃음을 내놓고 그녀를 코너로 몰았다. 막다른 벽에 갇힌 효은은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똑바로 올려다본 그의 눈동자 안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무슨 뜻이야?”
“결혼도, 아이도 쉬운데, 이혼이 어렵겠어요?”
하. 이도에게서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우리 계약이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 네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대로 무르고, 없던 일로 해 버릴 만큼 네 눈엔 내가 우스워?”
화가 난 이도는 더 차분하고 냉정해졌다. 눈가에선 얼음 같은 냉기가 가득 흘렀다.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없었다. 효은은 그게 가슴 아프고 두려웠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과 그에 대한 배신감이 그녀를 더욱 오기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원하는 건, 다 하고 싶어요. 그게 어때서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어디까지 가 보나 시험하듯 이도가 낮게 물었다.
“내가 키워요. 책임져 달라고 말 안 해요.”
어리고 어렸다. 그게 아이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른단 말인가. 차라리 날 사랑한다고, 당신이 첫사랑이라고 고백했다면. 이도는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결말은 아니어야 했다.
“그래…….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면.”
이도가 자세를 바꾸고 넥타이를 완전히 풀었다.
“뭐부터 해야 하는지는 알아?”
효은은 수치심에 입술을 떨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다른 건 의미가 없을 테니까.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녀가 받아쳤다.
“옷부터 벗을까요?”
“아니.”
이도가 가볍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 아래가 너한테 반응하는지부터 봐야지.”
더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이라면, 이도는 효은이 포기하길 바랐다. 나쁜 놈이 되는 건 쉬웠다. 세상이, 인생이, 소꿉놀이가 아니라는 걸 잔인한 방법으로라도 가르쳐 줘야 했다.
“……그렇군요. 그게 중요한 건데. 몰랐네요, 내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던 효은의 눈가엔 끝내 눈물이 맺혔다. 정신을 차린 이도가 그녀에게 다가섰지만 차갑게 내쳐졌다.
“건드리지…… 마요.”
효은이 날카롭게 읊조리며 돌아섰다. 선을 넘어 버렸다. 오만했다. 이도는 그녀를 붙잡을 기회마저 놓쳐 버리고 말았다. 꽃 같은 여자. 효은은 그에게 그런 여자였다. 가까이하면 꺾일까 싶어 아끼고 아끼며 다가서지 못한 채 감춰 둔 마음이었다. 이런 게 사랑이란 것이었나. 이도는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갇힌 진심은 결국 그로 인해 더 깊게 가라앉아 버렸다.
* * *
“들자.”
권 영감의 한마디로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식탁 위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며칠 동안 비워져 있던 이도의 의자에 모처럼 당사자가 앉게 되었으니 강 여사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효은은 새벽부터 1층으로 내려가 강 여사를 도왔다. 서재에서 남은 업무를 처리하다 밤을 지새운 이도는 아침 밥상에 앉고서야 효은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효은을 충분히 이해했다.
“같이 드세요.”
효은이 물러나려는 강 여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가 없을 땐 늘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이도가 등장했다고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래.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뭐 있어.”
권 영감은 효은의 말에 힘을 실었다. 언제부터고 그리했어야 할 일이었다. 늘 시커먼 남자 둘이 앉아 먹는 밥이 맛있을 리 없었다. 까다로운 이도가 항상 강 여사에게 거리를 두었기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그들만의 방식일 뿐이었다. 이제 새 식구를 맞았으니 변해야 하는 게 맞았다.
“앉으세요.”
이도는 간단한 문제였던 것처럼 강 여사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벽을 친 데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방인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집안을 이끌 집사로만 여기는 게 편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게 되면 매달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그는 더 냉정해졌고,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럼, 오늘만…… 같이 먹도록 할게요.”
강 여사는 효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어린 사모님의 눈빛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표정을 감추는 게 쉽지 않을 나이였다.
효은은 항상 웃고 있는 밝은 사람이었다. 고운 심성으로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을 단번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우려 했으며, 포기하지 않고 끝내 완성해 냈다. 그리고 나쁜 규칙들을 없애기 위해서 권 영감에게도 가감 없이 반론을 제기했다.
효은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무상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늘 서재에 앉아 자신만의 시간에 갇혀 있던 노인은 효은이 건강을 챙길 것을 강요하자 하루에 잠깐이라도 정원을 걸었다. 그때 옆을 지키며 말동무가 되어 준 사람은 당연히 효은이었다.
사랑스러운 여자. 모두들 효은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런 보석 같은 여인을 옆에 두고도 몰라보는 남자. 강 여사의 시선이 이도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지 그녀도 추측만 할 뿐이었다. 권 영감은 그저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은 듯 보였고, 그 뜻에는 그녀도 동의했다. 하지만 효은이 힘들거나 괴로워할 때면 아무리 정을 쌓은 도련님이라고 해도 이도가 미워 보였다.
며칠 동안 효은을 독수공방시켰을 때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전화를 걸어 보기도 했다. 어설픈 참견과 주책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안타까웠다. 이도도, 효은도 행복했으면 했다. 서로에게 위로받고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것이 제대로 된 인생이라는 걸, 그녀는 오직 하나의 해답을 통해 깨닫고 있었다.
“……신사업은 어디쯤 진행되고 있어?”
어색한 식탁을 분위기를 깨고 권 영감이 입을 열었다. 이도는 곧장 대답했다.
“이달 말까지 계약 마무리하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중국 놈들 어떤지 네가 더 잘 알 거다. 마지막까지 긴장 늦추지 말고.”
이도는 몇 마디를 더 얹어 권 영감을 안심시키는 중에도 시선은 효은에게로 가 있었다. 그녀는 의미 없는 젓가락질만 반복하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새아가는 왜 밥 먹는 게 신통치 않아?”
권 영감이 뒤늦게 눈치채고 화제를 돌렸다.
“아…… 더워서 그런가 봐요.”
효은이 변명하듯 말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안 그래도 내가 장 기사한테 말 넣어 두었다. 이제 병원 다닐 때 내 차 이용해라. 이 더위에 버스를 타고 다니니 탈이 안 날까. 넌 제대로 챙기지 않고 뭐 한 게야?”
권 영감의 시선이 곧장 이도에게로 향했다. 그를 탓하자 효은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가 버스가 편해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효은은 평소처럼 밝게 웃었지만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이도는 결국 자신이 먼저 수저를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각나서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도가 권 영감에게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효은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뒤따라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드레스 룸으로 향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도가 불쑥 계단 끝에 나타났다.
“고개 들어 봐.”
그의 큰 손이 그녀의 아마에 얹어졌다.
“괜찮아요…….”
효은이 그의 손을 밀어 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뭐가 괜찮은 거지? 지금 네 얼굴을 보여 줘야 알아?”
화를 내는 이도가 미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상관하지 말아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장효은.”
“머리 아파요. ……부르지 마요.”
결국 효은이 배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이도는 다급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를 안고 뛰면서 그는 모든 것을 후회했다.
네게 가짜 따위를 운운해서.
너무 쉽게 상처를 줘서.
너를 마음에 품었다고 먼저 말하지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