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흔들리는 마음
특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잠시 동안이나마 현실의 아픔을 잊게 해 주는 마취제 같다고 효은은 생각했다.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은 소리 없이 바뀌는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함께하는 하루가 쌓여 이도와 효은은 어느새 익숙해진 연인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오늘은 그들의 결혼식이 치러질 호텔에서 사전 준비 상황을 체크해 달라고 연락이 와 시간을 맞춰 온 길이었다. 예식 매니저의 상세한 설명과 세심한 추천에도 두 사람은 모두 오케이만 외칠 뿐이었다. 투자 건으로 밤을 지새우고 어렵사리 짬을 내 도착한 이도는 거의 투명 인간이나 마찬가지였고, 효은은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네가 알아서 정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 가지만 반복되었다. 이도의 무관심이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마음과 정성을 쏟을수록 그것이 소중해지고 애착이 간다는 걸 효은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드는 마음을 고쳐 잡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 결혼에 무관심해야 했다. 효은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결혼기념일 레스토랑 식사권을 미리 써 버리자 마음먹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이혼한 부부가 무료 식사권 때문에 결혼식을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같이 밥을 먹어요.”
효은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핸드폰으로 오후 일정의 서류를 간단히 훑고 있던 이도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바쁘면 먼저 돌아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이도는 효은의 동선을 따라 주었다. 그게 그가 그녀와 약속한 태호에게 보여 주기 위한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 안에 포함되기 때문일까. 그의 노력이 지금은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핸드폰은 제발 내려놓고 그녀만 바라봐 달라고 칭얼댈 수도 없었다. 효은은 이 비정상적인 가짜 결혼이 시작되기도 전에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그래서 미리 선언했다.
“우린 그러지 말자고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효은의 말이 우스운 장난 같았는지 이도가 잠깐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잘 웃지 않았다. 항상 화가 나 있는 것처럼 긴장한 상태였다. 그의 위치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효은의 눈에 그는 자신의 행복 따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거대한 사업을 이룩하고 그곳의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까. 그런 게 그에겐 행복일까. 효은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정말 무료 식사권 때문에 여기 같이 왔을까?”
이도가 어쩐 일로 진지하게 되물었다.
“알아요. 미련이 남아서겠죠.”
그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 네 말은 그 미련 같은 것도 갖지 않겠다는 거야?”
그의 물음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묻는 걸까. 감정 없이 헤어져 줄 것 같아서 그녀를 선택했다고 말한 남자가 이도였다.
“아저씨가 그걸 원했잖아요.”
“네가 원하는 건 뭐야?”
“네?”
“지금 나한테 불만 있잖아.”
효은은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모른 척하며 그녀를 모두 읽고 있었다. 이렇게 눈치가 빨라야 큰 사업을 굴리겠지. 효은은 일부러 아닌 척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 핸드폰 좀 내려놓고 날 보세요.”
“…….”
“그게 정상이에요.”
이도는 그녀의 말대로 따라 주었다. 그의 눈빛은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지금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묻는 것처럼.
* * *
“결국 ‘스마트 양로’ 쪽으로 기운 거야?”
스테이크를 한 점 입에 넣기도 전에 선영의 물음이 날아왔다. 민아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얼른 목을 축였다.
“중국 쪽이 워낙 발 빠르기도 하고, 협업 체제로 가도 저희한텐 손해될 게 없어요. 이도 오, 아니, 권 상무님 라인 중에 중국 쪽에 발을 걸친 사람들이 많으니 그게 더 이득이기도 하고요.”
“중국 놈들 뒤꽁무니 따라가면서 몸 사리겠다는 결론이네. 권이도다운 결론이야. 안전하게, 비겁하게.”
명료하게 결론 내린 선영이 입가에 비웃음을 올렸다. 민아는 그녀를 따라 웃어 주었다. 어머니지만 그녀가 모시는 이사진의 한 명으로만 대해야 했다. 그건 그녀가 ‘권선영’이라는 여자의 ‘입양아’로 선택되면서부터 짊어진 삶이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서민아’가 될 수 있는 수많은 후보군 가운데 그녀가 뽑혔다. 그 운명이 아니었다면 민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공개 입양은 오히려 그녀에게 기대감조차 가지지 않게 했다. 양부모임을 밝힌 선영과 한길은 부족함 없이 그녀를 키웠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민아는 그 모든 것엔 대가가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이 원하는 일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기획 팀 대리’의 역할도 사촌 오빠인 이도의 동태를 파악하는 선영의 스파이 노릇을 하기 위함이라는 걸 그녀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며칠 뒤에 상해 출장이 잡힌 걸 보니 진행 속도가 빠를 거 같아요.”
“출장? 결혼식 일주일 앞두고 정말 대단한 열정이네.”
“결혼식……이라니요?”
민아는 당황한 눈빛으로 선영을 바라봤다. 설마. 한순간 심장이 세차게 조였다. 이도의 결혼을 말할 리 없었다. 몰랐냐는 눈빛으로 선영이 말을 이었다.
“너 영국 출장 가 있는 동안 진행됐어. 무슨 결혼을 이렇게……. 아버지 성격이 급하시기도 하지만 그걸 따라 주는 그 녀석도 대단하지. 영란이는 권 상무가 연애를 하는 것 같다는데, 그게 말이나 되니?”
권이도. 결혼. 연애. 민아는 너무나 갑작스런 단어들에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프로젝트 팀을 맡게 되면서 영국으로 긴 출장을 다녀온 길이었다. 가기 전날에도 이도와 마주 앉아 일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그는 그때도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긴장감을 주었으며 또 그만큼 기대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너는 권씨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임을 명심해.’
그 말을 우연히 엿들었을 때, 그녀는 이 집안에서 홀로 외롭던 지난날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비밀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녀를 이 자리에 있게 한 선영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말 한마디면 이 선흥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그녀가 더 잘 알았다.
하지만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이도는 그녀에게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사촌 오빠. 그 이상으로 그를 생각했다. 위험하고도 달콤한 독이었다. 이도가 그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 적은 없었지만, 그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감정을 멈추는 것도 쉽진 않았다.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자 생각했다. 어차피 두 사람 모두 권씨의 피가 없었다.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는 사이였다.
“여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민아가 물었다. 선영은 그걸 왜 궁금해하냐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실력으로 선흥을 차지하겠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회장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도의 사생활 따위를 공격해서 그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보다 여동생 영란을 경멸했다. 항상 이도의 행동을 주시하며 조금의 흠이라도 생기면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히려 하는 동생을 한심해했다.
“답해 줄 사람, 저기 오네.”
선영이 민아의 뒤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민아가 돌아보자 화려한 투피스 차림의 영란이 걸어오고 있었다. 민아는 재빠르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언니는 여기 고기가 맛있나 봐? 난 비려서 한 입도 못 먹겠던데.”
영란은 언제나처럼 민아를 무시하고 곧장 언니 선영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선영은 귀찮은 얼굴로 조용히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천천히 입을 닦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있으려니 답답함을 참지 못한 영란이 꼰 다리의 위치를 바꿔 놓았다.
“할 말이 뭐야?”
선영은 뒤늦게야 영란이 원하는 물음을 던져 주었다. 영란은 근질거리는 입을 열었다.
“아무리 무관심하다고 해도 조카며느리 될 사람 얼굴은 궁금하지 않아?”
오늘도 선영의 심기를 건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영란이 이러는 이유는 뻔했다. 그녀도 그녀만의 방법으로 왕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인 것이다. 민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궁금하면?”
선영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답이 흘러나왔다. 영란이 걸려들었다는 듯 히죽 웃었다.
“지금 나가면 볼 수 있어.”
영란의 말에 선영보다 민아의 눈동자가 더 흔들렸다.
“우리 잘나신 권 상무가 지금 이 호텔에 있거든.”
영란이 신난 표정으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 * *
레스토랑에서 나온 이도와 효은은 연인들이 북적이는 주말 호텔 엘리베이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겐 감출 수 없는 생기가 있었다. 연인을 바라보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몸짓.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꼴불견이라 생각했던 그 모습이 지금은 아름다워 보였다. 효은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연인들을 관찰하다 자꾸만 가슴이 따끔거려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투명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라본 도시는 영화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마음을 더욱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병원으로 갈 거지?”
이도의 물음에 효은이 고개를 돌렸다.
“아, 네.”
주차장으로 곧장 향할 생각이었던 두 사람은 로비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함께 서 있는 세 여자와 마주해야 했다.
“이게 누구야?”
영란이 호들갑스럽게 알은척을 했다. 눈은 이미 효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었다. 이도는 한 발 앞서 효은을 가리고 섰다. 그게 그녀를 자신의 고모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걸 민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눈 역시 이도의 등 뒤로 감춰진 효은에게로 고정되었다. 어려 보였고, 예뻤다. 남자라면 빠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게 그녀의 마음속 불길을 더욱더 지폈다.
“모임이라도 있으셨나 보죠.”
이도가 영란의 뒤쪽에 서 있는 선영에게 눈을 맞추며 말을 건넸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그녀라는 걸 선흥 사람이라면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차기 회장 자리의 실질적인 경쟁자는 두 사람이었다. 영란은 그걸 뒤엎으려 노력하지만 쉽게 바뀔 수 없는 판이었다.
“우리야 약속하고 만나나, 뭐. 그나저나, 왜 인사가 없어?”
영란은 없는 시어머니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지 이도의 뒤쪽을 향해 날카롭게 일렀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효은은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이도에게는 고모가 두 명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다. 상견례는 그녀의 가족을 배려해 단출하게 치렀지만 언젠가 제대로 인사를 건네야 하는 사람들이란 건 유념하고 있었다.
“인사가 늦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장효은입니다.”
효은이 먼저 나서 인사를 건넸다. 영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래요. 인사가 많이 늦었네. 난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나 볼 수 있을까 했지. 그럼, 지금 차나 한잔할까?”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효은의 손을 급하게 붙잡은 건 이도였다. 효은은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죄송한데, 저희가 미리 예약한 게 있습니다.”
그녀는 듣지 못한 스케줄이 있었던 걸까.
“여기 스위트룸, 지금 시간이 아니면 이용할 수가 없다고 해서요.”
모두의 눈이 이도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