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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남편-20화 (20/74)

0장. 다 들어줄 테니까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제야 명함만 내려다보던 효은의 눈동자가 앞을 바라봤다. 병원 안쪽의 작은 연못에선 일정한 시간에 맞춰 분수가 솟아올랐다. 이곳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오르내리는 물줄기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이곳을 찾아왔는데, 이상하게도 고민의 무게가 점점 더 커져 가기만 했다.

‘새 식구가 빨리 늘면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그의 아이. 결혼 전에는 진지하게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잠자리도 없는 가짜 결혼에서 임신은 가장 먼저 제외되어야 할 금지 사항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이도도 뜻을 같이할 것이다. 그 남자는 그녀의 부탁 때문에 힘겹게 이 결혼을 결정한 사람이었으니까.

영란의 무례한 참견은 시댁의 지나친 관심으로 치부하면 그뿐이었다. 심각하게 생각하고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효은은 자꾸만 주머니 속 명함이 신경 쓰였다. 그것을 자꾸만 꺼내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말았다.

‘뭘 원하는 거야. 뭘 어쩌겠다는 거야.’

욕심은 끝이 없었고,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도 멈출 수가 없었으며, 지금 그녀에게 미래는 중요치 않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것이란 이유는 핑계일 뿐이었다. 결혼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결혼이 진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연극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아이까지. 그녀의 철저한 이기심이었다.

하지만 가족이 필요했다. 가족이 있었으면 했다. 할아버지가 떠나고 나면, 그녀는 혼자가 될 테니까.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영원한 내 편을 만들면 안 되는 걸까. 아이라도 옆에 있다면, 이 두려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철없는 생각이 끝없이 꼬리를 물었다.

여기서 그만해야 했다. 효은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도 충분하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더는 안 된다는 게 현실이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는 남자였다. 효은은 영란이 건넨 명함을 연못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곤 자리를 떴다.

“……그 주식 때문이었군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이 잘 살면 그만이야.”

“효은일 이용만 하고 헤어지면요? 그게 조건이었다면서요? 사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냉정한지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그 주식 받기 전이니, 쇼라도 하겠죠. 더군다나 권 회장 손자 아닙니까?”

“내가 믿는 건 권 회장이 아니라 권이도야.”

처음엔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효은은 병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할아버지 태호와 김 교수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들으며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서 있었다.

주식.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그 조건 때문이었단 말인가. 효은은 커다란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렇게 거부하던 결혼을 제 발로 찾아와 허락했다. 이유를 물으니 너라면 감정 없이 헤어져 줄 것 같다는 잔인한 말을 건넸다. 모든 아귀가 들어맞았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원하는 주식을 얻게 될 것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면 그녀와 계약을 끝낼 것이다. 지긋지긋한 세력 싸움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 그것이었다. 멍청했다. 바보 같았다. 그런 남자를. 그런 남자에게 마음을 준 그녀의 진심이 송두리째 짓밟혀진 기분이었다. 효은은 잇새를 깨물었다. 심장이 저려 와 눈물이 멋대로 치솟았다. 울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좋아해 줄 가능성조차 없는 남자 따윈 이제 잊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리 없었다. 나쁜 사람. 잔인한 인간. 이미 모든 걸 줘 버렸는데. 어쩌라고. 그를 싫어할 수도 없는, 효은은 서러워 울 수밖에 없었다.

* * *

“중국 쪽 자료는 더 없습니까?”

취합한 보고서를 내려다보던 이도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네. 아직 구체화되기 전 단계이기도 하고. 중국 특성상 시간 끌기 중이라. 지금이라도 좀 더 받아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로젝트 팀장이 얼른 핸드폰을 손에 집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의 대답에 릴레이 야근으로 지쳐 있던 직원들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며칠째 이어져 온 기약 없는 회의였다. 권이도 상무가 하나에 꽂히면 독종처럼 파고드는 스타일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느끼는 것은 또 달랐다. 마치 그에게만 체력이 보충되는 것처럼, 이도는 지치지도 않고 프로젝트 사업을 초고속으로 진행시켰다. 얼마 전 결혼식을 올린 새신랑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그가 어쩐 일로 스톱을 외쳤다. 당연히 오늘도 퇴근은 희망 사항일 뿐이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있었던 프로젝트 팀원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얼른 자료들을 챙겼다. 이도는 그들의 반응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지금쯤 나서면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확, 좋아해 버릴 것이라 말한 당돌한 아내는 직원들의 릴레이 야근을 멈추게 만든 감춰진 구세주였다.

“상무님! 오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복도로 나서던 이도는 그를 멈춰 세운 한 여자를 돌아봤다. 민아는 마치 그를 만나러 온 것처럼 다행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엇갈릴 뻔했네요.”

“무슨 일이야?”

이도는 다시 시계를 내려다봤다. 효은에게 퇴근을 알리는 문자를 보냈지만 아직 답장은 없었다. 오늘은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며칠 동안 그녀를 본가에 홀로 지내게 만든 미안함이 바닷가를 다녀온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회의 시작 전부터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집안일인데, 잠깐 얘기할 수 있어요?”

무슨 얘기일지는 뻔했다. 이도는 시계를 한 번 더 내려다보며 돌아서려 했다.

“나중에. 오늘은 급하게 들어가 봐야…….”

“이모님이 새언니 할아버님을 만나러 갔어요.”

이도의 고개가 다시 민아에게로 돌려졌다.

* * *

“서두르셨던 아니었습니까?”

본가 앞에 도착했지만 이도에게선 기척이 없었다. 박 비서가 뒤를 돌아보자 그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일까. 그럴 만도 했다. 연이은 야근과 회의에 수면 시간을 극도로 줄인 상태였다.

그저 그의 옆을 지키는 비서인 자신도 방전 상태인데 당사자인 제 보스가 멀쩡한 게 더 의아한 일이었다. 신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거기다 갑작스런 결혼으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더 많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재영은 조용히 차의 시동을 끄고 이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홀로 차 안에 남게 된 이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피로가 쌓인 그의 눈동자가 더욱 짙게 가라앉았다.

‘다짜고짜 아들부터 낳으라니. 그러면서 산부인과 명함을 내미는데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어요. 그게 여자한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오빠는 모를 거예요. 더군다나 새언니…… 할아버님 일로 많이 힘들 텐데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하소연할 친정 식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제가 상황은 잘 정리했어요. 그러니까 오빠가 잘 다독여 줘요.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신사업 때문에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 없잖아요.’

민아의 말을 듣고 이도는 당장 영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하지만 통화 버튼은 쉽게 눌러지지 않았다. 그게 영란이 바라는 일일 테니까. 그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효은을 흔들겠지. 그렇게 되면 죄 없는 그녀가 마음을 다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미칠 것 같았다.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뻔뻔한 경고가 이리도 그를 고통 속에 몰아넣을 줄이야. 허무한 웃음만 흘렀다. 그저 지금은 효은을 위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도는 정신을 차리고 차를 빠져나왔다.

“이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그의 퇴근을 맞은 건 강 여사뿐이었다. 이도는 부엌 쪽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그가 찾는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 방에 있을 거야. 오늘 병원 다녀오고부터 표정이 어둡더라고. 혹시나 할아버님 상태가 안 좋은지 걱정이 돼서 전화하려고 했더니, 다행히 권 상무가 일찍 들어와 줬네. 얼른 올라가 봐.”

이도는 짤막하게 인사를 남기고 곧장 독채로 올라갔다. 열린 방문 사이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효은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래. 너밖에 없어. 내가 기댈 사람이 누가 있어. 야, 한승재. 이러기야? ……아니. ……알았어. 그럼 내일 최신버거 사 와. 응. 끊어.”

이도는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입가엔 허무한 웃음이 흘렀다. 너밖에 없어. 오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슴에선 질투심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가장 의지하는 친구라고 정의 내린 남자가 이렇게 그에게 패배감을 맛보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 왔어요?”

문을 나서던 효은이 이도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앞치마를 들고 지나치려는 그녀의 팔을 이도가 단번에 붙잡았다.

“어디 가?”

효은이 그제야 그를 올려다봤다.

“저녁 준비 도와 드려야죠.”

“전화했는데.”

이도는 자신이 유치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못 봤어요.”

“힘들면 나한테 풀어.”

밑도 끝도 없이 이도가 말을 건넸다. 효은이 그의 끈질긴 시선을 외면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없어요.”

“장효은.”

화가 난 듯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효은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보고 뭘 어쩌라고요? 아저씨는 아무것도 해 줄 생각이 없다면서요. 왜 그래요? 왜 다 하라고 해요? 하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다…… 사람이 어떻게…… 아니, 됐어요. 아니에요. 어른들 기다리세요.”

이미 효은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 이도는 그녀를 이렇게 내려보낼 수 없었다. 서운함이든, 억울함이든, 괴로움이든, 그게 뭐든, 모두 그에게만 쏟아 내기를 바랐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다 들어줄 테니까.”

그녀의 팔을 움켜쥔 이도가 오히려 사정했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요?”

효은이 비웃듯 웃었다.

“뭐든.”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효은은 표정을 지운 채 말했다.

“아이…… 갖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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