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짜, 진짜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어.”
방 안으로 들어선 이도가 불쑥 말을 꺼냈다. 효은은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히 서 있는 그녀가 신경 쓰였을 것이다. 혹시나 그 이유 때문에 일정을 빨리 정리하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 그의 감정이 궁금했지만 선뜻 묻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들은 ‘가짜 결혼’을 하는 데 동의한 당사자들이었으니까.
“아저씨도 내가 원하는 걸 해 주고 있잖아요.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도 그게 도리라고 하시고요.”
효은이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전했다.
“그래? 그럼, 왜 그러고 서 있지?”
이도가 놀리듯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효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도는 눈짓으로 자신의 넥타이를 가리켰다. 얼른 벗겨 주지 않고 뭐 하냐고. 효은은 황당했다.
“오늘 서류 사인은 어떻게 하셨어요?”
“……뭐?”
“손이 고장 난 거 같아서.”
장효은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이도는 또 이렇게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가 요구하는 모든 걸 수동적으로 해 주었다면 오히려 더 불편했을 것이다.
“나한테 하듯이, 오늘 저녁 자리도 잘 이겨 내 봐.”
이도가 힘내라며 웃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넥타이를 풀고 드레스 룸으로 걸어 들어갔다. 익숙하게 갈아입을 옷을 찾는데, 효은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왜?”
그는 이미 와이셔츠를 벗어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효은은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도는 이 귀여운 숙맥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아팠다. 옷도 마음대로 벗지 못하는 결혼 생활이 어디 있는가. 헌데 누구를 탓할까 싶었다. 그 가짜 결혼을 해 주겠다고 부추긴 건 그였으니까.
“아…… 안 추워요?”
“한여름이야.”
“아, 그렇지.”
“장효은.”
“네?”
효은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언제 갈아입었는지 이도의 상체는 티셔츠로 가려져 있었다.
“아, 그게…… 사촌 여동생이요.”
효은은 망설이다 결심하듯 물었다.
“민아가 왜?”
이도는 효은의 입에서 나온 물음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주방 안에는 강 여사뿐만 아니라 민아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깊이 신경 쓴 적은 없었지만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그녀가 주방 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강 여사와 잘 맞았고, 모임이 없을 때도 한 번씩 본가에 들러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갈 때도 있었다. 권 영감도 민아의 그런 싹싹함을 반겼다. 그래서 효은이 신경 써야 하는 인물 중 민아도 포함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많이…… 친해요?”
그녀의 물음이 이상했다.
“사촌 여동생이야. 친하다는 걸로 구분 지을 사이인가?”
“그렇죠. 그렇긴 한데…… 아니에요.”
효은은 고개를 흔들며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뭔가가 걸리는 표정이었지만 이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네가 신경 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도 우스웠다.
“계속 서 있을 거야?”
“네?”
이도가 슈트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자, 잠시만요! 잠깐요.”
효은은 얼른 돌아서 드레스 룸을 황급히 나섰다. 이도는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렇게나 내외를 하면서 어찌 한 공간에서 지낸단 말인가. 옷은 그렇다고 해도 잠자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제는 일을 핑계로 서재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하지만 그 핑계도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이 집 안에서 권 영감의 레이더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정상적인 결혼 생활. 그것을 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고민이 깊어졌다.
* * *
“요리는 좀 해?”
가족 식사 자리 때마다 분란을 만드는 건 늘 영란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은 듯 앞자리에 앉은 낯선 새 가족에게로 시선이 꽂혔다. 효은은 고개를 들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뇨.”
잘하지 못하는 걸 잘한다고 할 필요는 없었다. 못하면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요리 말고도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지만 노력할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영란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효은은 개의치 않고 식탁에 앉은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가장 상대하기 버거운 영란에게 맞서 막힘없이 제 할 말은 하고 보는 효은이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란 걸 식탁에 앉은 모든 이들은 저절로 깨달았다.
권 영감의 옆에 앉은 첫째 딸 선영은 그 순간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선 묘한 만족감이 엿보였다. 이도의 짝으로 데려다 앉힐 정도면 노인의 마음을 충족시킬 무언가가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그게 이 아이의 단단함일까. 아니면, 감춰진 거래일까.
영란 못지않게 그녀의 머리도 아파 왔다. 권이도를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이 어린 여자가 그 경쟁의 변수로 작용한다면 그녀도 이전처럼 이성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혼했다고 꼭 여자가 요리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잘하는 걸 하면 돼요. 요즘 세상에 결혼이란 건 동등한 합의에 의한 법률 행위니까. 여자라고 더 많이 참고 양보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선영은 영란과 정반대의 의견을 던졌다. 효은을 핑계로 누군가의 고지식한 관념을 흔들어 보려는 술수가 보이는 발언이었다. 영란은 언니의 잘난 척에 기가 차 코웃음을 쳤다. 한편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나 싶었다. 자매가 허공에서 눈싸움을 벌였지만 권 영감은 언제나 있었던 일처럼 무시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급하게 생각할 거 없다. 천천히 하면 돼.”
무상은 효은을 건너다보며 딱 두 말만 건넸다. 시할아버지 시집살이라도 시킬 줄 알았던 이도는 ‘천천히’라는 말에 의아함을 가졌다. 하지만 말은 말일 뿐이었다. 그 말 안에 담긴 뜻이 정반대일 수도 있는 법이었다.
“요즘 애들은 그렇게 하라고 하면 그렇게만 하면 되는 줄 알아요, 아버지. 속에 능구렁이를 키우시는 분이 천천히는 무슨. 손주도 천천히 보시게요?”
영란이 이도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권 영감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둘째 딸에게로 향했다. 언제나 세 치의 혀가 문제인 자식이었다.
“너한테는 내가 ‘천천히’란 말을 꺼낸 적이 없는데, 아직도 세용 부지 터만 잡고 있는 게야?”
노인의 날카로운 물음이 영란과 그 옆에 앉은 아들 정민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건…… 아버지.”
“그만하세요, 어머니.”
정민은 얼른 자신의 어머니를 말렸다. 더 변명을 해 봐야 마이너스가 될 뿐이었다. 선흥 그룹 지역 총괄 본부장이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의 속사정은 달랐다. 이도와의 경쟁에서 단 한 번도 앞서지 못한 정민은 결국 본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2인자로 낙인찍힌 채 지방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지 않았다.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만큼 패배감을 맛보게 하는 일은 없었다. 이 권씨 집안에서 그는 늘 그 모욕감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죽은 큰아들 자식만 싸고도시면서, 무슨 큰 기회나 주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얘 지방 내려간 지 2년이에요. 그게 다 권 상무 때문인 거, 제가 모를 줄 아세요?”
결국. 기어이. 늘, 언제나처럼 영란이 억울한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으로 가족 식사는 파투가 나 버렸다. 정민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선영은 민아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회사로 돌아갔다. 모두가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의 상황을 보고 놀란 건 이 가족의 분위기에 적응해야 하는 효은뿐이었다.
“신경 쓸 거 없어.”
“어떻게…… 안 써요, 신경을.”
2층으로 올라온 이도는 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는 효은은 이도의 옆자리에 앉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권씨 가족의 대화를 앞으로 계속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어질했다.
“내가 결혼 전에 너한테 부탁한 게 있었어?”
이도는 냉정해진 눈으로 효은을 바라봤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내가 네 가짜 남편이 되어 주겠다고 했지, 너보고 내 진짜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한 적 없어. 내 가족 문제야. 너를 이 진흙탕 싸움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아. 넌 그냥 네가 원하는 것만 나한테서 얻어 가면 돼. 괜히 나서다가 너만 다쳐. 이제 내 말 알아듣겠어?”
주제넘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우리의 결혼이 진짜였냐고 묻는 되물음이었다. 효은은 이해했다. 머리로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서운했다. 그가 미웠다. 가짜, 진짜. 그런 말들로 구분 짓는 행동과 감정들이 이만큼 크게 상처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 이유는 뻔했다. 이미 그녀가 그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고 있기 때문이겠지.
“네. 알아들었어요. 어제부터 여기, 서재에 있는 것도 나 때문에 불편해서 그렇다는 것도 알아요. 내가 내 생각만 했어요. 당분간은 할아버지 병원에서 잘게요. 그게 서로 편할 것 같아요.”
효은은 제 말만 꺼내 놓은 후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을 갈아입고 급하게 가방을 쌌다. 이도가 룸 안으로 들어서는 게 느껴졌지만 동요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장효은.”
“왜요? 나도 내 맘대로 할 권리 있어요.”
감정적이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효은은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네 맘대로 해.”
이도는 서늘해진 눈빛으로 차갑게 말을 뱉었다. 효은은 그를 두고 방을 나섰다. 그녀가 대문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사이에도 그에게선 전화조차 없었다. 효은은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울음을 참듯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