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18화 (18/74)

18장.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방해한 거예요?”

그가 다가오자 효은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아니.”

이도는 짧게 대답하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효은은 이끌리듯 이도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고 멋졌다. 스위트룸을 일상처럼 드나드는 위치라고 허세를 부렸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거기 앉아.”

이도가 눈으로 큰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서류를 잡았다. 나가려던 것이 아니었나. 효은은 잠깐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어색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조금만 마무리하면 돼. 기다릴 수 있지?”

곧 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천천히 해요.”

효은은 그제야 자신이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곳으로 올 생각을 했을까.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자신의 마음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일 때문에 며칠은 집에 갈 수 없을 것이란 그의 문자에 아무렇지 않게 그러라고 일렀다. 그리고 이도가 없는 3일 동안 그녀는 여실히 그의 빈자리를 느꼈다.

일상은 달라진 게 없었는데 문득 불안했고, 혹시나 하는 걱정이 일었고, 결국엔 그가 보고 싶었다. 매일 밤 보내는 문자에 그가 답장이라도 해 줬더라면. 그 서운함이 결국엔 이곳까지 찾아오게 만들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이도가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아.”

효은은 그제야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예상대로 배터리가 나간 상태였다. 할아버지를 웃게 만들기 위해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다운받아 같이 보고 충전을 하지 못한 게 원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수시로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들여다봤던 것 또한 한몫 차지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는 아저씨는 왜 답장 안 해요?”

결국엔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도가 고개를 들어 효은을 건너다봤다. 변명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낮게 웃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일 대신 너를 선택하겠다는 것처럼 성큼성큼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벌은 어떻게 받을까?”

“……벌이요?”

“하고 싶은 거 있냐고.”

이도가 다정히 물었다.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어.”

“나, 스물네 살이에요.”

그게 나이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효은은 어느 드라마에서 나왔던 장면이라며 ‘밤바다’를 외쳤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인 척을 하며,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 채, 그러나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바다로 향하던 길.

그 밤, 드라마 주인공들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바다에서 애써 막아 두었던 감정을 터뜨리듯 깨닫고 만다. 사랑이 그런 걸까. 어쩌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효은은 옆자리에 앉아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도를 바라봤다.

‘당신 마음은 지금 어디쯤이에요?’

‘나를, 그래도 조금은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 건, 왜 모두 들어주고 있어요?’

‘꼭,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걸 당신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처럼.’

욕심이다. 효은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도 그랬어.”

이도가 침묵을 가르며 입을 열었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반이었다고.”

네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변명을 건네주는 남자. 다정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결국엔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효은이 허무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기다리는 거 하지 말라는 소리야.”

그리고 딱 그만큼의 선을 그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니까. 효은은 익숙하게 마음을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젠 안 그럴 거예요. 아무리 가짜라도 남편인데, 너무 생각 없이 쿨쿨 자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걱정하는 몰골 좀 보였어요. 그게 할아버님께 보이기도 좋을 것 같고. 우리, 진짜처럼 보여야 하잖아요.”

“……그럼, 다행이고.”

이도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럼요. 다른 이유가 있을 게 뭐 있어요.”

효은이 짧게 웃으며 대답하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밤바다는 보이지 않고 유리창에 그녀의 얼굴이 귀신처럼 비쳤다. 캄캄하니까 고래 배 속 같다는 명대사를 실감했다. 고래 배 속. 효은은 눈을 감고 생각을 끊었다. 고래 배 속. 다시 눈을 뜨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도가 창가 끝에 걸렸다.

한여름 밤의 해수욕장은 사람들로 넘쳤다. 둘만 있을 수 있는 조용한 곳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효은은 자신이 생각한 풍경이 아니라 실망하고 말았다. 정말 현실과 드라마는 이렇게나 다르구나. 조용히 백사장을 걷다가 예쁜 문양이 그려진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나란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사치일지도 몰랐다.

“설마, 그 드라마에서 수영도 한 건 아니지?”

안 그래도 마음이 심란한데 이도가 한술 더 떴다.

“하고 싶어요? 밀어 드릴까요?”

효은이 그의 등 뒤로 다가가 미는 시늉을 했다. 정말 확 밀어 버릴까. 이 갑옷 같은 슈트가 바닷물에 다 젖으면 그는 조금쯤은 진심을 말할까. 자꾸만 나를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줄까. 효은은 손목에 힘을 주어 그의 허리를 앞으로 밀쳤다.

“아, 읏!”

하지만 그렇게 될 리 없었다.

“내, 내려 줘요!”

어느새 상황은 역전돼 이도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공주님 안기가 취미신가. 효은이 발버둥을 쳐도 그는 묵묵히 바닷가 쪽으로 걸어갔다.

싸아아아. 파도 소리가 거칠게 그녀의 귓가를 쳐 댔다. 설마. 진짜로? 장난일 것이다. 효은은 겁이 나 그의 목을 더 꽉 부여잡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밀착되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일단은 후퇴하고 볼 일이었다.

“아저씨, 잘못했어요. 사과할게요.”

“……뭘?”

이도가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든요. 지금 나 던지면, 정말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요.”

곧 죽어도 입은 살았다. 효은은 말을 꺼내고 아차, 싶었다.

“누가 던진대?”

“그, 그러려는 거 아니었어요?”

효은이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 다치는 일은 내가 왜 해.”

이봐. 이 아저씨 정말 선수일지도 몰랐다. 효은은 더욱더 속상해졌다. 발버둥을 쳐서라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를 가지고 놀고 싶은 것이라면 그만두라고. 나는 진심인데, 당신은 장난하는 거냐고.

“내려 줘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이도의 눈이 더 깊어졌다.

“하나만 해.”

“……?”

그가 아리송한 말로 일렀다.

“좋아하든지.”

심장이 또 멋대로 두근거렸다.

“싫어하든지.”

이도가 효은을 파도 앞에 내려놓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효은이 그에게서 멀어지며 표정을 감췄다.

“으앗.”

그 순간 거친 파도가 그녀의 다리를 쳤다.

“이리 와.”

이도가 급하게 한 팔로 그녀를 당겨 그의 품 안에 끌어안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에게 안겨 있었다. 효은은 그 자리에 얼음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 그의 몸에 밴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를 더욱 괴롭혔다. 나한테 왜 이래요, 진짜. 그녀는 알 수 없는 울분이 일어 그를 밀쳐 내 버렸다.

“윽……!”

이도는 기습적으로 당한 공격에 넘어졌고, 파도에 몸을 적셨다. 황당해하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효은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 심술. 딱 그 말이 맞았다.

“화 안 나요?”

적어도 이런 장면을 상상하진 않았다. 효은은 편의점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젖은 신발을 삼선 슬리퍼로 바꿔 신겨 주려는 이도를 내려다봐야 했다. 와이셔츠까지 홀딱 젖은 건 그인데, 그는 효은의 젖은 발을 지켜보고 있기 버겁다는 것처럼 그녀를 곧장 이곳으로 데려와 앉혔다.

“화내라고 한 거였어?”

아니라는 말도 못 하고 효은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축축한 양말을 벗기고 그 안에 감춰진 뽀얀 발을 금방 산 물티슈로 닦아 냈다. 효은은 발가락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지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나, 손 안 부러졌어요.”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으니 이 남자는 그녀를 아기 취급 하고 있었다. 효은이 다 닦인 발을 그의 손에서 빼내 그녀가 직접 삼선 슬리퍼를 끼워 신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도 따라 일어났다.

“다들 와이프한테 이러지 않나 싶어서.”

그가 뒤늦게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웃었다. 와이프. 아내. 마누라. 이젠 그 말이 익숙하게 나오는 건가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어 주지 말아요. 경고예요. 경고. 효은이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재밌어요?”

“뭐가?”

“나 놀리는 거요.”

피식, 이도의 입가가 더 크게 올라섰다.

“뭐 때문에 골이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런 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야.”

그가 갑자기 고해성사를 했다. 효은의 가슴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결혼 같은 거 생각한 적 없었어. 그게 중요하지도 않았고. 그것 말고도 내가 짊어져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네가 지켜봤으니 알 거야. 내 사인 하나에 누군가의 목숨 줄이 왔다 갔다 하고, 선흥이 흔들릴 수도 있어. 난 매일 넥타이를 매고 전쟁터에 서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까지, 심통 부리지 말라고요?”

효은이 알아들었다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상처받지도 말고.”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 뒷말을 이었다.

“너무 미워하지도 말라고.”

이도가 흐리게 웃었다. 그녀 때문에 홀딱 젖은 남자가 미워하지 말란다. 효은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라는 거야. 너무 좋아지는데, 미워하지도 말라니. 이 남자가 이렇게 밀당하는 재주가 좋은지 미처 몰랐다.

“그럼, 나도 부탁할게요.”

효은이 마음을 다잡고 그를 올려다봤다.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

“확, 좋아해 버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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