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겁이 없어
승재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도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효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수가 마주쳤다는 여자가 정말 효은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답답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이도는 잠시 허탈한 눈빛을 보였다.
“여기도 아닌가 보네요.”
효은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온 것 같았다. 그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도는 곧바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저기, 효은이한테 무슨 일 있나요?”
미련 없이 나서는 그에게 승재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도는 몸을 돌려 잠시 승재를 바라봤다.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는 사이였다. 그 자리가 당연한 것처럼 효은의 옆에 서 있던 친구. 그녀의 핸드폰에서 할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많은 발신이 찍힌 사람. 어쩌면 효은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자. 그가 그렇게 정의 내린 ‘한승재’라는 인물에게 오늘의 일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별일 아닙니다. ……그럼.”
“……편의점이요!”
그가 문을 열기 전, 승재는 정답을 알려 주듯 말을 던졌다.
“속상한 일 있으면 편의점에 앉아서 라면을 먹어요. 집 근처나. 아무튼, 그 주변을 한번 찾아보세요. 핸드폰은 가방 깊숙이 넣어 놓고 안 볼 거예요.”
만약 이것이 경쟁이라면 완벽한 패배였다. 이도는 승재를 이길 수가 없었다. 한승재가 장효은과 보낸 세월이 그를 비웃었다. 이도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가게를 빠져나갔다. 정말 효은이 편의점에 앉아 있다면, 그는 우스운 질투심에 휩싸여야 할지도 몰랐다.
결혼 전에 살던 동네의 편의점을 모두 돌았지만 효은은 없었다. 혹시 몰라 태호의 병원 근처도 살폈지만 허탕이었다. 그게 한편으론 ‘다행이다’란 멍청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한승재는 장효은을 전부 알지 못한다. 그가 바란 가설이 들어맞는 것일 테니까.
이도는 사라진 효은을 찾으며 그가 경험하지 못한 온갖 감정들에 샤워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한 여자의 존재가 이토록 크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이성을 제대로 마음에 담아 본 적조차 없던 그가 감당하기엔 벅찬 마음들이었다. 결국엔 효은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됐다.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돌아오는 길, 이도는 자신의 집 근처 편의점에 앉아 있는 효은을 발견했다. 허무하고, 허탈하며, 또 오기 같은 감정이 생겼다.
이도는 차를 세워 두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효은은 라면을 먹느라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라면뿐만 아니라 맥주 캔도 몇 개 놓여 있었다. 이제 작정을 하고 술꾼이 되려나. 또 무슨 주사를 부리려고. 이도는 자신도 같이 취해 버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당당하게 맥주 캔을 가져와 따 버렸다.
“어, 저기요! 이거 제 거…… 아저씨…….”
놀란 효은의 표정을 보고도 이도는 우선 목부터 축였다. 걱정하며 돌아다니느라 식도가 바짝 마른 것만 같았다. 그에게 복수하는 법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 캔 하나를 모두 비워 내고 나서야 이도는 효은을 마주 바라봤다.
“당당하게 나가더니, 겨우 여기야?”
가출 청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옆에는 큰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시 화를 내고 싶진 않았지만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다. 그녀를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왜 꼭 편의점에 앉아 있어야 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화내지 마요. 나도 반성하는 중이니까.”
효은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가라앉은 얼굴이 이도의 죄책감을 더욱 자극시켰다. 그래, 늘 이렇게 밀당에 능한 여자였다. 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할아버님한테 갔었어.”
“……네?”
“걱정하실 거야. 전화부터 드려.”
이도의 말에 효은은 얼른 가방 깊숙이 넣어 둔 핸드폰을 꺼냈다. 이도가 그녀를 찾아 나설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잠시 상상했지만 아픈 태호가 걱정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할아버지에게 간다고 했으니 당연히 이도는 그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효은은 얼른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할아버지. 어. ……어. 지금 같이 있어. ……진짜야. 바꿔 줄까? 알았어. 응……. 미안해. 응. 그래, 할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세요. ……네.”
잔뜩 혼이 난 얼굴로 효은이 전화를 끊었다. 이도는 나름 복수가 된 것 같아 기분이 풀렸다. 그가 슬며시 웃자 효은이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웃음이 나와요?”
“네 친구한테도 갔었어.”
“누구요? 승재요?”
효은이 다시 놀라서 핸드폰을 붙잡았다. 그러자 이번엔 이도가 핸드폰을 뺏어 가 버렸다.
“거긴 전화하지 마.”
“왜요?”
“자존심 문제야.”
“네?”
“그런 게 있어. 얼른 일어나.”
이도는 효은의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아직 덜 먹었어요.”
효은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이도는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효은은 남은 맥주를 챙겨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차 안에 그녀의 가방을 넣은 그는 다시 문을 잠갔다.
“왜요?”
“음주운전 하라고?”
“아…….”
그걸 생각도 못 하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걸까. 효은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집 근처이니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을 거리였다. 그녀는 두 손에 든 맥주 캔 하나를 이도에게 건넸다. 그는 말없이 술을 받아 들었다. 여름밤 공기가 뜨거웠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효은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늦은 밤 동네를 걷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기업의 오너들이 터를 잡고 사는 곳이기에 걸어 다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차로 이동하며 운동은 집 안에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갖춘 곳이 많았다. 이도도 이 동네를 걸어 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효은 덕분에 졸지에 동네 구경을 하게 되었지만 이런 여유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녀를 찾아다니는 내내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고 평온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맥주 캔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따려다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술을 네 개나 샀어?”
효은이 하나를 마셨고, 그가 원샷한 후 남은 캔은 두 개였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네 캔이나 마실 생각이었나. 효은의 위험한 객기에 이도가 염려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네 개 사야 할인되더라고요.”
“뭐?”
그런 싱거운 이유였다니. 이도는 웃음이 났고, 다시 목이 탔다.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 효은이 그를 따라 맥주 캔을 땄다.
“이리 줘.”
“왜요?”
자기 몫을 뺏어 가나 싶어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밤에도 무섭다고 내 몸 안고 잘 거야?”
“아니, ……네?”
그날 밤이 떠올랐다. 효은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이도의 경고에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조용히 그의 손에 맥주 캔을 건넸다. 이도는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것처럼 만족한 표정이었다.
“근데…… 계속 우려먹을 생각은 아니죠?”
“어, 그럴 생각이야.”
“치사해요.”
“그러니까 술 좀 먹지 마.”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효은은 그 잔소리가 싫지 않았다. 심장 어딘가가 간지럽기도 했다. 때마침 여름밤의 바람이 살랑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날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이렇게 나란히 여름밤을 걷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권이도란 남자와 결혼해 부부 싸움 같은 걸 하고, 화해랄 것도 없이 한집으로 들어가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효은은 지금의 현실이 마치 꿈속 같기도 했다.
“아…… 밤공기 좋다.”
“벌써 취했어?”
“누가 보면 나, 진짜 술꾼인 줄 알아요.”
“이대로 가면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이제까진 할아버지 걱정할까 봐 못 마셨단 말이에요.”
“……내 걱정은?”
이도가 또다시 심장 떨릴 한마디를 건넸다. 돌아본 그의 진지한 눈빛이 그녀를 점점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걱정하는 남자 같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아저씨 선수인 건가. 효은의 눈초리가 달라졌다.
“신경 쓸 일 안 만들 테니까 걱정 말아요.”
“오늘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아…….”
말장난이 재밌었는지 이도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수다스러운 남자였었나. 효은은 잠깐 그가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와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었다. 집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리고…… 상의해야 할 문제가 있어.”
원래의 권이도처럼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네. 말해요.”
“……잠자리 말이야.”
“……잠이요?”
효은이 놀라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이도도 나란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고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뭘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면……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당당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지금 널, 존중하고 배려하는 거야. 서재에서 잤던 것도 내가 불편한 것보다 널 위해서 그랬던 거고. 오해하지 말란 소리야. 결혼했다고 너한테 함부로 굴 생각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
“아저씨, 남자잖아요.”
효은이 이도의 말을 끊어 내며 불쑥 확인했다.
“……그런데?”
“나랑 자고 싶지 않아요?”
“……뭐?”
어이없음에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심각하긴. 효은이 히죽, 웃으며 그를 앞서 걸어갔다.
“농담이에요. 쫄지 마세요.”
하지만 곧장 그의 손에 붙들려 돌아서고 말았다. 이도는 효은을 자신의 앞에 데려다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웠다. 효은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도의 뚫어질 듯한 눈빛이 심장을 꽉 부여잡고 놓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끊어 내듯 문장을 완성해 뱉었다.
“너, 진짜…… 겁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