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거리 유지
“……이처럼 중국은 향후 노인 인구의 잠재 소비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한 새로운 노인층이 그 대상인 것이죠. 중국 노령 산업 발전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노인 인구의 잠재 소비력이 2050년 약 106조 위안 규모로 성장하리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고령화 대책에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많습니다. 수요층은 급증하지만, 아직까지 서비스 공급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저희가 중국 ‘오센’ 측과 협업으로 준비하는 ‘스마트 양로(智能養老)’ 사업이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실버 세대의 전반적인 소비 성향과 특징을 반영한 가장 적합하고 성공 가능성이 큰 해외 진출 사업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프로젝트 팀의 발표가 끝나자 임원들의 눈은 모두 이 사업을 비밀리에 준비한 이도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로 인해 한동안 회사 내에서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괴소문이 나돌았었다. 또 다른 유력 회장 후보인 선영이 신사업을 성공적으로 오픈하고, 그에 따른 매출 증대의 효과를 빠른 시간 안에 구현해 내자 그녀의 힘을 믿고 라인을 바꿔 서는 부류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권 회장이 장자 승계를 못 박았다고는 해도 임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회사가 살아야 그도 있고, 모든 직원들이 선흥을 믿고 일할 수 있었다. 능력을 증명할 수 없다면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없어야 했다. 시대는 변했고, 변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권이도 상무가 현재의 분위기를 역전시키지 못한다면 선영에게 그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증명은 그래서 이도에게 더 날카롭고 무서운 잣대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권이도 상무가 내세운 지금의 사업 전략이 선흥의 해외 시장 확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디딤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위험한 배팅으로 끝날 것인가. 그 결론은 오로지 이도의 머리와 노력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우리 권 상무님이 이번 해외 전략 사업에 아주 이를 많이 가셨네요.”
이도의 기획에 반기를 들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발표 공간의 분위기가 이도의 발 빠른 추진력과 비상함에 대해 인정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선영은 마이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선영이 맞은편에 앉은 이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네. 말씀하시죠.”
이도는 얼마든지 도전을 받겠다며 눈을 맞췄다.
“실버산업 시장이야 지금 시대에 늘 회자되는 화두죠. 그걸 파이가 큰 중국 쪽에 갖다 붙인 거,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수익 결과는? 중국 양로 사업에 구조적인 문제가 많다고 발표하셨죠? 보고서를 조금만 찾아보면 베이징시 민영 양로 기관 중 수익을 낸 기관은 8퍼센트뿐이고, 65퍼센트가 적자에 허덕인다고 분석합니다.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양로 기관의 특성상 투자 규모가 크지만 투자 수익을 회수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요. 길게 보고 운영해야 손익 균형을 실현할 수 있다는 건데, 그때까지 우리는 뭘로 버티나요? 제 신사업 수익으로?”
선영이 준비한 반격은 날카로웠다. 임원들은 동요했다. 하지만 이도는 그런 분위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그도 이미 선영이 그의 작전을 파악하고 대비했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도가 차분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이사님이 내신 신사업 수익으로 어떻게 지금의 선흥을 이끌죠? 우리 선흥이 그렇게 작았습니까? 아, 지역 라인 정도면 가능하겠네요. 그 부분에선 저도 아주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의 기싸움은 승부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했다. 경쟁에 있어서 이도는 선영에게 한 발도 지지 않았다. 그녀를 나이 많은 임원이나 가족인 고모로 대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경쟁 상대로 바라봤다. 선영이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려보자 이도는 더욱더 냉정하게 눈빛을 바꿨다.
“중국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현재 중국에선 우수한 공립 양로원은 자리를 구하기 어렵지만 일반 민간 양로원은 침상이 넘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마트 양로’로 길을 잡은 겁니다. 타겟층으로 잡은 중국의 1950년대 세대들은 조사 결과 가장 돈을 아끼지 않는 집단입니다. 향유형 소비를 하는 럭셔리층이죠. 왜 이들이 한국에 와서 쓰는 관광 비용만 생각해야 합니까? 그들 나라에 가서 그 집단에 우리 것을 팔아 버리면 됩니다. 위험 부담이 높다고 하셨죠? 그 부분은 중국 ‘오센’ 측과의 협업을 통해 모든 게 해결됩니다. 저희가 제시한 계약 항목을 보시면…….”
회의는 완벽한 이도의 승리로 끝이 났다. 누구를 얼마나 더 잘 설득할 수 있는가. 그건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능력이었다. 선영도 그 부분에서 이도를 인정했다. 녀석의 머리는 비상했고, 타인의 신뢰를 얻어 내는 침착한 이성과 지치지 않는 노력이 그를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만들었다.
권 영감이 이도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고, 이기고 싶었다. 이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이도의 몰락을 지켜보고 싶은 검은 마음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 방 먹었다며?”
측근 이사진들과 긴급 대책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다. 선영의 집무실엔 이미 영란이 제자리인 양 앉아 있었다. 동생의 취미는 지독했다. 이쪽, 저쪽 들쑤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 감정을 헤집었다.
그게 그녀가 살아남는 방법이었고, 내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점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신경이 날카롭게 솟아 있는 시기엔 영란의 도발을 이성적으로 받아 내기 힘들었다. 똑같이 달려들어 물어뜯는다면 두 사람이 자매라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너 상대할 시간 없어. 나가.”
평소보다 더 서늘한 선영의 목소리가 영란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언니도 똑같아. 아무리 아닌 척해도, 권이도한테는 뺏기기 싫은 거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싶지? 누가 그 자리에 앉든 권이도는 끌어내고 보자는 생각에 동의하지? 영란은 시뻘건 속내를 드러내듯 선영의 앞에 사진들을 펼쳐 놓았다.
“……뭐야?”
선영의 눈은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조카며느님의 하나뿐인 가족.”
영란이 가져온 사진에는 태호와 이도가 함께 찍혀 있었다. 늙은 노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이 빠진 상태로 환자복을 입은 채였다.
“시한부라네. 얼마 안 남았대.”
영란이 언니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설명했다. 선영은 태호를 부축하고 있는 이도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의 행동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꾸밀 녀석은 아니었다.
“계약 결혼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추측하기엔 이도가 어린 신부를 대하는 모습이 너무도 감정적이었다.
“이 영감, 우리 선흥이랑 인연이 깊더라고.”
영란은 또 다른 단서를 흘렸다. 그녀의 눈빛이 흥분하듯 반짝였다.
* * *
3일째 릴레이 회의가 이어졌다. 발표한 기획 사업을 빠르게 진행하려면 시간이 없었다. 결혼으로 틈을 보인 건 사실이었다. 선영이 �i아올수록 그는 더욱더 도망가야 하는 운명이었고, 권 영감의 선택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결과를 내놓아야 했다.
이도는 언제나처럼 야근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아침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 되었고, 본가에서 잠드는 건 의무적인 행위였다. 그 습관을 결혼으로 바꿀 생각은 없었다. 정신없는 지금이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몰랐다. 효은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랑 자고 싶지 않아요?’
당돌하게 묻는 여자를 옆에 두고 24시간 감정 방어선을 쳐야 했다. 결국 그가 서재에게 잠들기로 합의했지만 그 이후 이도는 효은에게 좀 더 선을 그어야 했다. 3일 동안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야 어느 정도 거리가 유지되는 듯싶었지만 발칙한 여자는 그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도는 효은이 밤마다 그에게 보내온 문자를 열어 보았다.
[침대가 아주 넓어요]
[나 혼자 자서 행복해요]
[이게 독박 시집살이인가]
[화장실은 가죠?]
[그 시간에 문자는 못 하나 싶어서]
[혹시 죽었어요?]
마지막 문장에선 저절로 웃음이 샜다. 이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정신을 차렸다. 띠링. 그걸 방해하겠다는 것처럼 문자음이 울렸다. 당연히 효은일 것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내렸다. 하지만 문자를 보낸 이는 내일 스케줄을 확인하는 박 비서였다. 이도는 이상한 서운함이 들었다.
집중하지 못한 채 30분쯤을 소득 없이 보내다 그는 핸드폰을 다시 붙잡았다. 통화음이 들렸지만 효은은 받지 않았다. 독수공방시킨 그에 대한 복수인 걸까. 그녀의 행동이 귀여우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찾아들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도 효은이 아니었다. 이 밤에 전화할 일이 없는 강 여사였다. 이도는 잠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네, 접니다.”
― 아, 권 상무. 밤늦게 미안해. 아직 회사야?
“네. 무슨 일 있습니까?”
이도가 곧장 물었다.
― 아니, 효은 양이 아직 안 들어왔기에…… 혹시 같이 있나 해서. 며칠 동안 권 상무 기다리느라 잠을 못 잔 거 같더라고. 오늘은 병원에 가지 말고 쉬는 게 어떠냐고 했는데 괜찮다고 나가서는, 아직 소식이 없네……. 아니야. 병원에서 자고 올 수도 있고, 친구도 만나고 하겠지. 내가 사서 걱정하는 걸 거야. 일하는 데 방해해서 미안해. 끊을게.
걱정 말고 주무시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지만 이도는 그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를 걱정시키는 게 취미인 여자일까. 이도는 숨을 끊어 뱉으며 차 키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서자 조명이 꺼진 비서실에 놀란 눈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효은이었다. 그제야 뛰던 심장이 안도감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곧장 가슴 어딘가가 찌르르 먹먹하게 울려 대기 시작했다.
“아, 그게…… 진짜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어서.”
겁이 없는 여자는 또다시 겁 없이, 멋대로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한 게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효은이 민망한 웃음을 짓고, 돌아서려 했다. 이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녀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효은의 앞으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