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새하얀 목련꽃
두 사람의 결혼식은 여름의 한가운데 아주 화창한 날 열렸다. 태호를 배려해 최소한의 하객들만 초대했지만, 현재 선흥 차기 회장 자리의 유력한 후보자인 권이도의 결혼식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예식이 치러질 호텔 로비는 앞다투어 인사를 건네려는 각계의 인사들과 지인들로 북적였다. 급한 중국 출장을 다녀오느라 신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만 빼면, 여느 기업인의 결혼식과 차이가 없는 풍경이었다.
그 시각 신부 대기실에선 뒤늦게 찾아온 긴장감에 효은이 미스코리아처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하객들을 맞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인사를 건네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축하를 의무적으로 받아 내는 중이었다. 그나마 하객 중에 익숙한 두 인물이 나타나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식스센스급 반전도 아니고, 장효은 마마가 결혼이라니…….”
기수는 아직도 그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늘을 향해 읊조리며 말했다.
“오빠만큼 저도 쇼킹하니까 그만 놀려요.”
효은은 기수를 향해 평소처럼 담담히 제 할 말을 했다. 그것으로 다행이다 싶은 승재가 그 옆에서 진심 어린 한마디를 건넸다.
“예쁘네, 내 친구.”
웨딩드레스를 입은 효은은 누가 보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그걸 이제 알았어? 하여튼 여자 보는 눈이 없어요.”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승재의 따뜻한 눈빛에 효은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중학교 때부터 징그럽게 이어져 온 인연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하소연을 이 녀석에게만은 털어놓을 수 있었다.
스위트룸에 있던 그날. 효은은 결국 승재를 보지 못했다. 녀석은 그 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전화해 그녀의 결혼 준비에 대해 묻고 농담처럼 ‘장효은, 이제 아줌마 되겠네.’라고 놀렸다. 그 뜻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응원하겠다는 마음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네 신랑 될 사람, 아니, 신랑 되시는 분께서 그렇게 높으신 자리에 계시고, 미래까지 창창하신 분이란 걸 왜 미리 나한테 말해 주지 않은 것이야? 그랬으면 내가 해물파전을 좀 더 맛있게 만들어서 네 입에 직접 넣어 줬을 텐데 말이야.”
기수는 그게 몹시 아쉽다는 것처럼 한탄하듯 말했다.
“오빠.”
“어, 그래.”
“요즘 가게 많이 어려워요?”
“뭐?”
효은의 당돌한 물음에 기수가 화통하게 웃었다. 누가 뼈 때리기 장인 장효은은 마마 아니랄까 봐.
승재는 그런 형이 못마땅해 눈치를 줬지만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오늘 결혼식도 비밀로 하려다 그의 복장을 수상하게 여긴 형의 취조에 항복하고 함께 온 길이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만 가. 얘 좀 쉬게.”
승재가 형 기수를 이끌었다. 효은에게는 눈빛으로 잘하라는 응원을 보내 주었다. 신부 대기실을 나오자마자 기수는 참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야, 인마. 넌 헛똑똑이야.”
“뭐?”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승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오래 붙어 있으면 뭐 하냐. 효은이 마음 하나 잡지도 못하고.”
진짜 헛소리였다. 승재가 형을 노려봤다. 기수는 반쯤 농담 삼아 건넨 것인데 동생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거, 뭔가가 있었다. 기수는 곧장 그걸 눈치챘다.
“친구라며?”
“친구야.”
승재는 무슨 뜻인지 안다는 것처럼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이고, 누구를 탓하겠어. 이런 답답한 동생을 둔 내 탓을 해야지.”
“정말, 여기까지 해라.”
“더 하면? 그럼, 결혼식 시작하기 전에 효은이 손잡고 도망칠래?”
승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병원을 찾아간 날은 진짜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 결혼은 하지 말라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할아버지를 위해 연극할 남자가 필요하면 날 이용하라고. 그 제안을 건넬 생각이었지만 효은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첫사랑이라고 했다. 맘을 뺏기는 건 쉬울 것이고, 그만큼 그녀가 받을 상처도 클 테다. 상대방은 효은에게 가짜 남편을 운운했다. 그의 진심이 무엇일지 뻔하지 않은가. 지금 그가 효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그를 괴롭혔다.
승재는 화장실을 핑계로 기수와 갈라졌다. 이대로는 결혼식장에 덤덤히 앉아 있을 자신이 없어 마음 정리를 단단히 하고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던 찰나였다. 코너를 돌던 한 여자와 부딪쳐 커피 샤워를 당하고 말았다.
“어머! 죄송합니다.”
여자의 손에는 커다란 일회용 컵이 들려 있었다. 정말 오늘은 뭐든 쉽게 지나갈 수 없는 날인 걸까. 그 와중에도 차가운 아이스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승재는 와이셔츠의 얼룩을 털어 냈다. 여자는 얼른 핸드백에서 물티슈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결혼식 오신 거죠?”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승재를 바라봤다.
“아, 네. 괜찮습니다. 대충 닦고 재킷으로 가리면 될 겁니다.”
“아뇨.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할 것 같아서……. 아직 예식 시간 남았으니까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시겠어요? 제가 이 호텔 쪽이랑 일해서 슈트 한 벌 정도는 금방 빌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승재는 여자의 넘치는 호의에 잠깐 망설였다. 커피 얼룩이 남은 와이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다고 해서 이 결혼식에 큰 결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기가 생겼다.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 효은에게도, 그녀의 가짜 남편이 된 남자에게도 당당할 것만 같았다.
“그럼,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신세라뇨. 받아 주셔서 제가 감사해요.”
여자는 밝게 웃으며 승재를 호텔의 다른 층으로 안내했다.
“서민아예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아, 한승잽니다.”
“신부 쪽 하객이신가 봐요. 제가 신랑 쪽인데 한 번도 못 뵌 분 같아서요.”
“네. 신부 친구입니다.”
“어쩐지. 요즘 젊은 사람 느낌이 났어요.”
여자는 편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말을 주고받는 걸 보니 영업 쪽 일을 하거나 그에 관련된 업무를 보는 사람 같았다. 나이는 그보다 많아 보였고, 커리어 우먼 특유의 지적이고 당당한 느낌이 풍겨 났다.
호텔 쪽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했으니 신랑 회사 직원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효은과 결혼하는 남자의 회사가 이 호텔의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사로 몇 번 접했었다. 그 사실을 자세히 알아본 건 그 남자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일까. 효은은 왜 그 남자를 선택한 것일까. 검색하면 할수록 승재는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는 패배감을 맛보게 되었다.
“신부님이랑은 많이 친한 사이예요?”
여자의 질문에 승재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중학교 동창입니다.”
“아하. 멋지네요. 전 그때 동창들하고는 연락하고 지내기도 힘들던데.”
“저도 연락하고 지내는 건 걔가 유일……. 아무튼 새 옷으로 갈아입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옷은 세탁해서 이쪽 호텔로 보내 드…….”
“여기.”
민아가 명함 한 장을 꺼내 승재에게 내밀었다.
“제 연락처예요. 여기 적힌 주소로 보내 주셔도 되고, 마음에 드시면 가지셔도 돼요. 세탁비 드리는 대신, 그게 산뜻하겠죠?”
승재는 민아가 건넨 명함을 내려다봤다.
[선흥 그룹 기획전략 팀 서민아 대리]
그가 추측한 대로 여자는 ‘권이도’라는 남자가 일하는 곳의 사람이었다.
* * *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도는 준비된 턱시도 셔츠를 재빠르게 껴입으며 박 비서에게 물었다.
“2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상해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을 때부터 생각지도 못한 잡음이 터지면서 시간을 잡아먹었다. 어떻게든 하루 일찍 한국에 도착하기 위해 일정을 앞당겨 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번 출장 역시 그를 직접 만나지 않는다면 사업 전반을 다른 경쟁 업체와 상의하겠다는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비쳤다.
‘선흥’이 지금의 자리에서 한 발 더 앞서 나가기 위해선 새로운 사업이 필요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읽어 내 투자자를 설득하고 유효한 사업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많이, 정확하게 움직여야 했다. 이도의 자리가 그랬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아래에서 침 흘리는 맹견들이 한가득이었다.
권 영감은 그 긴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를 세뇌시켰다. 그래야 네가 선흥의 왕이 될 수 있다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그는 오늘, 한 여자의 남편이 될 예정이다.
“상무님. 도착했습니다.”
박 비서의 감춰 둔 운전 실력 덕분에 다행히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도는 뛰듯이 호텔 안으로 들어서며 보타이를 맸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이도는 오직 한 사람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신부 대기실 앞에 도착하자 주변인들이 알아서 물러나 주었다. 이도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요?”
창가에 서서 호텔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효은이 예식 도우미인 줄 알고 물었다. 그녀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결혼식을 이제야 실감했다. 손끝이 떨렸고, 마치 심장이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숨 쉬기가 힘들었다.
“지금 도망가면 신랑한테 고소당할까요?”
그녀의 진지한 물음에 이도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신랑도 아직 도착 안 했…….”
“그래서 고소할 거야?”
이도가 물었다. 효은은 놀라 돌아섰다.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권이도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그가 진지한 눈으로 사과했다. 효은은 할 말이 없었다.
“어…… 네. 일단 사과는 받을게요.”
이도가 장효은답다며 웃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활짝 핀 꽃 한 송이 같은 여인을 제대로 바라보며 눈 안에 담았다. 새하얀 목련꽃. 효은을 생각하며 늘 떠올린 이미지였다. 꽃같이 아름다운 신부에게로 그가 다가섰다.
“나갈까?”
“아…… 네.”
“결혼하러 가자.”
이도가 효은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