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15화 (15/74)

5장. 효은의 남편

서류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도는 파일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서는 효은을 붙잡지 못했다. 그녀가 어느 부분에서 상처받았는지 알면서도 그는 강조해야만 했다. 오늘의 식사 자리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한 번은 일러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그의 가족의 일에 휩쓸려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처음 결혼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효은이 결혼 기간 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어 가길 바랐다. 그게 그가 바라는 전부였다.

“하아…….”

결국 이도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받지 않을 건 예상했다. 그렇다고 모른 척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이도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옷을 갖춰 입고 밤늦게 운전대를 잡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당연히 병원이었다.

“어쩐…… 일이야?”

병실엔 태호 혼자뿐이었다. 간병인은 식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도는 효은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걱정할 게 뻔했으니까. 그럼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의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져 왔다.

“급한 일 때문에 회사 들렀다가, 지나는 길에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도는 태호가 걱정하지 않게 얼른 둘러댔다.

“이 시간까지 고생이 많구나. 아, 오늘 가족 모임은 잘 치렀고?”

효은이 가고 그가 무엇을 염려했을지 눈에 보였다.

“그저 식사하는 자리였습니다. 걱정하실 일 없었습니다.”

“그래도……. 부끄럽지만 내가 아무것도 가르치질 않았어. 이렇게 급하게 결혼시킬 줄도 몰랐고……. 잘 모르고 실수를 해도 자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게나.”

태호는 부탁하듯 이도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저도 부족한 게 많은 사람입니다. 효은이가 저보다 더 나은걸요.”

“그래? 그 녀석이, 제 할 말은 하는 편이지?”

이도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태호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감춘다고 감춰질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 시각에 병원에 나타난 것 자체가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톱니바퀴일 순 없었다. 잘 맞아 들어가는 것도 이상했다. 맞춰 가는 것이 결혼 생활이었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삶이었다. 태호는 이 신혼부부의 투닥거림이 오히려 더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병원을 나선 이도는 다시 한번 효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이도는 태호가 준 힌트에 대해서 생각했다.

‘가장 의지하는 친구야.’

그 친구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보이는 거부 반응은 아니었다. 그를 대신해 결혼해 달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믿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이도는 그 남자에게 가지는 자신의 적대심이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이기적인 소유욕이었다. 가짜를 운운하면서 그 마음까지 그에게만 향하길 바라는 걸까.

자신을 반성하듯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차를 돌렸다.

* * *

“놀랐어요?”

“아…… 진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승재는 기수의 가게 안으로 들어선 민아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저녁엔 형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알바까지 쓸 만큼 여유롭지 않은 상황을 알기에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지켰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어 걱정하고 있는 찰나,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섰다.

“오라고 한 사람은 승재 씨예요.”

민아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승재는 우선 물과 메뉴판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결혼식 이후 민아에게 옷을 보냈고, 그게 다음 만남의 약속으로 이어졌다. 세탁비 몫을 꼭 치르고 싶다는 그녀의 부탁 때문이었다. 승재는 별 뜻 없이 형의 가게를 말했다. 정 미안하면 시간 날 때 찾아와 매상을 올려 주라며 그저 흘러가는 말처럼 꺼냈었다. 정말 이렇게 그녀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민아는 승재의 표정을 이해한다며 오늘 방문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술 한잔하고 싶은 날인데…… 갈 데도, 같이 마실 사람도 없더라고요. 집 근처 작은 호프집이나 갈까 하다가 갑자기 승재 씨 문자가 생각났어요. 혹시 내가……, 많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죠?”

“아, 아뇨.”

승재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오라고 한 사람은 그였다. 효은 남편의 측근이다 보니 좀 더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벽을 친 것 같아 승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친구 없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 줘요.”

상황을 웃어넘긴 민아는 메뉴판에 집중했다.

“여기는 뭐가 맛있어요?”

“어…… 그냥 간단히 드실…….”

“야, 나 오다가 장효 뒷모습이랑 비슷한 여자 만…… 어, 손, 손님이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하하하.”

떨어진 간장을 사러 급하게 마트에 다녀온 기수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민아를 보고 얼른 90도로 인사를 건넸다. 최근 들어서 손님이 없어 걱정이 많았다. 한 명의 고객도 소중했고, 그 고객이 미모의 여성이라면 더없이 감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이신가 봐요?”

“아, 네네. 근데, 이쪽 동네분은 아니시죠? 이렇게 눈부신 미모를 가지신 분을 제가 못 보고 지나칠 리가 없거든요.”

민아는 장사를 아주 잘하시는 사장님이라며 그를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자 기수는 자신의 자리를 잊은 것처럼 민아의 옆에 붙어 서서 주방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희 집은, 혹시 파워 맛집 블로그에 소개되어서 오신 건가요?”

“아……. 그건, 아니고. 승재 씨한테 갚을 게 있어서요.”

“우리 승재요?”

기수가 포기하듯 옆에 서 있는 승재를 돌아봤다. 녀석이 언제 이런 은밀한 작업을 했단 말인가. 결혼한 유부녀를 잊지 못하고 마음속에 끌어안고 사는 줄 알았더니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았다.

“형.”

“어?”

“주문.”

승재는 얼른 기수를 주방 안으로 밀어 넣듯이 돌려보냈다.

“친형이에요?”

두 사람의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민아가 물었다.

“아, 네.”

“어쩐지 닮았더라고요.”

“그거, 욕입니다.”

“……네?”

“농담 아니고요.”

아, 하하하. 민아는 승재의 굳은 표정에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볼수록 매력 있는 타입이긴 했다. 낯을 가리긴 했지만 요즘 훈남들처럼 외모도 준수했고, 마냥 가볍지 않은 말투와 분위기가 어리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여자 친구 있어요?”

민아가 음식을 기다리는 틈에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저기 주방 안에 있는 사장님에 대해 묻는 거겠어요? 아, 이 말은 사장님한테 비밀이고요.”

눈치를 보듯 검지로 입을 가린 민아가 주방을 건너다봤다. 승재는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혹시 그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그러기엔 나이 차이도 제법 났고, 굳이 그를 맘에 들어 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부족함이 없는 여자였다. 기수가 칭찬한 것처럼 외모도 출중했고, 그에게 건네준 명함 속 직업도 멋졌다. 아니면 키우고 싶은 연하가 취향인 건가. 하지만 거기에 동조하기엔 승재는 그녀와 같은 뜻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승재는 자신이 꺼내 놓고도 놀란 것처럼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효은을 생각하는 마음. 그게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인정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식장에 걸어 들어가고 난 이후, 그는 10년을 넘게 곁에 있었던 그 장효은을 좋아하고 있었던 자신을 받아들였다. 멍청했고, 느렸으며, 답이 없었다.

“짝사랑이구나……. 우린, 닮았네요.”

민아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꺼내 놓고 잠시 슬픈 눈빛을 보였다.

“뭐야, 어디 가셨어?”

“화장실.”

주방 일을 대충 마무리한 기수가 홀에 나오자마자 민아를 찾았다. 승재는 형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테이블 정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기수가 그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어떻게 아는 사인데? 어? 정말 이러기야?”

“뭐가?”

“장효 못 잊어 하는 줄 알았더니.”

“형!”

승재는 행주를 던지고 형을 노려봤다. 그의 마음이 그렇다 해도 이젠 숨겨야 하는 감정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꺼내 놓고 농담처럼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아, 귀 떨어지겠네. 어, 맞다! 나 아까 장효 만났다니까 그러네.”

기수가 다시 생각난 듯 그때의 상황을 입에 올렸다.

“잘못 봤겠지. 걔가 왜 지금 이 시간에 이 동네에 있어.”

승재는 형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였다. 결혼한 효은이 이 늦은 저녁 시간에 혼자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 승재는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효은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이제 마음대로 전화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그녀를 친구로 여겼다면 하루에도 수십 번 통화 버튼을 눌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 장효 같았는데……. 큰 가방 들고……, 암튼 너 집에 가서 보자. 저 미모의 여성분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소상히 고하지 않으면 오늘 잠은 다 잔 거라고 생각해라. 알겠나, 동생!”

승재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오늘은 얼마나 시달려야 끝이 날까. 브라더 콤플렉스도 아니고. 기수는 언제나 승재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일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쓰는 경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고, 지금도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시느라 떨어져 지내다 보니 형의 책임감이 클 것이란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칠 때면 그는 피곤했다. 일찍 마감을 하고 형을 피해 친구 집으로 피신을 할까 생각하는데 또다시 가게의 문이 열렸다. 하늘은 어찌 그의 편이 아닐까. 승재는 얼른 단념하고 힘차게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

“맞게 찾아왔군요.”

효은의 남편이었다. 권이도.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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