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제주도의 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로 정했다. 다행히 항암 치료가 효력이 있어 태호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효은은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행은 언제든지 갈 수 있다며 미루겠다는 그녀를 붙잡아 데리고 가라는 엄명을 받은 건 이도였다.
둘은 서로가 한발씩 양보해 제주도로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제주도는 이도가 출장차 반나절 만에 오고 가던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관광지를 구경하는 여행으로는 와 본 적이 없어 일정은 효은에게 모두 맡겼다. 그게 이런 기막힌 광경을 연출하게 될 줄은 몰랐다.
[환상의 섬, 제주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주공항을 빠져나와 곧장 호텔로 향할 줄 알았던 이도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서 그들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는 가이드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설마, 신혼여행을 패키지로 잡은 것인가. 그것도 통역조차 필요 없는 한국 땅에서 말이다.
효은은 이도의 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가이드에게 달려가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이도는 일단 따라 주었다. 이것 역시 할아버지 태호를 위한 그녀의 버킷 리스트라면 그도 할 말은 없었다.
“자, 저희 물 좋고, 바람 좋고, 풍경 좋고, 음식 맛있고, 거기다 덤으로 가이드까지 멋진 제주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저와 함께 제주도를 만끽하시면서 행복하고 즐거운 허니문이 되시길 바랍니다.”
좁은 여행사 버스 안엔 여러 커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허니문을 위한 특화 상품인지 대부분 금방 예식을 마치고 온 흔적들이 보이는 신혼부부들이었다. 결혼식을 잘 치러 내 후련한 동시에, 긴장감이 풀려선지 모두들 서로의 짝에 기대어 잠들기 시작했다.
이도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효은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잠깐이라도 쉬는 게 어떠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여행을 즐기게 놔두고 싶었다. 그는 눈을 감고 불편한 벤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어느새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이도의 머리가 자신의 어깨에 스르륵 내려앉자 효은은 그대로 부동자세가 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제주도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색했다. 결혼식까지 한 마당에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그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온다는 게 그녀에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러면서 가짜 남편 역할을 해 달라고 뻔뻔하게 말했다니. 그때의 자신은 누구인가 싶었다.
패키지여행도 일부러 잡았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1박 2일은 금방 지나 버릴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효은은 곁눈질로 잠든 이도를 바라봤다. 그가 좀 더 편안하게 기댈 수 있도록 몸을 움직여 주었다. 아이같이 맑은 얼굴로 잠든 이도는 그녀가 바라본 모습 중에서 가장 평온했다.
항상 굳은 표정으로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사는 듯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를 웃게 해 주고 싶었고, 행복하게 해 주면 어떨까 싶었다. 이 결혼도 그가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 결심한 일이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동정이라도 괜찮았다. 그만큼 그에게 고마움이 더해졌다. 효은은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만 그를 대할 생각이었다. 더는 안 돼. 자신에게 경고하듯 다짐했다.
호텔에 간단히 짐만 풀고 나서 집합한 뒤, 그 이후의 시간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쥐 잡듯이 우르르 몰려가 명소 몇 곳을 초고속으로 훑고 근처 유명 맛집에 도착해서 단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혼여행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도가 급한 업무 전화를 받느라 화장실에 들렀다 일행에 합류하자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커플 중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효은은 가이드 옆에 앉아 스케줄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여행 내내 그녀는 그의 옆에 붙어 있기보다는 가이드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도가 그걸 못마땅해할 이유는 없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이도는 질문하는 남자에게 되물었다. 의도는 뻔했다. 일부러 더 서늘하게 끊어 내듯 묻자 남자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오래 사귀셨나 보구나. 맞아요. 몇 년 만나다 보면 붙어 있는 게 더 어색해지더라고요. 그래도 신부님 옆에서 좀 챙겨요. 저 가이드가 아까부터 자기 마누라처럼 옆에 붙어서 데리고 다니잖아요.”
남자가 마지막 말을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패키지여행에 이런 무례한 참견까지 다 받아 내야 하는 수고가 있을 줄은 몰랐다. 물색없이 무리에 섞여 싹싹하게 말을 받아 낼 뻔뻔함은 가지지 않은 성격이기에 이도는 남자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 마누라 걱정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당신 여자나 잘 챙기라는 그의 경고성 눈빛에 남자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이도는 무리에서 단연 튀는 외모였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키도 제일 컸으며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하는 재벌 3세들처럼 옷과 시계, 구두까지 모두 명품이었다. 좁은 한국 땅에서 패키지여행이나 하고 있을 비주얼이 아니란 소리였다.
무슨 사연일까. 모두 이도와 효은 커플에게 시선을 보내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여자는 결혼을 하기엔 조금 어려 보였으며, 남자에게 간간히 ‘아저씨’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시선의 끝에는 꼭 보호자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지랖이 넓은 옆자리의 남자는 두 사람이 평범한 부부 관계가 아니라고 추측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근데…… 평범하게 결혼한 사이는 아니시죠?”
남자는 꼭 한마디를 덧붙여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타입 같아 보였다. 이도는 관심 좀 끄라는 말을 더하려다가 의미 없다 생각하고 입을 닫았다.
그의 몫으로 나온 성게미역국은 이미 식어 뒷맛이 짰다. 수저를 내려놓고 이도는 저 멀리, 가이드 옆에 앉아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는 효은을 바라봤다. 그녀는 한 번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첫사랑이라더니, 아무래도 그건 태호의 착각인 것만 같았다.
마지막 일정까지 돌고 나자 시간은 벌써 밤 10시를 훌쩍 넘었다. 모두 지친 표정으로 가이드를 보자 그는 간단히 내일 스케줄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그 말을 귀담아듣는 이는 효은뿐이었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은 한뜻이었다.
“자,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즐겁고 보람찬 밤 보내세요!”
가이드의 우렁찬 말이 끝나고 각자 짐을 챙겨 방으로 올라갔다. 이도와 효은도 룸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동 중일 때를 빼고 처음으로 그녀를 가까이 했다. 그의 시선이 닫자 효은은 계기판으로 눈을 놀렸다. 여전히 미묘하게 거리를 둔 채 둘은 호텔방으로 들어섰다.
효은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도와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가방 정리를 했다. 그런 효은의 태도를 보며 이도는 잠깐 웃어 버리고 말았다. 불편한 건 당연했다.
스위트룸에서야 찰나의 시간이었다. 눈앞에 있으라는 말이 그도 모르게 흘러나왔었다. 승재. 남자의 이름을 말하고 빨리 가겠다는 효은을 더 붙잡아 두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도 알 수는 없었다.
결국 할아버지가 기다린다며 일어서는 효은을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이도는 회사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마무리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은 각자의 일상을 살며 결혼을 준비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식을 치르고 호텔방에 같이 앉아 있을 줄은 그도 얼마 전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아, 맞다. 양쪽 집에 전화드려야죠.”
효은은 어색한 침묵을 피할 좋은 일거리를 찾았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주무셔.”
“아, 시간이…… 그렇구나.”
패키지여행이라 스케줄이 아주 스파르타였다.
“내일 아침에 하자. 저녁 먹을 때 내가 대충 해 뒀으니.”
효은이 가이드 옆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나 보다. 이도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나서고는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꼼꼼한 면이 있었나. 효은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뭘 해야 할까. 그녀는 생각났다는 듯이 엉덩이를 들었다.
“어, 그러고 보니 가이드님한테 내일 추가 일정을 제대로 안 물어봤어요. 늦게라도 뭐든 물어보라고 했으니까 잠깐 다녀올게요. 아저씨, 먼저 자…….”
“그럴 필요 없어.”
앉아 있던 이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으며 말했다.
“불편하면 내가 나갈 테니까. 너무 애쓰지 마.”
“아니, 그게…….”
효은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보는 눈이 있으니까 같이 들어온 거야. 지금이라도 방을 하나 더 잡으면 되니까…….”
“안 불편해요.”
효은이 오기처럼 말을 뱉었다. 이도는 골치가 아픈 것처럼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내 옆에서 잘 수 있다고?”
그가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효은이 놀라 살짝 물러섰다.
“모, 못 잘 것도 없죠.”
“그럼, 그땐 왜 도망갔어?”
이도가 콕 집어 물었다. 효은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 그땐…….”
그녀가 끝까지 대답하지 못하자 이도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뜻은 없어. 서로 편하자는 거야.”
“……알았어요. 가세요.”
이상하게 자신이 매달리는 것 같아 효은은 마음을 바꿨다. 불편한 건 맞았다. 그가 없다면 편하게 잠들 것이고, 내일 여행 일정이 수월할 것이다. 효은은 돌아서 자신의 할 일을 했다. 가방 안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정리하는 그녀의 뒤로 이도가 지나쳐 가는 게 느껴졌다. 진짜 나가 버리는 걸까. 효은은 그 순간에도 그를 의식하는 자신이 못났다 생각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밑에 바에 있을 테니까.”
효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곧 망설임 없는 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혔다. 그녀는 주저앉듯 자리에 앉았다. 자신을 두고 나가는 일이 뭐라고 이리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걸까. 불편한 기색을 보인 건 그녀였다. 이도가 하는 행동은 그녀를 위한 배려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신혼여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에 한 번뿐일지도 모를 신혼여행.
효은은 결심하듯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이도가 나선 문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