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눈앞에 있어
이도의 대답에 놀란 사람은 효은뿐만이 아니었다. 선영까지 그를 다르게 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걸었다. 권이도가 여자와 스위트룸이라니.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도 그녀의 눈에 읽혔다. 왜 감추려는 건지. 뭘 보호하고 싶은 건지. 지금은 헷갈릴 수밖에 없었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흥미를 끌기엔 충분한 모습이었다.
“그럼, 우리가 양보해야지. 좋은 시간 즐겨요.”
선영은 먼저 상황을 정리하며 물러나 주었다. 영란은 어쩔 수 없이 언니를 뒤따랐다. 민아만 그 자리에 굳어 서서 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효은의 손을 꽉 붙잡은 채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네. 좀 부탁드립니다.”
이도는 전화로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룸 키를 방 쪽으로 올려 달라 부탁했다. 그 순간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효은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그녀가 먼저 손을 빼고 물었다.
“거짓말까지는 이해해도, 진짜 갈 필요가 있어요?”
“선흥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속이려면 그래야 해. 끊임없이 의심하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거든.”
의심하면 진실을 밝히면 되는 것 아닌가. 효은은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아닐 거라고 모두가 추측할 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쇼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알면 어때서요?”
“난 상관없어. 그런데 넌?”
오히려 이도가 되물었다.
“할아버님께 남들처럼 사는 모습 보여 드리고 싶다고 말한 건 너야. 만약 우리가 감정도 없이 지내는 사이라는 걸 고모님이 알게 되면 누구 귀에 먼저 들어갈까? 미안하지만 내 위치가 그래. 다들 탐을 내며 무슨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끌어내리고 싶어 하거든.”
그 자리를 지키고 살기 때문에 이렇게 가슴속에 녹지 않는 얼음을 넣고 지내는 걸까. 효은은 이도의 이유를 받아들였지만 가슴속엔 또 다른 안타까움이 자리 잡았다.
“같이 들어가잔 소리는 안 해. 무료 식사권을 쓰는 데 같이 가겠다고 한 건 나니까. 이번에 날 따라오는 건 네 자유야.”
이도가 강요하지 않고 선택권을 주었다. 효은은 그를 올려다봤다. 좀 전 혼자서 레스토랑으로 가겠다는 그녀를 따라나선 그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그의 행동에 마음이 쓰였다.
“근데, 할아버님께 오늘 말씀드릴 에피소드 중에 이게 제일 그럴싸하지 않나?”
그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그걸 간과했다. 효은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곳이 넓은 레스토랑이 아니라 꽉 막힌 호텔방이라는 것을.
* * *
민아는 곧장 사무실로 돌아와 이도를 마주쳤던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협력 업체였고, 그녀가 바이어들을 초청하면서 여러 번 숙박을 제공했던 곳이었다. 핫라인을 통해 연락을 넣자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네. 지금 묵고 계십니다.’
‘여자분도 같이 들어가셨습니다.’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원한 바는 아니었다. 민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아는 권이도라면 그렇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영란이 알게 된 이상, 지금 자신처럼 그의 뒷조사를 할 것이 확실했고, 잡음을 남기지 않게 위해서라도 그는 쇼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왜, 라는 물음이 남았다. 인생에서 결혼 따윈 없는 것처럼 살아오던 남자였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게 그녀였다. 내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삶. 그게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장효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도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 그 어린 여자가 그렇게 만들어 버릴까. 그렇다면 자신은. 민아는 지옥 같았던 외로움이 또다시 그녀에게 덮쳐 오는 막막함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를 사랑해도 그의 옆에 여자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그걸 너무도 쉽게 이뤄 낸 여자. 효은이 미치도록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미웠다. 민아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서민아예요. 지금 말하는 여자 좀, 알아봐 줘요.”
전화를 끊고 냉정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눈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가슴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 * *
스위트룸은 처음이었다. 효은은 눈앞에 펼쳐진 공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보던 광경이 환상처럼 다가왔다. 도시에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라고 했던가. 효은은 검소한 태호의 밑에서 자란 덕분에 작은 호텔 숙박도 망설이며 살아왔다. 대학 친구들과 떠났던 해외여행에서도 더 싸고 좁은 방을 원했다. 어차피 잠만 잘 것인데 뭐 하러 돈을 낭비하느냐고 친구들을 설득한 건 그녀였다.
“들어와서 천천히 구경해도 돼. 어차피 금방 나갈 건 아니니까.”
이도가 친숙한 공간인 것처럼 그녀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걸어 들어가 외투를 벗고 그것을 소파에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곧장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고가의 생수 한 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그러곤 돌아서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효은에게 음료 하나를 들어 보였다.
“마실래?”
“그거, 여기 있는 거 마시면 비싸잖아요.”
효은은 말을 꺼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이도가 그 정도 낼 돈은 충분히 있다는 것처럼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부끄럽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치스러운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검소할 줄은 몰랐네.”
이도는 칭찬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효은의 눈이 삐딱해졌다.
“아저씨는 이런 곳 익숙한가 봐요.”
그 모습이 효은은 거슬렸다. 이런 곳이 편하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이지만, 이미 그녀는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효은의 물음에 이도가 웃었다.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할 줄은 몰랐다.
“당연한 거 아닌가? 외국 바이어들이 나한테 잘 보이려면 이 정도 공간 제공은 기본이야. 넌 상무라는 자리가 어디쯤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를 아직도 시골에서 봤던 까까머리 군바리로 보는 건 아니겠지?”
“네, 아니에요. 그때가 지금보다 덜 재수 없었거든요.”
“뭐?”
효은이 기어이 한마디를 건네고 창가로 도망쳤다. 이도가 그녀 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해 버렸다. 그는 정말 그때보다 더 재수 없었고, 그때보다 더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장효은. 정신 차려.’
효은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도는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저 스위트룸만 구경하고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태호에게 자랑할 일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었다. 효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가려져 있던 커튼을 쳤다.
도시가 선물처럼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저 하루쯤은 이렇게 창밖만 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치를 누려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또다시 지울 수 없는 근심들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 저질러 버린 가짜 결혼. 그리고 점점 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감정. 모든 걸 잊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효은은 얼른 화면을 확인했다. 다행히 승재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장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디야?
“왜?”
― 병원 왔는데 너 없어서.
승재는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을 찾아와 주었다. 연락 없이 불쑥 먹을 것을 사 들고 올 때가 많았으니 오늘도 그렇게 그녀를 찾은 것 같았다. 결혼한다는 말을 꺼낸 이후 녀석과는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말 그런 결혼을 해야 하냐고 진지하게 묻는 녀석에게 그녀는 웃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정답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해 보는 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호텔이야.”
― 아…….
전화기 너머에선 다른 말이 없었다.
“승재야.”
― 오긴 올 거지?
“어?”
알겠다며 돌아가겠다고 할 줄 알았던 녀석이 기다리겠다는 것처럼 물었다. 효은은 잠깐 뒤를 돌아봤다. 이도는 보이지 않았다. 공간이 넓어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알았어. 빨리 갈게.”
효은은 전화를 끊고 이도를 찾았다. 인사를 건네고 먼저 돌아갈 생각이었다. 걸음을 옮겨 모퉁이를 돌자 넓은 침실이 나왔다. 이도는 그곳에 너무나 편히 누워 있었다. 밤새 회의를 마치고 온 길이라 했었다. 왜 이 스위트룸이 지금 필요한 건지 그녀는 뒤늦게 이해했다.
쉬고 있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돌아 나가려다 효은은 마음을 바꿨다. 조심히 걸음을 옮겨 그가 누워 있는 옆쪽 침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행히 침대가 트윈이었다. 잠든 그는 평온해 보였다. 바짝 조여 맨 넥타이가 불편해 보였지만 효은은 보는 것 그 이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이도가 잠시 뒤척이며 효은이 있는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들킨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여기서 그만 몸을 일으키라는 경고등이 머릿속에 켜졌지만 몸은 반대로 그를 따라 누워 버렸다. 효은은 그와 똑같이 모로 누워 이도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녀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눈, 코, 입. 눈, 코, 입.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겨 넣듯 바라봤다. 그는 잘생겼다. 그건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다시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코는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그의 눈동자에 붙들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잠든 적이 없는 것처럼 그의 눈빛은 선명했다. 효은은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만히 있어.”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간다고 말하려…….”
“봐 달라며.”
이도가 효은의 말을 없애듯 끊었다.
“…….”
“내 눈앞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