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잠이 오지 않을 밤
그의 손은 뜨거웠다. 효은은 놀라 반사적으로 손길을 피했다. 이도는 예상했다는 듯 느리게 웃었다. 그게 이상하게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 즈음, 그의 손이 이번엔 그녀의 눈가를 다정히 가렸다.
“자라고.”
“…….”
“이렇게 멋진 남자가 재워 주는 것도, 버킷 리스트에 넣어.”
권이도답지 않은 농담이었다. 효은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은 바로잡았다.
“멋진 남자, 확실한…… 거죠?”
“뭐?”
또 이렇게 웃고 말았다. 그녀와 있으면 이도는 모든 게 싱거워져 버렸다. 솔직하게 진심을 모두 말해 버리는 여자. 어떻게 그가 이길 수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정말 태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불행도 행복으로 바꿀 아이라는 것. 장효은을 키운 그녀의 할아버지가 깨달은 점이 이것일까. 이도는 조금씩 공감해 가고 있었다.
“……아저씨는요?”
‘설마, 진짜로 한 침대에서 잠들자는 것은 아니죠?’라고 되묻는 것 같아 이도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침대보다 더 넓은 소파에서 잘 거야.”
패키지여행답지 않게 호텔방은 넓고 컸다. 허니문이라는 데 중점을 둔 옵션인 듯했다. 그리고 신혼부부를 위한 방이니만큼 침대는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그곳에서 효은과 같이 잠들 수는 없었다. 그가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효은이 놀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옆에서 자요. ……무서워요.”
효은의 눈이 진지했다.
“지금 이 방 안에서 나를 제일 무서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효은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운 이도가 허탈하다는 듯 말을 건넸다. 조명을 모두 끄고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스탠드 불빛 하나만 남겨 두었다. 침대가 생각 이상으로 넓었기에 두 사람이 같이 눕는다고 해도 서로 달라붙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거리 유지는 가능했다.
효은은 그에게 옆자리를 내줬지만 거기에 다른 의미는 없어 보였다. 빈틈없이 몸을 감싼 이불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겁 없는 확신. 효은다웠다.
“사람을 믿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는 법이지.”
“아무도 믿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에요.”
지지 않고 받아치는 효은의 말엔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효은은 그런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고, 이도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끝이 있는 사이라고 못 박았다.
“아무나 잘 믿으면서 뭐가 무서운데?”
이도가 고개를 돌려 효은을 바라봤다. 그를 마주 보는 그녀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그냥…… 불안해요. 혼자 있기가 싫어요. 어차피…… 곧 그렇게 될 거잖아요.”
체념한 목소리에서 두려움과 어리광이 뒤섞여 묻어났다. 잊고 있었다. 효은은 이제 스물넷. 세상을 독하게 바라보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도 닦는 말만 하던 여자애가 지금 이 순간에는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애처럼 느껴졌다.
“약해서 도움 될 건 없어.”
그다운 충고였다.
“강하면 도움 되는 게 있나요?”
효은이 되물었다.
“적어도 무너지지는 않으니까.”
이도의 말에 효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 그건 이도가 그날 이후 자기 자신에게 걸어온 주문이었다. 포기해야 할 것과 참아 내야 할 일들을 마주하며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빠르게 적응했다. 부모를 잡아먹은 저주받은 팔자라는 소리에도 변명 한 번 하지 않았다. 꿈 따윈 가질 수 없는 운명이라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혹시라도 마음을 준 이가 네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으니까. 그 일을 찾고 싶어질 테니까.
그럼에도 피는 무서웠다. 화가였던 어머니의 재주를 물려받아 그림을 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방 안에 있는 종이들을 모조리 찢어 내 버렸다. 그 어떤 곳에도 그림 따윈 그릴 수 없도록.
지독했다. 그 자신조차 치가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 덕분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의 길을 만들었다. 비록 가짜라는 진실을 숨기고 있지만 그 자신만은 진짜 권이도를 알고 있다. 그 녀석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그것으로 만족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자. 내가 볼 때, 넌…… 겁쟁이가 아니야. 그랬다면 날 옆에 눕히지도 않았겠지.”
이도가 나름의 위로를 건네고 바라보자 효은은 이미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정말 겁이 없는 게 맞았다. 이도는 효은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밤이었다.
* * *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한 번씩 무서운 꿈을 꿀 때면 효은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방에 들어가 태호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 있으면 귀신들이 저절로 사라졌다. 만병통치약. 그 말이 딱 맞았다. 오늘도 그런 기분이었다. 효은은 한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불행한 기운들이 깨끗하게 사라진 숙면을 취하고 기분 좋게 눈을 떴다.
“헉!”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신음에 놀라 황급히 입을 막았다. 눈앞에 남자의 넓은 가슴이 보였다. 그것과의 거리는 1센티도 안 될 만큼 가까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효은은 숨을 삼키며 천천히 상황 파악을 했다. 어젯밤 그녀가 이 침대에 누워 같이 자자고 한 게 기억났다. 아무리 술을 처음 마셨다지만 그렇게 대범하게 행동하다니. 효은은 자신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도 이해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라면 상처 없이 끝내 줄 것 같다고, 독한 말을 서슴지 않았던 그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들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도대체 뭘까. 이 남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걸까. 효은은 이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궁금한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어날 거야, 말 거야?”
눈을 감고 있던 이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 깼어요?”
“잤어야 깨지.”
효은은 그의 말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왜 못 잤어요?”
이도가 그제야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자지 말라며?”
“내가요?”
효은은 기억에 없어 억울했다.
“자지 말고 거리 유지해 주세요. 내 잠버릇이 안는 거라서.”
“내가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래.”
이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렇다고 밤새 자지도 못했다는 건가. 안을 수도 있는 거지. 안는 게 어때서? 효은은 그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철저한 분이신 줄 몰랐네요.”
“안아 줄 걸 그랬어?”
“네?”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하! 효은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도는 그녀의 행동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놀리는 재미가 있을 줄은 몰랐다. 몇 번이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지 마요. 가지 마,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그녀가 가여워 잠드는 건 포기했다. 애초부터 그건 불가능했다.
누군가의 옆에서 잠든 게 언젠지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이도는 혼자인 것에 익숙했다. 그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견뎌야만 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 이도에게 효은은 불가사의한 여자였다. 곁에 둘 수도, 그렇다고 멀리할 수도 없었다.
“헉, 조식 시간 30분밖에 안 남았어요!”
효은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소리쳤다. 고개를 흔들던 이도가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그가 못 잔 잠을 잘 것이라 예상한 효은은 갈아입을 옷을 꺼내려다 동작을 멈췄다.
“왜, 왜요?”
“조식 먹어야지.”
이도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양치를 시작하자 쪼르르 따라 들어온 효은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피곤할 텐데. 가이드님한테는 제가 잘 말해 놓을게…….”
“빨리 너도 양치해.”
이도가 효은에게 칫솔을 건넸다.
“그리고 이제 가이드 말고 내 옆에 붙어 있어, 제발.”
“……네?”
“10분 지났어. 얼른 서둘러.”
효은은 지금 이도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닫기도 전에 입 안으로 칫솔부터 집어넣어야 했다.
이도는 효은이 껌딱지라도 되는 것처럼 옆에 붙여 놓고 다녔다. 조식을 먹을 때는 물론,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나 관광 명소에 도착해 구경할 때도 효은을 자신의 뒤쪽에 감춰 두었다. 그 덕분에 어제 효은과 붙어 다니느라 장소 소개를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가이드가 오늘은 현장 안내에 열을 올렸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된 여행을 하는 것 같다고 일행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했다.
“이거, 밀당의 효괍니까?”
효은은 불쑥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꼭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옆에 붙어 있던 이도도 볼일은 봐야 했다. 회사에서 급하게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간 그의 부재를 틈타 일행 중 한 명인 젊은 남자가 그녀의 곁에 다가왔다.
“무슨 말씀인지……?”
밀당이라니. 효은은 그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어요? 신랑분 질투심 느끼게 하려고. 어제 하루 종일 가이드 옆에 있었잖아요.”
“아, 그건…….”
변명하려던 효은은 말을 멈췄다. 이 남자에게 그걸 왜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남의 일을 멋대로 해석하는 사람과 말을 섞으며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효은은 그런 모토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왔다.
“내가 어제 신랑분한테 그랬거든요.”
효은이 불쾌함을 내비쳤음에도 남자는 눈치도 없이 말을 더 얹었다.
“가이드가 신부님 마누라처럼 데리고 다닌다고. 신경 좀 쓰라고. 그러니까 막 ‘제 마누라는 제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그러면서 나한테 눈을 부라리는데, 아이고 오금이 저려서. 하하하. 암튼 두 분 꼭 붙어 다니시니까 가이드가 이제 일을 하잖아요. 어제도 좀 저러지.”
효은은 뒤늦게 남자의 말을 이해했다. 이도의 곁에 있기가 어색하고 불편해 가이드에게 질문을 건넨다는 핑계로 어제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붙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도가 듣게 된 말을 전해 듣자 효은은 마음이 좀 오묘했다.
‘제 마누라는 제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그 말을 이도가 했다는 게 어쩐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때마침 이도가 전화 통화를 마치고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효은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그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둘은 다른 일정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원래 중요한 건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가이드는 이제껏 방문했던 음식점과 비교해 최고의 퀼리티를 선보이는 레스토랑 안으로 일행들을 인도했다.
“이곳에서의 식사가 마지막이니까 원하시면 술은 제가 선물로 제공하겠습니다.”
정말 제대로 정신을 차렸는지 가이드는 확실한 서비스를 베풀었다. 그의 호의를 모두들 흔쾌히 받아들였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제법 친해지기도 했다. 각자 취향에 맞는 술을 따르고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축하하려는데 효은은 눈앞에서 술잔을 뺏겨 버렸다.
“넌 이거 마셔.”
이도가 그녀의 앞에 사이다 잔을 놓았다.
이러긴가. 효은은 이 남자가 왜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가 싶었다. 어제의 술주정에 대한 복수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자 그녀도 참을 수 없었다. 사람들과 건배를 한 이도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 효은은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것도 마누라를 알아서 챙기는 일인가요?”
맥주를 삼키려던 이도가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눈을 키웠다. 효은은 복수라며 얄밉게 웃었다. 그가 마시다 만 맥주잔을 빼앗아 든 그녀는 시원하게 그것을 원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