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11화 (11/74)

11장. 버킷 리스트

“위스키 한 잔 부탁합니다.”

이도는 호텔 라운지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텐더는 예의 바른 손길로 그의 눈앞에 위스키 한 잔을 세팅해 주었다. 술에는 취미가 없었다. 이 술을 먹는 것 역시 사업의 연장선이라는 걸 권 영감이 강조해도 이도는 흐트러진 자신이 싫어 되도록 술을 멀리했다.

술로 이룬 사업이라면 그건 모래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세운 업적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다. 그 허점을 노리는 게 큰고모 선영이었다. 이도도 그녀의 능력을 인정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선흥의 회장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권 영감은 장자 승계를 고집했다. 선영이 이룬 사업은 결국 남편 한길의 몫으로 넘어가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고리타분한 구시대적 사고를 바꾸기엔 그녀의 능력은 아직 권 영감의 마음에 쏙 들지 못했다. 어쩌면 이도라는 존재가 있기에 더 그럴 수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적일 수밖에 없는 자리. 그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도는 혼자가 익숙했다.

“일이 잘 안 풀리시나 봅니다.”

위스키를 단번에 입 안에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자 바텐더가 조심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도는 웃으며 비운 유리잔을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한 잔을 더 부탁했다.

“신혼여행 온 사람으로 안 보이나 보죠?”

알코올이 들어가자 그에게서도 싱거운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신혼여행 오셨군요. 신부님이 안 보이셔서…….”

바텐더가 웃으며 그를 혼내는 것만 같았다. 이도는 가슴 한쪽에 머물러 있던 효은을 떠올렸다. 불편해하는 그녀를 배려해 방을 빠져나왔지만 사실은 그가 자신이 없었다. 가짜 남편을 해 주겠다고 호기롭게 말하고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같은 공간에서 무시하고 잠들 만큼 그녀의 존재감이 작지 않았다.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내내 그의 눈 안에 담긴 건 풍경이 아니라 한 여자뿐이었다. 보호자라는 핑계를 갖다 붙인다 해도 그는 지금 ‘장효은’이라는 여자에게 많은 감정을 쏟고 있었다.

거리감이 필요했다. 끝이 보이는 만남이었고, 결국 상처받을 사람은 그녀였다. 희망 고문을 당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바텐더가 새로 가져다준 위스키를 받아 드는 순간,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생각나는 건 효은뿐이었다. 이도는 급하게 잔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를 걸어 온 이는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이도는 잠시 망설였다. 늦은 시간이었다. 자신이 신혼여행지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사에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그는 짧게 말을 뱉었다.

“그래, 서 대리.”

― 나예요, 오빠.

민아는 그를 ‘상무님’이라는 직책 대신 ‘오빠’라고 불렀다. 회사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한 번씩 그에게 전화해 개인사를 상담하던 사촌 여동생이었다. 영란의 아들인 정민은 그를 경쟁자로 생각하지만 민아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공개 입양을 선택한 선영의 의도가 그것일 것이다. 그런 사촌 여동생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무슨 일이야?”

― ……방해한 건, 아니죠?

민아가 미안하다는 목소리를 내비쳤다.

“아니야. 괜찮아.”

― 그냥, 집안 대표로 뽑혀서 전화한 거예요. 이모님이 궁금한 게 넘치시는데, 쪼아 댈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 알잖아요. 급하게 처리할 게 있어서 회사 왔다가 전화해 봤어요.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벗을 수 없는 굴레 속에 손발이 묶인 인생들은 자신을 위로하는 법조차 알지 못한 채 체념하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이도는 위스키 잔을 다시 붙잡았다.

“무슨 이슈가 필요한데?”

― 어때요?

민아의 진지한 물음이 건네졌다.

“뭘?”

― 뭐겠어요? 나, 오빠한테 서운해요. 그래도 나한테는 미리 얘기했었어야죠.

그 역시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었다. 이도는 그저 쓰게 웃었다.

“네가 내 편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농담 같았지만 그의 대답 안에는 가시가 살아 있었다.

― 오빠.

“좋은 여자야. 너도 봐서 알겠지만, 예쁘고. 나한테는…… 과분하지.”

이건 진심이었다. 정작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진실.

― 난 오빠가…… 결혼 같은 거, 생각 없는 줄 알았어요.

“못 할 이유도 없잖아.”

― …….

그의 단호한 답에 민아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그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평생 여자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결혼을 했다. 믿고 축하해 주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고모님들한테는, 결혼했다고 해서 권이도가 달라지진 않는다고 잘 말씀드려.”

― 진짜……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민아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래.”

―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혹시나 오빠가 여자한테 푹 빠져서 상무 자리까지 뺏기나 걱정했거든요.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난 진짜 오빠 편이거든요. 이미 이쪽 줄에 서 버려서 돌아갈 수도 없어요.

흣. 이도에게선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민아의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으며, 마음을 주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았다.

“내 편이라 매일 야근이야? 대충 하고 얼른 들어가.”

― 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

끊을 줄 알았던 민아가 다시 말을 붙였다.

“……그래. 너도 이제 네 인생 챙겨 가면서 해. 괜찮은 사람 있으면, 나처럼 결혼도 하고.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큰고모님이 알아주시지 않는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이도는 냉정한 충고를 건넸다. 민아는 잠깐 웃다가 대답했다.

―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데, 결혼은 못 해요.

처음 건네 오는 남자 얘기에 이도는 적당한 위로를 찾지 못했다.

“…….”

― 그 사람, 오늘 결혼했거든요.

바에서 나온 이도는 박 비서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근처 다른 호텔의 묵을 만한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그는 결국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효은을 혼자 두고 내려올 때부터 신경이 쓰였다. 불편하다고 피한다면 둘은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익숙해져야 한다. 그 결심으로 이도는 다시 그들의 방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려다 시간을 확인했다. 잠들고도 남았을 새벽이었다. 이도는 다시 로비로 내려가 여분의 룸 키를 받아 방 앞으로 돌아왔다. 보안을 풀고 조심히 문을 열자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제주도 밤바다가 보이는 베란다 앞에 효은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엔 맥주 캔 여러 개와 먹다 만 과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효은이 갑자기 뒤돌아봤다. 그녀는 방어막 하나 없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저씨!”

취했나. 뭘 얼마나 마셨다고? 맥주 캔 몇 개로 저럴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이도는 또다시 골치가 아팠다. 위스키 몇 잔에 잠시 돌던 취기가 싹 가시는 것만 같았다. 조용히 잠들어 있을 것이란 상상도 그에겐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버거움이었다. 그런데 해맑은 주사라니.

“나 혼자 마시러 갔다고 시위하는 거야?”

이도는 어쩔 수 없이 효은의 곁에 앉으며 그답게 말했다.

“아저씨는 뭐 마셨는데요?”

“……위스키.”

“와. 위스키. 멋지네요.”

효은은 평상시에 그가 보던 모습보다 밝음이 다섯 배쯤 올라가 있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복숭앗빛을 띠었다. 그래서 새하얀 얼굴과 목덜미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주량이 얼마야?”

“아, 저요?”

그녀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치 처음 받는 질문처럼.

“설마…… 처음은 아니지?”

“빙고. 딩동댕. 정답입니다.”

장난스럽게 말하고 효은이 또 배시시 웃었다. 웃지 마. 그 말이 이도의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왜 자꾸 웃는 거야.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이잖아요. 내 버킷 리스트에 있었어요. 휴양지 밤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술 한잔, 딱 하는 거. 소원을 이뤘네요. 그런데 이 맥주는 맛이 없다. 소주를 살 걸 그랬나. 위스키는 어떤 맛이에요?”

효은이 다시 맥주 캔을 잡으며 말했다. 이도는 그것을 얼른 낚아챘다.

“남편한테 주사 부리는 것도 버킷 리스트에 있나 보지?”

남편. 이도의 말에 효은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빛이 천천히, 조금씩 젖어 갔다. 뭐야. 울기까지 하려는 걸까. 앞으로 장효은 앞에 알코올을 가져다 놓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이도는 다짐했다.

“피한 거 아니에요. 아니, 피한 거 맞아요.”

효은은 그의 물음과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녀의 눈동자 깊어졌다.

“결혼을 해 본 것도 아니고, 처음이잖아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들 사는 것처럼 해 달라고 아저씨한테 부탁했지만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라요. 내가 씩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외로운 사람이었어요. 아저씨가 나가고 나서 불안했어요.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 것도 쉽…… 으앗.”

순식간에 효은의 몸이 붕, 떠올랐다. 죄책감에 그녀의 고해성사를 끝까지 듣지 못한 이도가 효은을 안아 들어 올렸다. 저절로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웠다. 효은은 이도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심장이 터질 것같이 쿵쾅거렸다.

“이제 좀 조용하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효은을 조심히 침대 아래에 내려놓은 이도는 건네지 못한 말을 꺼냈다.

“미안해. 이번에도 내 생각이 짧았어.”

그의 사과에 효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도의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조용히 자는 게 어때?”

그가 회유하듯 효은을 내려다봤다. 침대 위였다. 효은은 또다시 어색해지고 말았다.

“방금 이거, 공주님 안기죠?”

민망함이 결국 엉뚱한 소리를 주절거리게 만들었다.

“내 버킷 리스트에 이것도 있었어요.”

“……이건 없었어?”

이도의 손길이 효은의 뺨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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