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불행한 행복
병실 문을 열자 노인은 기다린 것처럼 그를 맞았다. 한 번쯤은 만나러 올 것이라 예상했던 걸까. 그게 자신의 손녀에 대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쪽으로든 결론을 내리기 위해선 이도의 방문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거……, 입맛 도는 과일입니다.”
박 비서를 통해 효은의 할아버지 상태와 도움이 되는 음식을 전달받았다. 현재 복막까지 암의 전이가 진행된 상태라 소화도 쉽지 않다고 들었다. 어떻게든 항암을 받아 버티려면 먹어야 했다. 효은이 그 방법으로 신맛 나는 과일을 사다 나르고 있다 들었다. 그중에도 최상의 것들을 주문해 가지고 온 길이었다.
“……고맙네. 앉게나.”
효은은 학교를 가고 없었다. 간병인이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자, 통증이 좀 가셔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 태호가 일어나 앉았다. 이도는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10년 전, 시골 마을에서 마주했던 건강한 태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인생이라는 건 어느 순간, 소용돌이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곤 했다. 그래서 모두들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걸 깨달은 이들은 이미 행복할 시간을 부여받지 못하는 운명 앞에 놓여 있었다. 그를 무연히 바라보는 태호의 마른 눈빛에서 이도는 그것을 읽었다.
“많이 부담되는가?”
불쑥 건넨 태호의 물음이 이도의 죄책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미안하네……. 나도 이렇게 서두를 생각은 없었어.”
지금 모습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도는 궁금했다. 왜 그였는지. 그저 한 번 스쳐 가듯 얼굴을 본 게 전부인 사이였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인간인지, 태호가 알 리 없었다. 그리고 만약 알았다면, 그는 절대 효은에게 맞는 짝이 아니었다.
“왜…… 접니까?”
끝내 참지 못한 이도의 물음이 태호에게 닿았다. 잠깐 거친 숨을 몰아쉬던 태호가 짧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도의 손을 끌어와 붙잡았다. 주삿바늘이 꽂힌 그의 손은 따뜻했다. 이도는 그것이 어쩐지 견딜 수가 없었다.
“효은이가 자넬 좋아했어. 한 번씩 묻곤 했지. 그 까탈스런 녀석이 말이야.”
전혀 상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도는 잠깐 숨을 삼켰다.
“나도 자네라면 어떨까 생각했었어. 권 회장이 원하는 것이야 들어주면 그뿐이야. 내가 원하는 건…… 우리 효은이가 홀로서기를 하는 거라네. 자네가 도와줄 수 있겠나?”
홀로서기. 태호는 이도에게 효은과 결혼하여 그녀의 홀로서기를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 뜻이 무엇일까. 그에게 바라는 게 기댈 수 있는 남편이 아닌 걸까. 태호의 말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저한테 원하시는 게…… 그뿐이십니까?”
“그 이상은…… 내 욕심 아니겠나? 혼자 있는 나 때문에 제대로 긴 여행 한 번 못 가 본 애야. 정말 행복할 나이에, 내 병수발을 하느라 기약 없이 세월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아. 이것 역시 내 이기적인 마음이지. 자네를 이용하는 날, 용서해 주겠나?”
태호가 미안한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이 노인은 모든 걸 알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가 맡은 역할에 충실할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효은이가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도는 당연한 최악을 경고했다.
“그 불행도 행복으로 잘 바꿀 아이야. 자네가 믿어 주게.”
믿음과 신뢰.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랑. 태호가 효은에게 남기는 것들이었다. 이도는 경험할 수 없는 마음들. 결혼을 생각하는 두 노인의 목적은 그렇게도 달랐다. 씁쓸함이 가슴을 휘저었다. 웃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도는 태호의 손을 힘껏 마주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병실에서 나온 이도는 눈을 동그랗게 뜬 효은과 마주쳤다. 그녀의 당혹스런 표정 안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그녀가 그토록 결혼에 절박했던 이유를 숨기고 싶었던 마음까지. 이도는 그 전부를 헤아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밥 먹었어?”
효은은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에게 그녀는 밥으로 보이는 걸까. 그는 효은만 보면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그녀는 말없이 이도를 바라보고 서 있기만 했다.
“가자. 맛있는 거 먹으러.”
“아저씨.”
거절할 틈도 없이 이도에게 팔이 붙잡혔다. 효은은 내치지 못하고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나섰다. 솔직히 그가 아니라면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었다. 차라리 모든 걸 들켜 버린 지금 순간이 마음은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병원 근처 한정식집에 들어선 두 사람은 각자 몫의 식사를 주문했다. 하지만 이도는 처음부터 식사의 목적은 그녀라는 것처럼 효은의 숟가락질만 체크하고 있었다.
“더 먹어.”
그는 효은 쪽으로 불고기가 담긴 접시를 다정히 밀어 주었다.
“먹고 있어요.”
그의 친절이 낯설어 효은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다 먹을 때까지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이 남자 정말 왜 이럴까. 효은은 이도가 얄밉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지금 그녀는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은 상태였으니까. 이럴수록 당신만 손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녀 또한 경고했다. 보호자. 이도는 효은의 정의에 흐린 웃음을 내놓았다. 그랬다. 남편이 아니라 보호자가 더 어울리는 상대이긴 했다. 어쩌면 그때 병원 앞에서 만난 친구가 효은의 결혼 상대로는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도는 다시 태호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효은이가 자넬 좋아했어.’
“좋아하는 사람 있어?”
무슨 생각일까. 물음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네?”
밥을 먹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효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럴 나이잖아.”
이도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걔는…… 그냥 친구예요.”
효은은 없는 사실을 오해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 친구 놀랐겠군. 갑자기 네가 청혼을 해서.”
이도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물잔을 들었다.
“생전 처음 본 사람한테도 결혼하자고 했어요.”
효은은 그게 당신이라는 것처럼 이도를 바라봤다.
“우리, 처음 본 건 아니잖아.”
이도는 자꾸만 알고 싶어졌다. 너는 그때 왜 나를 마음에 품었는지. 그 처연하고 감정 따윈 없었던 남자를. 정말 진심이었는지. 하지만 솔직하게 물을 수 없었다. 모르는 척하는 게 맞았다. 받아 줄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철저히 이용해야 할 운명이니까.
“결혼할 남자는 찾았어?”
상념을 지운 이도가 본론을 꺼냈다.
“……찾고 있는 중이에요.”
효은은 작아진 목소리로 받아쳤다.
“네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건 나잖아.”
그의 뻔뻔하고도 자신 있는 목소리가 효은의 오기를 더욱더 부추겼다.
“그래서요?”
“자존심 부리고 싶어?”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본 남자였다. 효은은 더 이상 의미 없이 버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왜 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게 되었는지.
“결혼하기 싫다고 한 건 아저씨였어요.”
“생각이 달라졌어.”
“……왜요?”
효은이 조금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도는 자신이 잔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맞았고, 그게 효은을 위한 것이라고 이미 결론 내렸다.
“우리 집 영감님이 끈질긴 사람이라. 네가 안 되면 다른 여자를 생각할 거야. 어차피 그래야 하는 거면, 네가 좋을 것 같아. 너라면……, 감정 없이 깔끔하게 헤어져 줄 것 같아서.”
애써 실망감을 감추려 하는 효은의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비껴갔다. 만약 연인이라면 아주 잔인한 말이었다.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남자. 어쩌면 그녀가 상대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효은도 답이 없었다. 그가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없다면서요?”
이성적이어야 했다.
“뭘 원하는데?”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여 드리는 거요.”
그녀는 처음부터 그것밖에 바라는 것이 없었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의 대답은 쉽게 흘러나왔다.
“진짜죠?”
“그래.”
이도가 진심을 전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러다…… 할아버지가 병을 이겨 내셔서 저보다도 더 오래 사시면요?”
엉뚱하지만 애처로운 질문이 이도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럼 그때까지 난 헤어지잔 말을 못 하는 거지.”
방금까지 감정 없이 헤어질 여자를 찾던 남자가 맞는 걸까. 효은은 이 남자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되는 것이었다.
“다른 말 하기 없기예요.”
효은이 그를 진지하게 노려봤다.
“그래.”
“그럼, 우리 결혼하는 거예요?”
“그래.”
“정식으로 청혼해 주세요.”
“뭐?”
효은의 당돌한 요구에 이도가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할아버지한테 말할 에피소드가 필요해서 그래요.”
귀여운 변명 같았다. 이도의 입가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랑 결혼해 줄래?”
“…….”
“장효은.”
효은이 그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밝게 미소 지었다. 예뻤다. 마음이 시큰거리게. 이따위가 뭐라고. 그에겐 없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잠시 살아 있는 것처럼 뛰는 것 같았다.
“잘 살아 봐요, 우리.”
효은이 손을 내밀었다. 이도가 작고 하얀 손을 붙잡았다.
그는 이 순간을 기억했다. 후회의 불씨가 되어 그를 좀먹은, 그럼에도 마음에 새길 수밖에 없는 불행한 행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