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골치 아픈 일
“앞으로 다신 그러지 마.”
그에게 무섭게 날렸던 경고는 부메랑처럼 다시 그녀에게 날아왔다. 효은은 병원으로 찾아온 승재에게 할 말이 없었다. 왜 거기를 찾아가서는. 그를 탓하기엔 그날 밤, 그녀의 잘못이 너무 컸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
“미안. 이제 안 그럴 거야.”
승재는 효은이 곧장 반성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도가 가게에 다녀간 후, 그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효은에게 쉽사리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는 해결이 되었는지. 예전이었다면 편하게 물었을 말들을 입 밖으로 뱉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며칠 만에 병원으로 찾아가 효은과 마주 앉았지만 가슴속에 담긴 질문은 이번에도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할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셔?”
물음은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아주아주 많이 좋아지셨어. 이번 항암 효과가 크대. 결혼한 게 이렇게 크게 도움이 될지 몰랐어.”
효은은 신이 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밝게 웃어 보였다. 모두가 원하던 바였다. 그게 정말 효과로 나타나자 승재도 덧붙일 말이 없었다. 만약 그가 그때 효은을 말렸더라면. 그 결혼의 상대가 권이도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지금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멍청한 물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앞으로 더 좋아지시겠지. 그래야 되는 거고.”
“어, 그래야지. 그래서 나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거, 뭐든지 할 거야.”
그녀의 이 절박함을 치기 어린 순간의 감정으로 생각했던 승재는 뒤늦게 미안함이 들었다.
“더 할 게 남았어? 잘 사는 모습 보여 드리면 된 거지.”
“응. 결혼해 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아. 그 사람도 할아버지한테 잘하고, 부담 주는 일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는 거.”
“너는?”
결국 묻고 말았다. 네 행복은 중요하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승재는 효은이 외면하고 있는 마음 어딘가를 깊숙이 찔렀다. 효은은 그저 흐리게 웃었다.
“나까지 생각할 여유 없어. 지금도 항상 미안해. 좋은 곳에 갈 때나, 좋은 음식 먹을 때나, 할아버지 생각만 나. 나만 행복한 거 같아서.”
“효은아.”
그런 죄책감은 가질 필요가 없다고 위로해도 소용없었다. 만약 상황이 바뀌었다면 할아버지 태호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효은은 지금으로 만족했다. 더 욕심부리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난 지금도, 충분해.”
효은이 오히려 승재를 안심시켰다.
“……친구? 할아버지 병원까지 왔다 갈 정도면 친한가 봐?”
승재를 배웅하고 돌아선 길이었다. 효은은 예상치 못한 인물, 두 명을 병원 로비에서 마주해야 했다. 영란은 여전히 삐딱한 눈빛으로 효은을 훑어 내렸다. 작은 흠집 하나라도 발견하고 말겠다는 것처럼 눈동자 안에는 무서운 독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런 영란의 뒤에서,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여인은 이도의 사촌 여동생 민아였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있는 영란의 딸이 아니라 큰고모 선영의 입양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둘의 조합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효은은 그것을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분명 그녀의 사정을 알고 찾아온 것일 테다. 하지만 효은은 모른 척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까지 감당해야 하는 게 그의 진짜 아내 자리인 걸까. 그래서 이도는 그토록 효은과 이 집안사람들이 엮이지 않길 바라며 화를 냈던 걸까. 효은은 조금씩 그의 냉정한 배려를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님이 아프시다며? 남도 아니고 사돈 사인데 모른 척할 수가 있어야지. 우리 집안에서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네 남편만 봐도 알겠지만 다들 뼛속까지 이기적인 유전자라, 자기 말고 다른 사람 일에는 관심이 없거든. 조카며느님이 이해 좀 해 줘.”
극존칭까지 써 가며 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가 뭘까. 효은은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다. 재벌가의 세력 다툼. 그런 것은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 현실로 닥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도의 배경을 계산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붙잡은 결혼이었다. 당연히 감당도, 후회도 그녀의 몫이었다.
“아니에요. 걱정 끼쳐 드리는 것 같아 제가 더 죄송합니다.”
효은이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영란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만 달싹거렸다. 만만치가 않은 상대라는 것은 지난번 가족 식사 자리에서 이미 느꼈다. 어리다고 쉽게 여겼던 생각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런 여자니 권 영감이 권이도 옆에 붙여 두는 것이겠지만 사람이란 틈이 있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남자와 여자가 아닌가. 감정이 섞이면 이성적인 행동이 죄가 될 때가 있는 법이었다.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든, 정상적인 부부처럼 연극을 하든,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는 승산이 있었다.
“괜찮으시면 할아버님 뵙고 인사를 드렸으면 하는데.”
영란은 오늘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어쩌죠? 지금 집중 치료 기간이라서. 오늘은 조용히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에요.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 효은은 차분히 설명했다. 영란은 되바라진 효은의 대처에 할 말을 잃고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등 뒤에 권이도란 든든한 배가 있다 이것인가. 그들의 항해가 무사히 종착하려면 우선 자신부터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영란은 산뜻하게 웃으며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조카며느님이랑 커피 한잔할까? 우리 집안의 앞날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좋겠는데. 어때?”
효은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부모 일찍 보내고 외롭게 자란 애야.”
영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놀란 건 효은뿐만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잠시 그녀의 비서 노릇을 하던 민아 역시 배 속에서 구역질이 일었다. 영란이 뻔뻔하게 철판을 까는 모습이야 지겹도록 봐 왔지만 오늘은 모른 척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이 집안에서 가장 속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영란이었다. 그래서 쉬웠다. 한편으론 그녀의 올곧은 무시가 감사했다. 가식적인 동정 따윈 없었으니까. 이해하는 척 같잖은 위로 따위 건네지 않았으니까.
그런 영란이 지금 이도의 어설픈 부모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선영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자리였다. 굳이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영란이 알아서 판을 뒤집어 놓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녀는 잠시 구경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도는 그녀에게 약속한 것처럼 일에만 몰두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전달받았다. 그 모습이야말로 두 사람의 사이를 대변해 준다고 여겼다.
민아는 자신과 처지가 다를 바 없는 어린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가 감내해야 할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면 떠나라고 충고해 주고 싶었다. 무슨 조건을 붙여 권이도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껍데기 같은 아내 노릇은 집어치우라고, 경고하고 싶었다.
“그 사람 걱정해 주시는 마음, 감사해요. 그런데 이젠 편히 마음 놓으셔도 되세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요.”
효은은 영란과 민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당당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게 거짓이라고 볼 이는 없었다. 영란은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며 웃었고, 민아는 가슴 어딘가가 찌르듯이 쑤셔 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힘주어 쥐어야 했다.
“이렇게 든든한 손주며느리를 보다니. 자식 앞세운 우리 아버지, 이제야 마음 편히 지내시겠네. 그래서 말인데, 새 식구가 빨리 늘면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영란이 핸드백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효은의 앞으로 내밀었다. 종이엔 유명 산부인과 교수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녀의 의도는 확실해 보였다.
“우리 집안이 장자 승계를 고집해서 말이야. 대를 빨리 이어 줘야 그쪽 할아버님이나 우리 아버지도 편히 눈감으시지 않겠어?”
영란의 오지랖이 이런 쪽으로 뻗어 나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민아는 그녀의 뜻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난처한 건 효은도 마찬가지였다. 첫 가족 식사 자리부터 목적이 이것이라는 것처럼 그녀가 더 나서서 두 사람의 2세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건, 아직 너무 이른 얘기 아닐까요? 두 사람이 알아서 할 부분이고요. 요즘은, 이런 얘기 부담스러워해요. 보세요, 효은 씨 난처해하잖아요.”
결국 민아가 나서서 입을 열고 말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하고 얘들이 같아?”
영란이 민아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어디서 나서냐는 눈빛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었어요. 신경 써 주신 거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효은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끊어 내듯 명함을 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행동에 영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고, 민아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기가 힘들었다.
곧 영란이 일어나고, 자리는 파해졌다. 뒷정리를 맡은 효은에게 과일 바구니를 전달하려고 남아 있던 민아는 그녀에게 먼저 다가섰다.
“원래 종잡을 수 없는 분이세요.”
오늘의 일을 무마하려는 그녀 나름의 위로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효은은 어쩐지 민아를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 중에 편한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이도와 사촌 지간이기에 마음만 잘 통한다면 가까이 지낼 수도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입양아라는 걸 밝힌 순간부터 추측은 걷잡을 수 없이 확신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효은이 보기에 그녀는 이도를 그저 사촌 오빠로 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미친 생각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효은의 직감이 그렇게 경고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 이도 오빠한테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집안 문제 말고도 머리 아픈 일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요즘, 갑작스럽게 결혼한 것 때문에 회사에서 지지도가 떨어지는 중이었거든요. 일에 집중하게 해 줘요, 우리.”
마치, 그녀가 이도의 아내라도 되는 듯한 뻔뻔한 발언이었다. 효은은 어쩔 수 없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효은의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민아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려던 민아에게 효은은 지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네. 그럴게요. 더 골치 아픈 일이 없도록, 아이도 되도록 빨리 가질게요.”
효은은 민아가 건넨 과일 바구니를 든 채 유유히 병실 쪽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민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헛웃음이 나오다 천천히 입가가 굳어졌다. 효은의 마지막 말을 곱씹자 심장 저 끝이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