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사진 한 장
초여름의 반짝 더위가 물러가고, 장마가 찾아오려는지 연일 꿉꿉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떠나려는 차들로 도로는 조금씩 정체 구간을 보이기 시작했다. 권 영감의 옆자리에 앉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이도는 박 비서에게 조금 더 서둘러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상견례를 치를 장소는 두 집안의 중간 지점에 있는 호텔 중식당으로 정했다. 평소 중식을 좋아한다며 그 집이 검증된 맛집이 확실하냐고, 진지하게 묻던 효은의 목소리가 생각나자 이도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머금어졌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구먼…….”
무상이 창밖을 건너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날도 비가 왔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홀로 남은 손자와 평생의 비밀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 녀석을 떠밀 듯 결혼으로 밀어 넣었다. 과연 잘한 일일까. 그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버릴 수 없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무상이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흔들림 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단단한 버팀목. 그 역할을 이도는 충실히 해 주었다. 더 무엇을 바랄까. 무상의 입이 썼다. 이 녀석이 그의 핏줄이었다면. 놓지 못할 아쉬움도 그만큼 커졌다.
“도착했습니다.”
박 비서의 말에 무상은 옆에 놓아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차 안에서 빠져나갔다. 이도의 부축을 받으며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알아본 지배인들이 깍듯한 인사를 올리며 안내를 해 왔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에 그들이 만나기로 한 룸 안에는 가지런하게 세팅된 테이블만이 놓여 있었다. 권 영감과 이도가 자리에 앉아 목을 축이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휠체어를 탄 태호와 효은이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섰다.
“……우리가 늦었습니다.”
“아니올시다. 우리도 금방 도착했소.”
태호와 무상이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이도와 효은이 차례로 양가 어른에게 조용한 인사를 올린 후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으며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봤다.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이도는 오늘따라 더욱더 멋스러웠고, 새하얀 투피스 차림의 효은은 단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먼저 이 결혼을 급하게 서두르게 된 걸, 모두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네…….”
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네. 다르게 보면 좋은 짝을 빨리 만나게 돼서 다행 아닌가.”
무상이 태호의 말을 받아 주었다. 효은 가족을 배려해 넷만 참석한 단출한 자리였다. 태호는 이도와 효은을 바라보며 무사히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증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외출 허락을 받는 게 쉽지 않았다. 주치의인 김 교수에게 하루만 강도 높은 약을 처방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컨디션 조절 잘하라는 꽉 막힌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꼭 이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늘에 빌었다. 다행히 아침부터 통증이 가시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효은의 애원에도 태호는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우리 아이가 아직 어리고, 큰 집안을 이끌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도 좋게 봐줘 고마울 따름이야. 권 상무가 앞으로 우리 효은이를 잘 가르쳐 주고 보듬어 주길 부탁하네.”
효은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결혼이라는 게 정말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태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무서운 사실이 실감 나기도 했다. 그런 효은을 바라보던 이도가 그녀 앞으로 조용히 물잔을 밀어 주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은 그녀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듯 애써 웃어 보였다.
태호의 몸 상태를 생각해 상견례는 간단히 끝났다. 병원으로 같이 돌아가겠다는 효은을 이도 옆에 세운 건 태호였다. 얼른 결혼 준비를 서두르라는 거였다. 두 사람이 좀 더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도 읽혔다. 이도는 권 영감을 회사 차편으로 보내고 박 비서가 가져온 본인의 차에 태호와 효은을 태웠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그는 태호의 상태를 살폈다.
할아버지의 옆을 지키던 효은은 몇 번이나 이도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 결혼이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녀보다 그가 더할 것이다. 가짜라는 선을 긋긴 했지만 그는 진짜처럼 믿음직스러운 신랑감이었다.
“몸 챙기시고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마중 나와 있던 김 교수가 태호를 맞았다. 이도는 효은의 옆에 서서 태호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효은을 맡기고 돌아서는 태호의 얼굴이 평온했다. 효은은 그것만으로 감사했다.
둘은 차에 올라 행선지를 정했다. 당장 몇 주 뒤로 잡힌 결혼 준비를 해내려면 지금부터 바쁘게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도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것일까. 효은이 불쑥 다른 소리를 꺼냈다.
“오늘 꼭 결혼 준비 해야 해요?”
“뭐?”
“나……, 지금 정말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효은은 이도를 바라보며 조르듯 말했다.
“아, 맞다. 아저씨는 내 말 아무것도 들어줄 수 없다고 했죠.”
그녀가 곧장 풀 죽은 목소리를 내놓았다. 이렇게 그를 쥐락펴락할 줄은 몰랐다. 열 살 차이가 무슨 의미일까. 이도는 핸들은 힘 있게 움켜쥐며 말했다.
“……어딘데?”
꺅꺅, 환호성인지 고문당하는 소리인지 헷갈리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자 이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효은이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은 다름 아닌 놀이공원이었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 놀이공원이라니.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효은은 실내 놀이기구를 타면 된다고 고집을 부리며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이도는 자꾸만 이 어린 여자에게 끌려다니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어찌해 볼 수도 없었다. 싫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어느새 그도 모르게 그녀의 의중을 살피며 모든 것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이었다.
놀이공원에 들어선 효은은 여느 스물네 살 여자들처럼 신나 하며 공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비 오는 날이라 사람들이 넘쳐 나진 않았지만 주말을 즐기는 가족과 연인들로 실내 놀이공원 안은 북적였다.
이도는 효은이 왜 이곳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평범한 행복. 그런 것들을 꿈꾸지 않게 되면서 이도는 모든 걸 포기하며 살았다. 놀이공원에 와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는 행복하게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효은도 지금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픈 태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실감 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을 것이다. 그녀 또래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뭐부터 탈까요? 아저씨가 자신 있는 거 말해 보세요.”
효은의 재촉에 이도는 이리저리 놀이기구들을 둘러보았다.
“너 혼자서 타. 난 적당한 데 앉아 있을 테니까.”
이도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효은이 그런 그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서른넷이나 먹고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냐는 둥, 한 기업을 이끌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타는 건 전 세계 CEO들을 욕보이는 수치가 아니냐는 둥, 되지도 않는 이론을 가져다 붙이며 이도의 자존심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결국 이도는 효은과 함께 바이킹 기구 안에 앉게 됐다. 그는 저절로 안전 바를 세게 움켜잡았고, 효은은 그런 이도에게 단단히 팔짱을 꼈다. 급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것도 잠시, 바이킹이 세차게 출발했다. 기구가 오르내리는 것에 맞춰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꺄아!”
처음엔 무덤덤했던 이도도 생각지 못한 쾌감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조이고 조이기만 했던 마음속 빗장이 잠시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를 푸는 법도, 건강하게 이겨 내는 법도 몰랐던 그였다. 자신을 이곳에 데려와 준 효은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했다. 이도는 신나 소리를 지르는 효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우웩.”
“괜찮아요?”
“괜찮……, 자, 잠깐만.”
쉬지 않고 놀이기구 시승식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이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가까운 화장실로 직행했다.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효은을 따라 모든 기구를 탔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나름 각종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놀이기구와는 친해질 수 없다는 걸 이번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걸 알게 해 준 효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지, 이도는 위장 속의 모든 것을 게워 내며 생각했다.
“자, 이거 마셔 봐요.”
힘든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서자 효은이 얼른 그에게 다가와 보리 음료 하나를 내밀었다.
“……생각 없어.”
창백한 얼굴로 이도가 고개를 저었다.
“내 말 들으세요. 속 안 좋을 땐 보리 물 마시면 금방 괜찮아진다니까요.”
효은은 기어이 이도의 손에 음료수병을 쥐여 주었다. 이도는 효은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음료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정말 보리 물이 들어가자 뒤틀린 속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효은이 그를 너무도 잘 아는 보호자 같기도 했다.
“어때요? 좀 괜찮죠? 할아버지도 그렇게 속 많이 가라앉히셨어요.”
간병을 하며 터득한 방법인 줄은 몰랐다. 효은의 배려가 안쓰럽게 느껴져 이도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 했다. 놀이기구 말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효은은 저 멀리 보이는 포토 존을 가리켰다.
“오늘 에피소드, 남겨야죠.”
그녀의 웃음이 이젠 사악해 보였다.
기념사진을 찍는 곳엔 벌써 여러 쌍의 커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효은과 이도도 평범한 연인 사이 같아 보였다. 이도의 옆에 선 효은은 긴장한 듯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떨어져 있었다. 이도는 그런 그녀를 당겨 자신의 곁에 붙어 서게 했다. 효은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이도는 모른 척 앞으로 시선을 주었다.
“자, 다음 손님!”
사진사가 두 사람을 불러 포토 존 앞에 세웠다.
“커플이시죠? 일단 같이 붙어 서 보시겠어요?”
이도는 망설임 없이 효은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효은은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려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놀이기구를 탈 땐 정신없이 팔짱을 끼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인 같은 포즈를 취하려고 하니 자꾸만 발가락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두 분, 조금만 더 붙어 보세요! 남자분이 여자분 어깨를 감싸 보시겠어요? 여자분은 남자분 허리를 감으시고요. 네, 좋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을 이런 때 하는 것일까. 효은은 그녀와 달리 평온한 얼굴의 이도를 살짝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는 모를 것이다. 그가 그녀의 첫사랑이었다는 걸…….
처음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텅 비어 있는 눈 때문에 관심이 갔다. 그러다 재수 없는 말투에 금세 싫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을 보자 또 마음이 쓰였다.
10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땐 그가 내뱉은 독한 말들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숨어 있는 그의 따뜻함이 자꾸만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날, 겁 없는 질문을 던졌는지도 모르겠다.
‘왜 나여야만 하는지…….’
그는 잔인하게 대답했다.
‘너라면……, 감정 없이 깔끔하게 헤어져 줄 것 같아서.’
찰칵, 사진이 찍히는 순간 웃고 있는 사람은 효은 혼자였다. 슬프게도 환하게 웃는 효은의 옆에 선 한 남자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