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안도감
“항암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어.”
김 교수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효은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아침 회진까지 급하게 미뤄 두었다. 긴장감이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지며 끝내 눈가엔 감사의 눈물이 맺혔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해요.”
“크기가 이대로 잘 줄어들면 수술도 가능해. 아직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네가 결혼하고 나서 선생님도 안정을 많이 찾으신 것 같아. 어떤 병이든 심리적인 부분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 너도 알 거다. 기적이라는 게 다 그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알지?”
김 교수는 의사인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긍정적인 말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늘 최악을 대비하고 그것에 대해서 경고를 건네야 하는 직업이 의사였다. 나을 것이라 희망을 주었는데 그 희망이 헛된 고문이었다는 걸 알고 그를 찾아와 원망하는 환자들의 보호자만 해도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냉정해졌고, 환자를 병명으로만 들여다보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나으실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거예요. 다 할 수 있어요!”
그런 김 교수에게도 예외가 생겼다. 손태호 스승. 그만은 제발 기적적으로 오래 살아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하나뿐인 소녀 효은의 행복을 좀 더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기를.
김 교수는 효은의 어깨를 힘 있게 다독여 주었다.
“이건, 제주도 1등급 한라봉으로 만든 초콜릿. 그리고 오메기떡이랑 감귤차랑…… 아, 그게 어디 갔지. 할아버지 좋아하는 감귤한과도 샀는데. 어, 여기 있다!”
효은은 종이 가방 한가득 담아 온 신혼여행 선물을 병실 안에 펼쳐 놓았다. 태호는 정신이 없었지만 신이 나 있는 손녀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효은이 웃으면 그도 웃음이 났다. 효은이 아프면 그도 아팠다. 하지만 효은은 그로 인해 아프지 말았으면 했다.
“이거 다 먹으려면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 거야?”
태호가 농담처럼 건넨 말에 효은이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과 서운함이 뒤섞여 있었다.
“얼마를 왜 계산해? 한 달에 한 번씩 제주도 갈 거야. 그리고 선물 왕창 사 올 거야. 평생 그럴 테니까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 하지 마. 긍정의 힘이라는 거 몰라? 살 거다, 살 수 있다, 주문을 외우라고. 난 할아버지 행복한 거 보려고 결혼까지 했는데 나한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또 감정이 넘쳐 버렸다. 효은은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할아버지일 텐데. 아픔조차 내색하지 않고 견디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보단 그녀의 입장에서 떼만 쓰고 있었다.
효은은 미안한 마음에 얼른 눈가를 훔치고 웃었다.
“신혼여행 얘기 해 줄까? 할아버지한테 할 얘기가 넘쳐서 노트에 적어 왔다니까.”
그녀가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태호는 모든 것이 감사했다. 효은을 볼 수 있는 이 순간도, 더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래, 얼마나 재밌었는지 들어 보자.”
* * *
가족 식사 스케줄이라는 말에 서류를 훑어보던 이도가 고개를 들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하루가 지났다. 이렇게 빨리 효은을 어려운 자리에 세우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하는 시간이긴 했지만 낯선 공간에서의 생활에 조금은 적응하고 나서 치러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그 혼자만의 배려인 듯했다.
“회장님 지시인 겁니까?”
고모 영란의 작전이라면 그의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도가 묻자 박 비서는 불가능을 말하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네. 사모님은 병원에서 곧바로 합류하시겠답니다.”
권 영감은 그들의 분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 결혼에 이도가 원한 건 딱 그 조건 하나였지만 그를 믿을 수 없다는 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정상적인 결혼 생활.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그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다. 스물넷의 어린 여자에게 시할아버지 시집살이라도 시킬 생각인 것인가. 이도는 권 영감의 생각을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효은은 흔쾌히 그의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할아버지도 그걸 원한다고 덤덤히 말했다. 그 밑바탕엔 어떤 수고가 닥칠지 그녀는 아직 모를 것이다. 나란히 서 있는 것도 불편한 남편, 거기다 세상을 홀로 사는 시할아버지, 터줏대감처럼 집안을 이끄는 시할머니 몫의 집사까지. 감당할 수 있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다음 스케줄 얼마나 걸리죠?”
이도가 시간을 계산하며 박 비서에게 물었다.
“빠르면…… 아, 빠르게 끝낼 수 있도록 처리하겠습니다.”
그의 마음을 단번에 읽은 박 비서는 곧장 운전의 속도를 높였다.
* * *
대문 앞에 도착한 순간, 효은은 참아 온 숨을 골랐다. 골목 어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후 전속력으로 뛰어 올라온 길이었다. 이도가 보내온 회사 차는 변명을 붙여 돌려보냈다. 아직은 사모님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한 번 만에 오는 버스 노선도 알아 두었고, 이 동네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녀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그 덕분에 가족 식사 자리의 준비를 도울 시간이 줄어든 것만 같아 마음이 급했다. 효은은 얼른 대문의 벨을 눌렀다. 곧 그녀를 알아본 도우미 아주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문을 열어 주었다.
“혹시…… 뛰어왔어요?”
주방 일을 지시하고 나서던 강 여사가 땀에 젖은 효은을 보고 놀라 다가왔다. 얼른 도우미를 시켜 마른 수건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효은은 난처한 마음에 연신 두 손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그게, 늦은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제가 일찍 와서 같이 준비해야 하는 거였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강 여사는 오히려 더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준비는 무슨 준비를……. 그냥 권 상무 오는 길에 같이 들어와 앉아 있기만 해도 되는 자리예요. 제가 이 집에서 맡은 일이 이 식사 준빈데, 어린 사모님 손까지 빌려 쓰면 되겠어요?”
“아니, 그래도……. 아, 그리고 사모님 말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효은이에요.”
강 여사는 차차 바꾸겠다고 말하고는 그녀를 신혼방이 있는 2층 독채로 올려 보냈다. 효은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와 멀뚱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직은 가구의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든 낯선 공간이었다. 그녀의 짐은 모두 정리되어 있었지만 정작 그 주인은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효은은 정신을 차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감정에 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얼른 옷장을 뒤져 예복용으로 맞춘 한복을 찾아 입었다. 오는 길에 할아버지에게도 여러 번 새겨들은 말이었다. 예의를 갖춰 할 도리를 다하고,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라고. 효은은 힘을 내 마음을 다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권 상무가 그런 줄은 몰랐네…….”
“워낙 힘든 거 내색 안 하는 사람이잖아요. 한두 달은 제가 약으로 챙겼어요. 먹으라고 갖다줄 땐 싫은 표정이더니, 좀 괜찮아지니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서 대리가 잘 챙겨 줘서 다행이야.”
“여사님, 아직도 제가 서 대리예요?”
“아, 내가 호칭 바꾸는 게 쉽지 않네. 다 늙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줘.”
“에이, 또 저 미안하게 그러신다. 근데 이 새우는 빼야 할 것 같아요. 저번에 홍콩 출장 갔을 때 오빠가 먹고 체해서는 제가 더 고생을…… 어, 안녕하세요.”
주방으로 들어선 효은을 발견하고 민아가 인사를 건네 왔다. 사촌 여동생이라고 했던가. 큰고모님의 딸이라고 했었다. 그런 사람이 왜 이 시간에, 익숙한 모습으로 주방에 들어와 요리를 돕고 있는 걸까. 효은은 의아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좀 더 쉬고 있지, 왜 벌써 내려왔어요?”
강 여사는 효은의 등장에 긴장하듯 몸을 일으켰다. 아직 신경 써야 할 인물은 맞았다. 서로가 적응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사이였지만 효은은 어쩐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게 이도에 대해서 그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한 여자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삐뚤어진 심술 같아서 효은은 얼른 표정을 밝게 바꾸고 민아에게로 다가갔다.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장효은이라고 합니다.”
“아, 서민아예요.”
민아는 여전히 손으로는 음식을 만들며 효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도 도울게요.”
효은은 소매를 걷고 조리대 쪽으로 다가섰다.
“아뇨. 괜찮아요. 아직 익숙하지 않을 텐데, 쉬고 있어요. 이 주방은 원래 여사님하고 제 담당이거든요.”
민아가 강 여사에게 찡긋, 눈짓을 보냈다. 그녀가 싹싹하게 도와주는 덕분에 일이 수월한 것은 사실이었다. 고모 둘에, 그 집안 식구들까지. 갑자기 늘어난 식사 준비를 홀로 도맡기엔 강 여사도 힘에 부쳤다.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있긴 하지만 권 회장과 이도만큼이나 권씨 딸들의 입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 입맛을 다 맞추려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 주면 좋았다.
그게 민아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양아여서, 이 집안의 핏줄이 아니라서 궂은일을 시킨다는 소리라도 듣게 될까 봐 강 여사는 처음부터 거부했었다.
하지만 민아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무시하고 강 여사를 도왔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그녀의 도움이 제법 큰 몫이 됐을 땐 강 여사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는 건 못 하겠어요. 뭐라도 시켜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웃는 그녀가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여느 부모들처럼 키운 자식이라고 한들, 권 회장의 장녀 선영이 자신의 딸에게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었다. 강 여사의 눈에도 모든 게 보였다. 사랑받으려고 발버둥치는 민아가 가엽기도 했다.
“이도 오빠는 좀 늦을 거예요. 오늘 잡힌 스케줄은 빼기가 어려워서.”
말을 꺼낸 사람은 효은이 아니라 민아였다. 강 여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효은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요……. 먹을 복은 없나 보네요.”
효은의 뼈 있는 뒷말에 강 여사는 잠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도의 짝은 어리긴 했지만 주눅 든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눈치 보는 얼굴을 한 건 민아였다.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워낙 일 때문에 같이 붙어 있다 보니……. 아, 이런 말 하고 보니까 오빠가 진짜 결혼했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그죠, 여사님?”
민아는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 여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래. 앞으로는 바뀌어야지. 그래야 권 상무도 달라지지 않겠어?”
“오빠가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저한테 딱 잘라 말하던데요?”
그런 말들을 주고받았다는 것도, 그걸 이 상황에서 전하는 민아도 효은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잘못된 추측은 그저 망상이라 여기며 효은은 일부러 농담을 건넸다.
“그 성격이 바뀔 일은 없을 것 같긴 해요.”
분위기를 풀어내려 한 그녀의 말에 오히려 민아가 얼굴을 굳혔다.
“오빠가 벌써 성격을 드러내요? 난 입양되고 이 집안에서 가장 어려웠던 사람이 이도 오빠였거든요. 말 트는 데만 해도 3년은 걸렸을걸요.”
입양. 갑작스런 고백에 효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강 여사도 놀랐다. 민아가 입양아란 사실에 대해서 감추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부러 알리듯 꺼내 놓은 적은 없었다.
“왜 이러고 서 있어?”
혼란스러워하는 효은의 정신을 깨운 건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이도가 주방 안의 강 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늦는다던데……?”
그의 등장에 놀란 강 여사는 이도가 아닌 민아를 바라봤다. 당연히 늦어야 할 남자가 나타나자 민아 역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사고 칠까 봐 걱정돼서요.”
이도가 앞에 선 효은을 잠깐 내려다보다 낮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고는 돌아서 2층 쪽으로 걸어가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나,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아…… 네.”
효은은 뒤늦게 따라오라는 뜻인 줄 알고 몸을 움직였다. 등 뒤로 여러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도 모르게 안도감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