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짜 결혼
“많이 친한가.”
물음인지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만 내놓고 이도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탄 차 안에는 답답한 적막만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그는 비서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그녀를 찾아왔다. 그게 효은은 더 불편했다.
“우리,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벼랑 끝에 서 있어도 이제 더 이상 이 남자에게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효은은 싸늘하게 경계를 그었다.
“그래서, 아까 그 남자애가 너랑 결혼해 준다고 했나?”
어디서부터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도는 효은의 약점을 단단히 잡은 것처럼 여유 있게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에겐 절박한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주도권이 될 수도 있었다. 효은은 화가 났지만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상관 마세요. 제 일이에요.”
“어리게 굴지 마.”
“이상한 취미가 있으시네요.”
“뭐?”
“장난감을 너무너무 갖고 싶어 하는 아이 앞에서 줄 것도 아니면서 계속 장난감을 눈앞에 내밀고 있잖아요.”
그녀다운 비유였다. 이도는 또다시 웃었다.
“결혼이 장난감인가?”
“혼자 진지한 척하지 마요.”
이제 전면전인가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기대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도 지금 저 갖고 놀고 계시잖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라 생각하고 관심을 끊으면 그만이었다. 영감이 괴롭히든, 이 아이가 괴롭든, 아무 상관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결혼해. 가짜라도 상관없다면…….”
결국 이도는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다. 선흥의 회장 자리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게 맞았다. 너와 결혼하면 내게 필요한 선흥 주식이 나에게 넘어온다니, 나는 너와 결혼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맞았다. 결혼해 달라고 매달리는 게 덜 구차한 것일지도.
“아주 감사하네요.”
효은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그러다 저 좋아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고개를 돌려 하는 말이 당돌했다.
“……뭐?”
“가짜란 말은 진짜가 될 수 없다는 소리잖아요.”
“넌 진짜가 되고 싶은가 보지? 그러면서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나한테 말한 건가?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괜찮다고 말한 건 너일 텐데?”
말장난이었고, 어린애와 벌이는 치졸한 감정싸움이었다. 이도는 자신이 평소답지 않다고 느꼈다. 흔들리는 게 선흥 주식 때문인지, 오늘 다른 남자에게 결혼하자고 당당히 말하던 이 여자애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으니까.
“아저씨 아니어도 결혼할 사람 많아요. 내가 말하면 할아버지도 받아들여 주실 거예요. 오늘 얘기는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효은은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말하고 차를 벗어났다. 어쩐지 한 방 먹은 것 같아 이도는 가슴께가 얼얼했다. 그리고 뒤늦게 웃음이 흘렀다. 꼴, 좋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 * *
“어서 오세……! 어, 장효!”
선 굵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손님을 맞던 기수가 효은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곧장 홀로 테이블에 앉아 혼술을 하고 있는 자신의 동생 승재를 바라봤다.
그가 지금의 조그만 전통 막걸리집을 차린 건 2년 전이었다. 고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한 기수는 일찌감치 공부가 아닌 창업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가게를 차렸다. 모두가 안 될 거라며 부정적으로 보던 일을 효은과 승재만이 응원해 주었다.
“웬일로 우리 효은 마마님이 행차하셨대?”
승재가 눈빛으로 형을 말렸지만 뜻대로 될 리가 없었다.
“혹시 남자 때문이야? 오호, 장효은도 드디어 연애를 하는 것이야? 설마, 우리 승재는 아니겠지?”
“그 입 좀 닫아라. 어떻게 안 되겠어?”
결국 승재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냅 둬. 오빠 말 못 하면 죽을 거야.”
‘네가 잘 아는군.’ 하는 표정으로 효은을 바라보던 기수가 심각한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적당한 선에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일단 왔으니까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시켜. 오늘은 내가 장사를 접는 한이 있더라도 너한테 대접할 테니까.”
“맛있는 해물파전 만들어 주세요. 그거라도 먹어야 이 기분이 풀릴 것 같아요.”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승재는 아닌 척하면서도 효은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궁금했지만 어쩐지 쉽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먼저 말해 주지 않는다면 그가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왜 안 물어?”
기수가 음식을 만들러 주방으로 들어서자 효은이 승재에게 말을 걸었다.
“……누군데?”
기어이 그의 입으로 묻게 만드는 효은이었다.
“내 첫사랑.”
뜬금없는 고백에 승재는 눈을 키웠지만 곧 웃어 버렸다.
“그 첫사랑 나 아니었어?”
“뭔 자신감?”
“섭섭하네, 친구.”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첫사랑이라니. 효은을 여자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늘 챙겨 주고 싶은 여동생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이기에, 어쩔 땐 보호자 같은 마음이었다.
“할아버지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래.”
효은은 폭탄 발언을 아주 담담히 했다.
“뭐, 갑자기……?”
“마지막 소원 같은 거지.”
효은이 슬픈 눈을 감추고 웃어 보였다.
“그래서, 할 거야?”
오늘 뜬금없이 결혼을 운운하는 효은이 수상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그 이유가 갑작스러운 결혼 약속 때문이었다니. 승재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 사람이 아니라도 결혼은 해야겠어. 그러면 할아버지가 더 오래 사실 것만 같아. 아니, 그러실 거야.”
무슨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결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할아버지 마음은…… 너 혼자 남겨지는 게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잖아.”
“맞잖아. 나 혼자 남겨지는 거.”
냉정하게 현실을 말하는 효은이 안쓰러웠다.
“효은아.”
“그 사람이 가짜 남편 해 주겠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아. 근데 화가 나더라. 난 이렇게 절박한데, 그 사람은 가짜 운운하는 게. 그래서 너 아니어도 결혼할 남자 많다고 하고 돌려보냈어.”
“뭐?”
심각한데 또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냥 한다고 할걸. 조금 후회된다, 친구야.”
하하하. 웃음이라도 터뜨려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상처 입은 효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소독될 것이라 승재는 생각했다. 하지만 웃지 못했다. 효은이 결혼을 하겠다니.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승재는 애꿎은 술잔만 만져 댈 뿐이었다.
* * *
핸드폰을 앞에 두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이도는 비서실의 멘트에 고개를 들었다.
― 상무님, 작은고모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윽고 상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열리고 중년의 여인이 제집처럼 들어섰다.
“업무 중입니다. 급한 일 아니시면…….”
“그래. 너도 날 무시하는 게 몸에 밴 사람이지? 어쩜 네 아버지 젊었을 때랑 똑같은지.”
주기적으로 찾아와 그를 쑤셔 대는 게 일인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 똑같이 닮은 아버지가 그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것을. 한 번씩은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은 이미 다칠 공간도 없었으나 귀가 뚫려 있는 탓에 매번 그 소음을 들어야 했다.
“할아버지한테 또 무슨 소리를 듣고 오신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만 가시죠? 저도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하던 참이라.”
건드리면 물겠다는 선전 포고에 영란은 잠깐 주춤했지만 네가 무슨 수로 덤비냐는 듯 자릴 잡고 앉아 가방 안의 담배를 꺼냈다.
“이거 한 대만 피우고 가마.”
“금연입니다.”
“그래서?”
영란이 이도를 노려봤다. 그래서, 네가 어쩔 셈이냐는 막무가내의 눈빛은 이 집안의 내력인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일로 승부하는 큰고모 선영이 대하기는 편했다. 영란은 권 영감과 닮았다. 자식을 볼모로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드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비슷할까.
“결혼한다고?”
이도는 권 영감의 입이 그리 무겁지 않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생각 중입니다.”
“결혼 같은 걸로 네 자리 굳힐 생각 없는 것처럼 거만하게 굴더니, 어째 마음이 바뀌었어? 왜, 영감이 손주 하나 보기 전엔 이 선흥 줄 생각이 없대? 천하의 권이도도 이제 내리막길인가. 언니가 신사업 성공하고 아버지랑 독대를 하니 똥줄이 타기 시작했어?”
권 영감이 핏줄을 다루는 방식은 비슷했다. 결과를 가져오라 어르고, 해내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것을 얻어 냈다. 그러면서도 절대 전부를 꺼내 보여 주지도, 약속하지도 않았다. 이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언제 영감에게서 버려질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걸 내려놓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지겨운 이득 싸움에서 패배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결혼한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럼, 왜 한다는 거야?”
영란이 이도를 보자 그의 눈빛이 묘하게 흐려졌다.
“…….”
“뭐야. 우리 모르게 연애라도 했니?”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 있으면서도 영란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권이도가 다르게 움직였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놔야 했다. 이도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의 아들을 앉히려면 어떤 단서라도 그녀에게는 소중했다. 그게 영특한 이도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거짓이라도 해도, 그 계산까지 미리 해 두는 편이 맞았다.
“남자인 걸 포기할 만큼 여유 없진 않습니다.”
“……뭐?”
이도가 여자를 만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모를 약점을 잡기 위해 미행을 붙여도 그는 너무도 정직하게 살았다.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기계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런 그의 금욕 생활을 멈추게 만든 여자가 나타났다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영란은 과부하가 된 머리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생각은 집에 가서 천천히 하시고, 이만 나가 주시죠.”
이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일어섰다. 가 봐야 할 곳이 있었다.
영란은 이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여자의 직감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뭔가가 달랐다. 그게 정말 결혼할 여자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도의 바쁜 뒷모습이 그녀의 궁금증을 더욱 키워 냈다.